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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촌 김성수
 인촌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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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여러 지인들과 전북 고창의 인촌 김성수 생가를 찾았다. 올해도 보름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 세밑을 나름 뜻 깊게 보내자는 취지에서 떠난 여행길이었다. 새삼스럽지만, 2019년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기념비적인 해 아닌가.

개인적으로는 한 달여 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당시 생가 입구 안내판에 적힌 황당한 내용을 글로 썼고, 관할 기관인 고창군청 문화유산관광과에 항의 전화를 걸어 수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담당자의 "검토한 뒤 적절하게 조치하겠다"는 답변을 또렷이 기억한다. (관련기사: 친일파 생가가 '탄생지?'... 황당한 안내판)

우선, 가는 동안 지인들에게 스마트폰을 이용해 인촌 김성수와 그의 동생인 수당 김연수의 면면에 대해 사전 학습하도록 했다. 공신력 있는 백과사전 등 여러 자료들을 검색해 서로 비교해보도록 유도했다. 두 역사 인물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소도(昭道)는 뭐고, 취체역(取締役)이 무슨 말이지?"

자료에 언급된 낯선 용어들을 서로 묻고 답하면서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많아, 읽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불과 열 몇 줄로 소략한 자료부터 분야별로 세세하게 기록한 자료까지 비교하면서 그들의 행적을 퍼즐 맞추듯 조립해나갔다.

대부분 현대사에 문외한인 그들이 내린 결론 역시 두 형제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친일파라는 것이었다. 누가 더 '악질'인가 순서를 매길 수 있을 뿐, 일신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혐의는 결코 벗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국가가 내린 최종 결론 역시 동일하다.

아직도 당당하게 서 있는 안내판
 
인촌 김성수 생가의 안내판 정부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인정된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마치 애국지사인 양 서술되어 있다.
▲ 인촌 김성수 생가의 안내판 정부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인정된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마치 애국지사인 양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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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도착해보니 역시나 달라진 것 없었고, 안내판은 여전히 당당하게 서 있었다. 담당자가 그동안 '검토'를 했는지는 몰라도 '조치'는 하지 않은 셈이다. 만약 손대지 않은 것이 나름의 '조치'였다면, 안내판에 적힌 내용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될 것이다.

지인들은 관련 정보를 검색하면서, 이 안내판의 내용을 문제 삼는 뉴스와 블로그가 적지 않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문제를 삼았음에도 달라지지 않은 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동아일보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앙학원과 고려대학교의 창업주가 태어난 곳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언론 권력과 경제 권력, 교육 권력이 잉태된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럴진대, 이곳에다 친일의 행적을 거론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테다.

되레 호남 최고 명문가의 명당 터랍시고 '숟가락을 얹는 일'까지 횡행하고 있다. 이곳은 호남에서 드물게 당시 보수 정당 당적으로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운천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바른미래당 소속 20대 초선 국회의원으로 전북 전주가 지역구다.

인촌 김성수 생가의 아랫집 안채에는 그에 대한 소개 글과 함께, 태어난 방의 위치가 건물의 앞뒷면에 표시되어 있다. 그의 집안은 인촌 김성수의 외가로, 연일 정씨다. 아무튼 오래된 역사 인물도 아닌, 현직 국회의원에 대한 낯 뜨거운 찬사가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직위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의 삶으로 입증되는 것인데, 국회의원이니, 장관이니 하는 벼슬만 잔뜩 써놓아 안타깝네요. 아니꼬우면 출세하라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한 지인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사실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의 비루했던 친일의 삶은 해방 후 부통령과 전국경제인연합회 초대 회장이라는 화려한 벼슬을 방패삼아 감춰졌고 시나브로 잊혀졌다. 매명에 찌든 사회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조차도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김성수가 '위대한 정치가, 언론인, 교육자'로 추앙받고, 김연수가 '근대 공업화의 선구자요, 민족자본 육성의 수범자'로 호명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승리한 자는 진실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어록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가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장삼이사의 손으로 '역사를 바로 세워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안내판에 붉은 래커로 X표를 그어 항의의 뜻을 표시하자는 이들부터 고창군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는 주장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해결하려는 건 너무 나이브하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먼저 모두가 홈페이지에 접속해 민원 게시판에 항의글을 남기자며 뜻을 모았다. 우리의 요구를 집단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옳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이 정도 손가락품은 기꺼이 팔 수 있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며 다들 스마트폰을 켰다.

그런데, 군청의 민원 게시판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당장 아이핀이나 공인인증서를 요구했다. 휴대폰 인증의 경우, 이름은 물론, 성별과 생년월일, 전화번호 등 온갖 개인정보와 개인정보 수집과 활용에 대한 동의서를 제출해야만 접속이 가능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민원 요청 지인들은 돌아오는 길 고창군청 홈페이지에 접속해 안내판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 스마트폰을 이용한 민원 요청 지인들은 돌아오는 길 고창군청 홈페이지에 접속해 안내판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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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인터넷에 익명의 욕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나름의 대비책이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다만, 절차가 복잡하고 번거롭다보니 귀찮아 이내 포기하고 마는 것 같다. 뉴스나 블로그에서는 흔히 접할 수 있는 내용인데 정작 고창군청 홈페이지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내친 김에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도 건의해보기로 했다. 중앙정부기관이어서인지 접속하기가 더욱 까다로웠다. 한 지인은 문화재청 국민신문고에 들어가 몇 년째 여러 차례 항의를 했는데도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다면 직무 유기라는 내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민원이 접수된 만큼 조만간 고창군청과 문화재청의 공식적인 답변이 각자에게 도착할 것이다. 부디 '검토한 뒤 적절히 조치하겠다'는 식의 '영혼 없는' 대답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번에도 변화가 없다면, 대응의 수위를 높이게 될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질긴 놈이 이기는 법이다.

질긴 놈이 이기는 법

올 초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이라며 친일잔재 청산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가 발족된 2005년에 이어 반민특위가 재건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나무 아래에서 사과만 떨어지기를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다.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는다. 친일잔재 청산의 대의에 공감한다면, 자신이 발 딛고 선 그 자리에서 자기 깜냥대로 관심으로 갖고 노력해야 한다. 행동과 실천 없는 뒷담화만으로는, 그저 속은 후련할지 몰라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부디 고창군청과 담당 공무원에게 간곡히 요청한다. 명명백백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왜곡한 것이라 안내판의 내용을 검토하고 말고 할 게 없다. 고작 문구를 수정하는 일이라 예산을 걱정할 일도 없다. 의지만 있다면 지금 당장 달려가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다.

오는 28일에도 인촌 김성수 생가를 다시 찾아가 안내판을 살펴볼 계획이다. 그땐 청소년들과 함께 갈 것이다. 지난 주말에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사전 학습을 시킨 후 안내판에 적힌 내용의 어처구니없음을 아이들 스스로 깨닫게 할 생각이다.

용어와 맥락을 설명하자면 조금 더 많은 품이 들겠지만, 아이들에게 그때까지의 온갖 노력을 들려주며, 자발적인 참여를 독려할 것이다. 그러자면 그들도 어렴풋이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듯 사소한 것 하나를 바꿔내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나아가 그만큼 친일잔재 청산 작업이 힘들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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