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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같이 길을 가다 보면, 한 번씩 내 옆구리를 쿡 찔러 길 가던 사람을 쳐다보라 한다. 그러곤 "저 사람 머리 가발이여"라며, 당신 눈은 못 속인다며 킥킥거리곤 하신다. 

52년생인 어머니는 젊은 시절 서울 구로공단에 있던 가발공장에 다녔다. 스물 갓 지나 고향 청양을 떠나온 어머니가 짐을 푼 곳은 서울통상이라는 가발 공장. 서통이라 불렸던 이 업체는 이후 '썬파워', '벡셀'이라는 건전지를 만들기도 했던 당시로는 꽤 규모 있는 곳이었다. 

가발제조업은 지금은 미얀마,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개도국 주력 산업으로 옮겨갔지만, 80년대 전자산업이 경공업의 주력으로 자리 잡기까진 우리나라의 대표 수출산업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가발공장에 팔았고, 그 머리카락을 염색, 탈색해 다시 누군가의 모발로 엮은 건 또 다른 젊은 여자들... 대부분 20대 여공들이었다. 

수출 이끌던 여성들, 하루 아침에 일자리 잃기도...
 
 <'여공', 기억에서 역사로> 심포지움에 전시된 70년대 여공들이 투쟁하던 모습을 찍은 사진
 <"여공", 기억에서 역사로> 심포지움에 전시된 70년대 여공들이 투쟁하던 모습을 찍은 사진
ⓒ 한국여성노동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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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술이 좋았던 어머니는 입사하고 얼마 안 돼 공장에서 언니로 불리는 책임자가 됐다. 인모와 인조모를 그램 수에 맞춰놓으면 여공들은 제게 한 줌씩 맡겨진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고 하루 꼬박 12시간을 가발 뜨는 데 썼다.

야간 잔업은 무시로 있었고 주말 특근도 예사여서 기숙사 생활은 고향 떠나 갈 곳 없던 이들을 묶어두기엔 딱 좋았다. 사장은 일요일, 회사 밖 교회 다녀오는 시간도 아까워했다. 차라리 회사에서 다 같이 예배드려도 좋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따라붙을 정도였다. 같이 먹고 자고 일하는 언니 동생들은 밤낮, 주중 주말을 그렇게 한 지붕 자매가 되어 함께 지냈다. 

가발 짜는 손이 쉬지 않은 덕분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 경제사에는 기록들이 새겨졌다. 가발 수출 1억 달러 기록에 힘입어 가발 수출 세계 1위 국가로 올라섰다. 주로 미국에 수출됐던 가발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두상에는 맞지도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가 벌어들인 전체 외화의 10%는 제 머리엔 한번 써볼 일도 없는 남의 멋내기 가발을 짜는 여공들의 손이 만들어냈다. 남자 직원은 몇몇 관리직과 운송을 맡았던 기사뿐이었다. 
  
70년대 가발공장은 구로공단뿐 아니라 서울 곳곳으로 확장되다 산업이 동남아로 옮겨갈 즈음 후반 들어서면서 하나씩 무너졌다. 김경숙 열사는 당시 그 중 한 곳이었던 YH무역 주식회사의 여사원 중 한명이었다. 라면땅 하나 2원 하던 시절, 한 달이 지나면 적어도 4~5만 원의 임금을 벌던 기술직 사원이었다. 그 돈으로 제 스스로의 생계를 챙기는 한편, 고향의 동생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절이나 남의 돈 벌기가 어디 호락호락한가. 가발수출업과 YH무역 주식회사의 호시절이 함께 저물 즈음, 회사는 무리하게 기업을 확장하고 회사자금을 유용하기도 했다. 사원들의 임금은 종종 밀렸고 강제 휴가가 주어졌다. 회사는 벌어들인 외화의 상당액을 도피시킨 후, 갑작스러운 폐업을 선언한다.

내일의 일자리를 잃은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은 회사의 정상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했다.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이어졌고 사원이면서 당시 노조 조직부차장이었던 김경숙은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9년의 일이다. 당시 김경숙 열사의 나이는 22살이었다.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할 사건
 
 올해는 김경숙 열사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에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지난 10월 30일,  <'여공', 기억에서 역사로> 심포지움을 열어 한국사회의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여성노동자들의 빛난 투쟁을 재조명 하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는 김경숙 열사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에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지난 10월 30일, <"여공", 기억에서 역사로> 심포지움을 열어 한국사회의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여성노동자들의 빛난 투쟁을 재조명 하는 시간을 가졌다.
ⓒ 한국여성노동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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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수요일, 김경숙 열사 40주기를 맞아 지난 역사를 재조명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김경숙 열사를 비롯한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오늘날을 이끈 역사로 조명하지만, 당시로선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일이었다.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살아갈 기반을 하루아침에 잃은 이의 정당한 요구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어제의 일자리는 오늘이라는 미래를 여는 문이었으니 그 문이 닫힌 정당한 이유를 물어야했다. 가발을 뜨는 것도 살아가는 일, 닫힌 문을 두드리는 일도 살기 위한 일, 노동자는 그렇게 제 노동의 길을 여는 것 외에는 다른 줄이 없다.

하지만, 당시 유신체제의 억압적 방식은 노동자들과 민주주의를 누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저항하며 팽창하는 공기를 힘으로만 누르면 언젠가는 터지고 만다. YH무역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이 이후 부마항쟁, 10.26 사태로 이어지며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는 도화선이 된 것처럼 말이다.   

이만큼의 이야기로도 우리나라 경제사, 한국 민주주의사, 노동운동사에는 여러 페이지가 장식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자립해 서 있던'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목소리를 내고 투쟁한 역사로서도, 지금으로선 빈약하다 평가되는 여성 중심의 노동운동사에 대한 접근면에서도, 다양한 수사를 붙일 만하다. 

어떤 식으로든 지나온 역사는 이야기 되어야 한다. 그것이 현재를 살고 가능한 더 나은 내일을 여는 길이다. 이전엔 없던 역사였으므로, 그것이 곧 역사의 시작이 될지도 몰랐을 YH무역의 노동자들은 그렇게 내일을 열었고 40년이 흘렀다.

물론, 오늘이 '가능한 더 나은' 내일인지는 여전히 토론 거리다. 동시에, 누군가는 탁상에서 그 의미를 쓰고 있겠고, 또 어느 22살, 어느 32살, 어느 42살의 세상의 김경숙들은 씨름하고 있을 현장의 지점일지도 모른다. 어떤 방식으로는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래야 여공들의 가발공장도, 어머니의 70년대도 나의 역사, 너와 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은희 님은 자유기고가이자, 한국여성노동자회 자원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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