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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창단  밀양 의열기념관 2층에 창단 당시의 모습을 그림과 기물들로 재현해 놓았다.
▲ 의열단 창단  밀양 의열기념관 2층에 창단 당시의 모습을 그림과 기물들로 재현해 놓았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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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9일 밤 중국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농민 반씨 집, 나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에 해당하는 13명(10명이라고도 한다)의 조선 청년들이 눈을 빛내며 모여들었다. 이 집은 이종암이 전세를 내서 얻은 집으로, 그의 거처이자 동지들의 연락처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난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얻었소?"

김원봉이 입을 열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래서 나 김원봉은 우리가 앞장서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결사를 만들자고 주장하오."

"혹시 약산(김원봉의 호)은 생각해 둔 이름이 있소?"

"'우리는 정의를 추구하고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맹렬하게 싸운다'라는 말에서 '정의'의 '의'(義), '맹렬하게'의 열(烈)을 따 의열단이라 부르겠소. 동의하시겠습니까?"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활발한 토의 끝에 공약 10조와 활동 지침을 만들었다.

"이제 우리 의열단을 이끌 지도자를 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나 김상윤은 이 모임을 주도하고 단의 명칭을 정한 약산을 우리의 '의백(義伯, 단장)'으로 추천하오."

김상윤의 말에 김원봉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며 손을 저었으나, 단원들은 모두 동의했다.

"옳소, 약산이 맡아주시오."
"맡아주시오."

단원들의 강권으로 단장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단원들은 이미 강추위가 몰아치는 11월의 작은 집에서 밤을 새워 토론하며, 민족 독립을 위해 반드시 처단해야 할 대상인 7가살과 반드시 파괴해야 할 5파괴를 정했다.

7가살은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악덕 지방 유지이며, 파괴 대상 5파괴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주요 기관이었다. 타격 대상이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이어 단장의 제안에 따라 자신들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서명을 했다. 모두 뜻을 같이 하는 동지이자 혈맹의 의미였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의를 같이 하는 동지입니다. 의열단 단원으로서의 당당함과 의연함을 죽어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11월 10일 아침, 일제 강점기 가장 강력한 의열 투쟁 단체이자 창단 직후부터 일제 침략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최강의 비밀 결사가 탄생했다.
 
의열단 단원들 의열기념관 2층 전시관에 의열단 단원들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다.
▲ 의열단 단원들 의열기념관 2층 전시관에 의열단 단원들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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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항일운동 테마 거리를 걷다

순우리말로 '미리벌'이라고도 부르는 경남 밀양.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성씨 본관인 밀양 박씨의 본향(첫 번째는 김해 김씨), 조선시대 사림의 원조로 추앙받는 김종직의 고향,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한 사명대사 유정의 고향으로 알려진 고장이다. 한편으로는 3대 아리랑 중 하나이며 가장 씩씩한 아리랑으로도 불리는 밀양아리랑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흔히 보수의 본향이라고도 부르는 밀양 땅에 발을 디뎠다. 일제 강점기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배출한 도시, 밀양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넓은 농토를 보유하고 있어 오히려 현대 산업화의 중심에서 비껴가는 바람에 도시화로의 발전이 더뎠다.

시내는 외곽 일부를 제외하고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가 대부분이며, 10층 이상의 높은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도시의 상징인 대형 아파트 단지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30년 전 옛 도시의 모습 같은 느낌을 준다.
 
항일운동 테마 거리 해천을 중심으로 양옆에 항일운동 테마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왼쪽에 의열기념관이 보인다.
▲ 항일운동 테마 거리 해천을 중심으로 양옆에 항일운동 테마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왼쪽에 의열기념관이 보인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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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관통하는 밀양강을 건너 과거 밀양 읍성의 영역에 들어서면 지번 주소로 내일동, 내이동 지역이다. 이곳이 과거 밀양의 중심지였다. 밀양강을 내려다보는 영남루, 조선 시대의 밀양 관아와 인공 하천인 해천, 밀양아리랑 시장 등이 남아 있거나 복원되어 있다.

이 일대를 남북으로 가르는 해천은 조선 성종 때인 1479년 밀양 읍성을 방어하기 위해 조성한 해자, 인공 하천으로 근대 이후 하수구로 사용되고 서울 청계천처럼 도로 아래에 묻혀 있다가 다시 복원된 작은 하천이다. 이 해천 양옆이 밀양에서 이름 붙인 항일운동 테마 거리이다.

이 거리의 동쪽에는 수많은 벽화와 사진, 안내문들이 있다. 밀양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안내, 김원봉과 윤세주 등 밀양 출신 독립 운동가들의 자료와 사진, 그림 등이 빼곡하게 거리 벽면을 채우고 있다. 이들 중 초등학생들이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적은 타일 벽화가 인상적이다.
 
밀양의 독립 운동가  해천 동쪽 벽면에 밀양 출신의 독립 운동가 83명의 이름이 명함처럼 붙어 있다. 이들 중 아는 이름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밀양의 독립 운동가  해천 동쪽 벽면에 밀양 출신의 독립 운동가 83명의 이름이 명함처럼 붙어 있다. 이들 중 아는 이름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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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밀양의 독립 운동가'라는 제목으로 밀양 출신 독립 운동가 83명의 이름을 붙여 놓은 벽면에 눈이 간다. 83명의 이름 중에는 김원봉과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한봉인 등 의열단 창립 멤버 5명의 이름이 눈에 띄며,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의열단의 정신적 대부였던 황상규, 윤세주와 6촌 간이면서 만주에서 활동하며 대종교 3대 교주를 지낸 윤세복,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위원을 지냈고 의열단의 고문으로 참여했던 김대지, 1920년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 단원 최수봉 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이 명단을 죽 들여다보면 밀양과 의열단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거리의 서쪽에는 김원봉 생가터에 세워진 의열기념관이 우뚝하며, 그 옆으로 2019년 11월 10일,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세워진 의열기념탑이 있다. 의열기념탑 바로 뒤가 의열단과 조선 의용대의 영혼으로 불린 윤세주의 생가터이다. 이 위치를 보면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의열단 창립 단원이자 김원봉의 벗이었던 윤세주는 한 집 건너 이웃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 일대 구석구석에는 밀양 지역 독립 운동가들의 생가터가 있으며, 안내판은 없어도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는 장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의열기념탑 2019년 11월 10일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일에 윤세주 생가터 앞에 새로 세워졌다.
▲ 의열기념탑 2019년 11월 10일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일에 윤세주 생가터 앞에 새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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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마운 것은 지번 주소가 도로명 주소로 바뀔 때 이 일대의 도로명 주소에 이곳 출신 독립 운동가들의 호가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일대 거리에는 김원봉의 호를 딴 약산로, 윤세주의 호를 딴 석정로, 황상규의 호를 딴 백민로가 있다. 골목을 누빌 때 거리 이름에서 발견하는 이들의 호가 이들의 유적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고맙다. 유적지와 생가터는 사라져도 거리의 이름은 오랫동안 이들의 독립운동과 함께 살아 있을 것이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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