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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기술이 마치 한 자궁에 잉태된 쌍둥이들처럼 같은 울타리에 들어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현재 기술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e)'는 로마인들이 이 말을 이어받으면서 현재 예술이라는 뜻의 '아르스(Ars)'로 변화되었다.

'테크네'와 '아르스'는 공히 매우 광범위한 범위의 예술 행위와 기술 행위를 포괄했는데, 예를 들자면 시 짓기와 같은, 지금 시각에서는 명백히 예술 행위에 들어가는 것부터 우리가 '공예(Craft)'라고 부르는 목공, 도자기 굽기와 같은 것들까지 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 쌍둥이들이 서로 분리된 것은 17세기 근대과학이 태동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과학은 '테크네'와의 철저한 차별화를 통해 중세풍의 마술적 '의사 과학(Psedoscience)'으로부터 해방되려고 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해방이 '교양'으로서의 과학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곧, 과학은 기술과는 뚜렷한 경계를 지으면서도 (당시에는 필수교양으로 여겨졌던) 문예, 미술, 음악과 같은 예술의 범주에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결국 예술과 기술, 그리고 과학이 결코 먼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서로 간에 구별짓기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당시 상황마다 달랐겠지만, 그 말은 거꾸로 보자면 구별짓기를 해야 할 만큼 유사한 점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펄스나인의 AI화가 '이메진AI'와 두민 작가가 독도를 주제로 협업하여 그린 작품. 제목은 '교감하다'라는 뜻의 'Commune with...'. 채색화가 본 작품이며, 그 전에 드로잉화가 펜으로 그려졌다.
 펄스나인의 AI화가 "이메진AI"와 두민 작가가 독도를 주제로 협업하여 그린 작품. 제목은 "교감하다"라는 뜻의 "Commune with...". 채색화가 본 작품이며, 그 전에 드로잉화가 펜으로 그려졌다.
ⓒ 펄스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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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역사는 흐르고 흘러 예술과 기술, 그리고 과학이 한 몸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가 오고 있다.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아트', 그 단어만 들어도 '아니 이제 예술까지?' 하고 몸서리를 치며 인간의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와이 낫(Why not)?'이라고 어깨를 으쓱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얼마 전 보았던 영국 드라마 <휴먼즈(Humans)>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냉장고나 TV를 구입하듯이 특별한 고민 없이 대형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가사노동 로봇. 그러나 드라마에서 결국 이 로봇은 침대 머리에서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는 엄마나 아픈 아내를 돌봐주는 남편의 '용도'를 폐기처분하게 만든다. 

하루 종일 일하고 와서 피곤한 엄마보다 24시간 365일 변함없이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는 로봇이, 또한 짜증 한 마디 없이, 게다가 자신의 아픈 부위를 정확하게 진단하여 돌보아주는 로봇이 훨씬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리는 가족 구성원의 반응은 그야말로 인지상정이었다.

예술인 복지를 고민하는 필자로서는 AI가 예술인을 대체하는 상황도 염려하게 된다. (아마 대다수의 예술인들이 동일한 생각을 할 터이다.) 가뜩이나 예술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해 예술 시장은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공적 자금에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작금의 한국 상황에 AI까지 나서서 예술인들의 설 자리를 넘본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하는 아우성이 벌써 들리는 듯도 하다.

그러나 예술과 기술, 그리고 과학이 서로 구별 짓기를 하던 시절이나 한 태에 태동하고 있던 시절이나 이 세 가지 요소가 결코 완벽한 편가름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AI 아트'는 예술인 혹은 인류를 침공하기 위해 지구에 착륙한 외계인으로 마냥 밀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한 AI아트 작가의 말에 따르면, AI는 "미술사에서의 사진기의 등장"과도 같다. 사물을 똑같이 찍어 현상할 수 있는 사진기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그리는 그림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라 염려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사진과 그림의 영역이 엄연히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AI는 보다 정교화된 미술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기술적 진보와 차별화되는 AI의 '딥 러닝(Deep Learning: 심층 학습)' 능력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자극할 것이라고 본다. 
 
 펄스나인의 AI화가 '이메진AI'와 두민 작가가 독도를 주제로 협업하여 그린 작품. 제목은 '교감하다'라는 뜻의 'Commune with...'. 채색화가 본 작품이며, 그 전에 드로잉화가 펜으로 그려졌다.
 펄스나인의 AI화가 "이메진AI"와 두민 작가가 독도를 주제로 협업하여 그린 작품. 제목은 "교감하다"라는 뜻의 "Commune with...". 채색화가 본 작품이며, 그 전에 드로잉화가 펜으로 그려졌다.
ⓒ 펄스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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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빠른 이해를 위해 이메진 AI와 작가 두민의 협업 작품 하나를 소개해본다. 위쪽은 작가가, 아래쪽은 AI가 작업한 것이고, 위·아래가 교차하는 경계 지역은 작가가 마무리했다. 데칼코마니 형식으로 작업을 한 이유는 작가가 '환상의 경계(The boundary of fantasy)'라는 주제로 AI와의 협업을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작가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첫째, 작가는 AI와의 협업을 통해 무엇을 획득했는가? 아래·위 두 번 그렸어야 할 그림의 한 부분을 AI가 그려줌으로써 작업 과정의 효율성을 얻었다는 것인가? 둘째, AI라는 기계가 만들어낸 정교함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감동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예술 작품에서 다양한 종류의 감동을 얻게 되는데, 위쪽의 작가 드로잉이 그 정교함과, 그 정교함으로 인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작업 과정의 지난함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감동을 준다면 AI가 해낸 성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렇듯 'AI 아트'는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거리를 던지게 만든다. 그 답은 당연히 당장 제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AI 아트'가 이 시대에 이미 탄생했고, 우리는 이 'AI 아트'를 보면서 다시금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될 것이며, 어쩌면 그 질문의 과정 자체가 'AI 아트'의 중요한 역할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술은 정리되지 않고 결론나지 않으며, 그리하여 전복적이고 미궁인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주임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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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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