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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지추(一葉知秋),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 것을 보고 일찍이 가을이 왔음을 알았다. 한 잎의 잎새로부터 시작된 가을이 만산홍엽(滿山紅葉)을 이루며 남으로 남으로 남하하여 급기야 남도 땅, 담양까지 내려왔다.

'설악'에서 시작된 가을이 '속리'와 '내장'을 관통하며 남으로 내려오기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의 일이다. 단풍의 속도는 시속 830m, 하루 약 20여 km로 남하한다고 한다. 봄꽃이 북상하는 속도와도 같다.

이는 묘하게도 사람이 하루 동안 걷을 수 있는 걸음의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란다.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대자연의 이치다.
 
 빽빽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난 노란 가을길이 자연스럽게 정원 안쪽으로 안내한다. 댓잎을 스치며 ‘소쇄 소쇄’ 하고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에 귀를 씻는다
 빽빽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난 노란 가을길이 자연스럽게 정원 안쪽으로 안내한다. 댓잎을 스치며 ‘소쇄 소쇄’ 하고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에 귀를 씻는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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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로 유명한 담양에는 일찍부터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연의 속도에 순응하며 살다 간 사람들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고산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지은 완도 보길도의 세연정(洗然亭)과 조선 광해군 시절에 성균관 진사를 지낸 석문 정영방이 조성한 경북 영양의 서석지(瑞石池)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별서정원(別墅庭園)의 한 곳으로 꼽히는 담양군 가사문학면에 자리하고 있는 소쇄원(瀟灑園)이 그곳이다.

대한민국 명승 제40호로 지정된 소쇄원은 조선 중기 창평에서 태어난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별서 정원이다. 별서(別墅)란, 오늘날 별장과 같은 개념이다.

양산보는 15살 때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한양으로 올라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성균관 유생들의 우상,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7살이 되던 1519년에 현량과에 합격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관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개혁의 아이콘이었던 스승 조광조가 훈구파들의 탄핵을 받아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양산보는 유배지까지 스승을 따라갔다. 정치적 이념에 따라 패거리를 지어 서로 죽고 죽이는 당쟁과 사화의 시기였다.

스승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 것을 목격한 양산보는 벼슬의 뜻을 완전히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스스로를 소쇄옹이라 불렀다. 소쇄는 '맑고 시원하다'는 뜻이다. 중국 남북조 때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서 차용해 왔다.

맑고 시원한 바람에 귀를 씻는다

소쇄원으로 들어선다. 빽빽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난 노란 가을길이 자연스럽게 정원 안쪽으로 안내한다. 댓잎을 스치며 '소쇄 소쇄' 하고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에 귀를 씻는다. 깊은 들숨으로 오염된 폐부까지 깨끗하게 씻어낸다.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봉대(待鳳臺)’는 소쇄원에서 첫 번째로 마주 하는 정자다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봉대(待鳳臺)’는 소쇄원에서 첫 번째로 마주 하는 정자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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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을 지나고 기와를 얹은 돌담길이 시작될 즈음에 초가지붕을 얹은 아담한 정자를 만난다.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봉대(待鳳臺)'는 소쇄원에서 첫 번째로 마주 하는 정자다. 주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이 둥지를 튼다는 오동나무를 심었다. 스승 조광조가 추구했던 왕도 정치를 이끌어 갈 어질고 현명한 임금이 나오기를 바랐던 소쇄원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건 아닐까.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중 제1영에 나오는 곳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최소한의 인공을 가미한 소쇄원에는 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고, 북쪽의 산 사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계곡을 이루며 정원의 중심을 흐른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담장 아닌 담장에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세 개의 명문이 있다.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고 쓰여 있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담장 아닌 담장에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세 개의 명문이 있다.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고 쓰여 있다. 애양단은 한겨울에도 볕이 잘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담장 아닌 담장에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세 개의 명문이 있다.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고 쓰여 있다. 애양단은 한겨울에도 볕이 잘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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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대 옆에 위치한 애양단은 한겨울에도 볕이 잘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근처에는 효의 상징인 동백나무를 심었다. 양산보의 효심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오곡문은 소쇄원의 내원과 외원을 연결해주는 곳으로, 외원에서 흘러 들어온 계류가 갈지(之) 자 모양으로 다섯 번을 휘돌아 나간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오곡문을 지나 외나무다리를 건너자 비로소 '양산보의 조촐한 집'이라는 뜻의 '소쇄처사양공지려'라는 문패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양산보의 생활공간인 제월당(霽月堂)과 사랑방 역할의 광풍각(光風閣)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소쇄처사 양산보의 생활공간인 제월당(霽月堂), 처마의 곡선이 유려하다
 소쇄처사 양산보의 생활공간인 제월당(霽月堂), 처마의 곡선이 유려하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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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월당 현판 우암 송시열이 썼다.'비 갠 날의 달과 같다'는 뜻이 담겨있다
 제월당 현판 우암 송시열이 썼다."비 갠 날의 달과 같다"는 뜻이 담겨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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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이름, 제월당과 광풍각은 남송시대 시인 황정견이 성리학의 아버지 주돈이를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 如光風霽月 :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가 밝은 바람과 비 갠 날의 달과 같다)'라고 평한 데서 유래했다.

가을빛이 완연한 제월당에 들어서면 16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시인 묵객들을 만날 수 있다. 한국 가사문학의 시조,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석천 임억령, 백호 임제, 송강 정철 등의 작품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그중에서도 하서 김인후를 빼놓고는 소쇄원의 풍경을 논할 수 없다.

호남 유학의 태두, 하서 김인후와 양산보의 관계는 특별했다. 조경에 일가견이 있던 김인후와 양산보는 일찍부터 교유했고, 김인후는 소쇄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소쇄원 48영>이라는 시로 남겼다. 나중에는 자식들을 서로 나누어 갖는 사돈이 되었다. 김인후의 딸과 양산보의 둘째 아들 양자징을 부부의 연으로 맺어 주었다.

제월당의 협문을 통해 내려오면 자연스럽게 '밝은 바람의 집' 광풍각으로 연결된다. 사철 머리맡에서 청량한 계곡 물소리가 들리는 광풍각은 독서와 사색 공간이자 손님들을 접대하는 교유의 공간이다.
   
옆에 있는 넓은 암반에는 나무와 화초를 심은 석가산(石假山)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제봉 고경명은 무등산 유람기 '유서석록'에서 광풍각을 '물 위에 떠있는 배와 같다'라고 했다. 원림의 중심인 광풍각 아래 계곡 사이를 대나무 다리가 아스라이 떠받치고 있다.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양산보는 소쇄원을 절대로 남에게 팔지도 말고 하나라도 훼손하지 말라고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겼으나, 아쉽게도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호남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일본과의 전쟁, 정유재란의 참화를 피해 가지 못했다. 이때 소쇄원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소쇄원의 2대 주인 양자징의 아들과 딸은 왜군들에게 학살 당했다.

소쇄원을 파괴했던 일본의 오사카에서 열린 1992년 세계정원박람회에서 소쇄원은 대상을 받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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