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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오랜만의 모임에 네 살 난 아들을 데려왔다. 남편과의 시간 조율이 잘 되지 않은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그녀는 미안해했지만,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는 아이는 우리의 시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겐 '안구 정화'였달까.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친구가 집에 가기 전 마트에 들러야 한다기에 따라나섰는데, 천사같던 아이가 떼를 쓰기 시작하더니 바닥에 드러누워 버린 것이다. 우렁찬 통곡 소리는 덤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친구는 상황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고, 나는 뭐라도 돕고 싶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중에 듣기로,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했다.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친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속상해했다. 듣다가 나마저 눈물이 핑 돌았는데, 아이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탓하며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숱한 육아서와 육아 선배들의 말을 듣고 이런저런 시도들을 해봤지만 어떤 것도 효과는 없었다는 그녀. 이제 자신이 뭔가 잘못했을 거라고 확신하며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심지어 아무래도 자신이 엄마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며 자학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그녀가 얼마나 좋은 엄마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므로 결코 그렇지 않다고, 너는 충분히 근사한 엄마라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책,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을 진작 읽었다면 보다 힘주어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결코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고. 아니, 어쩌면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는지도 모른다고.

 
 <양육가설> 책표지
 <양육가설> 책표지
ⓒ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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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퍼져 있는 믿음이 있다. 부모의 양육이 아이의 행동을 결정하고, 나아가 아이의 인생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것이 책이 명명하는 '양육가설'이다. 저자는 딱 잘라 말한다. 양육가설은 검증조차 되지 않은 허무맹랑한 헛소리라고. 
 
"부모의 양육은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사회화되지 않는다.
양육가설은 신화이며 이를 뒷받침하던 대부분의 연구는 가치가 없다."(p12)

저자는 양육가설이 제대로 증명된 바 없음을 합리적으로 논증한다. 양육에 관한 연구는 그 특성상 변인을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심지어 제대로 통제할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한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그녀의 주장을 내가 이해한 대로 설명하면 이렇다. 한 아이에게 (일반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수준의) 체벌을 가하고, 한 아이에게는 어떤 체벌도 가하지 않는다고 치자. 만일 체벌을 받지 않은 아이가 문제없이 성장하고 그 반대는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이 다름이 체벌에 의한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성장에는 무수한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물론 그 결과가 유전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애초에 체벌 유무는 부모가 아닌 아이의 다름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저자는 부모에서 자녀에게로 향하는 효과도 있지만, 자녀에게서 부모로 향하는 효과도 있음을 지적한다.  

아이에 대한 판단의 기준 또한 중요하다. 집에서 착한 아이가 밖에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라면서 여러 개의 역할을 갖고, 그에 맞게 각각 다르게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아이를 누가, 언제, 어디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듯 양육가설이 제대로 증명조차 되지 않았음을 합리적으로 논박한다. 이 주장이 제기된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양육가설은 지배적이고, 그녀는 소수의 입장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양육가설을 비판한 그녀의 논문은 학계의 권위있는 상을 받았으며 매우 진지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양육가설은 많은 어머니들을 괴롭힌다. 아이가 아파도, 겁이 많아도, 우울해도 어머니의 책임으로 몰린다. 뿐인가. 저자는 프로이트 이후, 어머니는 행동뿐 아니라 무의식적 감정과 동기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음을 꼬집는다. 양육가설은 어머니에게 너무도 많은 고통을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양육가설을 대체하는 '집단사회화 이론'을 주장한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의 사회적 범주를 파악하고 그 구성원의 행동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그 범주란 나이, 성별, 인종 등과 같이 구획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아이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거나 설사 그 집단으로부터 배척된다고 해도, 그 범주를 기준으로 사회화된다는 것이다. 이민 가정의 아이가 부모의 모국어를 잊고 새로운 언어를 자신의 모국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단적인 예다. 저자는 아이들이 부모가 아닌, 자신이 속한 집단의 언어와 문화를 학습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들의 행동 양식이 형성되고, 타고난 특성이 수정되고, 결국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지가 결정되는 곳은 바로 또래 아이들과 공유하는 세계다." (p294)

저자 역시 양육자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정한다. 단,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학습한 그것들이 성인이 된 후의 관계와 규범 준수 방식, 나아가 삶 전체를 규정짓는 것은 아님을 주장하는 것이다. 부모의 행동은 부모와 함께 있을 때, 혹은 부모와 연관된 맥락 속에 있을 때만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다시 말해, 부모의 양육이 집안에서 아이를 나쁘게 만들 수 있고 부모와 자녀 관계를 악화시킬 수는 있지만, 이것이 집밖에서의 아이의 행동이나 전체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도한 스트레스와 책임감을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것.

저자는 부모가 양육을 즐길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양육을 즐기고 있지 않다면, 어쩌면 지나치게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단, 이것이 결코 부모가 아이를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저자는 인간을 함부로 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며 무엇보다 자녀의 현재를 쥐고 있는 것은 부모임을 분명히 한다.

이책으로 양육가설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폐기시킬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논증이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이뤄졌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비단 양육가설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대할 때 갖춰야 할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내게도 양육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느 정도는 뿌리 박혀 있음을 깨달았다. 걸핏하면 부모와 자녀의 같고 다름을 연결시켜 생각해보지 않았던가. 닮거나 닮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라면, 사실 큰 의미는 두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양육가설과 집단사회화 이론, 둘 중 무엇이 맞는지 장담할 능력은 내게 없다. 심리학자도, 육아전문가도 아니니, 둘 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 않을까 하며 무책임한 답을 내릴 수밖에. 내가 아는 확실한 것은 하나 뿐이다. 나의 벗들이 너무도 근사한 엄마라는 것. 그러니 부디, 자학만은 않길 바란다.
 
"자녀는 당신이 완성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것이다." (p496)​

양육가설 - 부모가 자녀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

주디스 리치 해리스 (지은이), 최수근 (옮긴이), 황상민 (감수), 이김(2017)


태그:#양육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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