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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으로 기억되는 어느날, 나는 공항에서 탑승 예정 비행기를 놓치고 나서 보딩패스를 반납하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가운데 공항에서 이런 역방향 절차를 경험한 분은 거의 없으리라 믿는다.

절차는 이렇다. 일단,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보딩패스를 반납하기 위한 설명을 듣는다. 첫째, 공항 출국장 내 면세점에서 산 물품을 환불한다. 둘째, 여권검사를 받고 여권에 출국을 취소하는 도장을 받은 다음, 셋째, 출국장 밖으로 퇴출된다. 마지막으로 공항에 마련된 항공사 사무실에 가서 소정의 수수료를 제외한 티켓 값을 환불받는다.

사정은 이랬다. 전과 다름없이 공항의 발권데스크에서 짐을 부치고 보딩패스를 받고 난 후, 남은 시간을 때울 목적으로 책을 꺼내 펼쳐 들었다. 탑승시간까지 1시간여 정도 여유가 있던 것으로 착각한 나는 탑승시간에 임박해서 수속을 시작할 요량으로 읽던 책에 몰입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구에 도착하니 승무원들이 나를 알아보고 혀를 끌끌거리고 있었다. 비행기는 30분 이상 출발이 지연되었다고 했다. 나 때문에. 입국절차를 마치고 출국장에만 있었더라도 항공사 직원들이 나를 찾아 냈을 텐데.
  
김영하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저자가 아무 생각없이 비자를 생략한 채 중국으로 갔다가 현지공항에서 바로 추방되어 돌아오게 된 사연을 읽으면서 생각난 에피소드다. 입국검사장의 중국관원들이 추방당하는 김영하의 한심한 처지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을 것이 분명하다.

여행은 남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
 
 <여행의 이유> 표지
 <여행의 이유>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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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검정고시 야학교사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검정고시는 봄, 가을 두 번의 응시기회가 주어진다. 대부분 공장에서 일하던 당시의 학생들이 검정고시 응시를 위한 접수를 하려면 졸업증명서가 필요하다.

야학생들을 대신해 이 서류를 떼기 위해 그들이 졸업한 학교를 일일이 돌아다닌 경험이 있다. 그때 갔던 곳이 충북의 청풍, 경주의 건천, 전남 광주의 작은 마을, 변산의 해변가 등등, 기차와 버스를 타고 또는 하염없이 걷기도 하면서 초중학교를 돌아다녔다.

대부분 농촌이나 어촌이었던 학교의 행정과나 교무실에서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던 분들의 환한 미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봉사라고 생각하며 한 일이지만, 내가 그들로부터 '자기 공부도 바쁜 대학생이 좋은 일 한다'는 의미의 생전 들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칭찬을 들었다. 그때 이유는 모르지만 한없이 부끄러웠더랬다.

소도시나 시골의 학교 투어를 통해서 나는 이런 시골에서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아 서울로 올라온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을 생각했고, 당연히 나의 삶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시골 학교분들의 칭찬에 부끄러웠던 이유는 결국, 나라는 존재가 그런 칭찬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김영하는 책의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이라는 챕터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한 말을 소개하고 있다.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p.97)는 말이다.

전혀 여행인 줄 몰르고 혼자서 터덜터덜 지방의 곳곳에 숨어있던 학교들을 찾아 헤매던 내가 저자의 말에 격하게 공감한 것은 그 여행을 통해 남을 이해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이외의 사람들과 교감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은 아닐까.

여행은 내면의 나와 만나는 일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무역업체에서 해외출장이 잦았다. 많은 나라의 지역을 돌아다니게 됐는데, 사실은 다니면서 한 번도 출장이 여행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대부분 업무적인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일정과 경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여행은 가고 싶어서 가는 것 아닌가?

또한 현지의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일을 보기 때문에 서울, 도쿄, 자카르타, 방콕, 상하이, 밴쿠버, LA, 런던, 이스탄불 등의 메트로폴리탄 도시들의 사무실과 공장은 국제규격에 맞게 구비된 탓인지 거기가 거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스위스 제노바의 호수, 오스트리아 빈이나 이탈리아 로마의 유명한 건축물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네덜란드의 고흐미술관 같은 곳들이 주는 이국적이고 고색창연하며, 창의적인 영감을 받게 되는 경험을 할 때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여행의 이유>를 읽다보니 출장도 여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홀로 출장을 가면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평소보다 많게 된다. 책을 읽게 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며,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떤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할 때도 있다. 그리고,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것일까, 나와 관계된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등등 얘기치 않은 생각들에 빠지는 경험도 하게 된다.

출장 또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현실의 나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저자는 그 상황을 전쟁터에서 귀향한 오디세우스에 감정이입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페넬로페의 침대에 누운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p132). 

시오노나나미가 유럽을 디자인했다고 격찬해 마지않은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은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한다. 평생을 갈리아 정복을 위해 늘 여행(출장 또는 출정) 중이었던 카이사르의 깨달음이라고 본다면, 여행은 평소에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경이로움을 보장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10여 년 전의 그날 출국장을 거슬러서 밖으로 퇴출된, 다시 말하자면, 너무 빨리 재입국한 나는 2시간여 만에 같은 목적지로 출발하는 루프트한자의 왕복 티켓을 사서 부랴부랴 출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 게이트 앞으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갔다.

탑승 후 배정받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메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쉰 나는, 만족스런 미소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그 비행이 출장이라는 업무를 위한 행위라는 사실을 잊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출발이라고 믿으면서.

덧붙이는 글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금, 문학동네, 2019년 4월


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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