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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한국입양인봉사회(InKAS)는 1999년 설립되어 해외입양인을 돕는 단체다. 8월 15일, 서울 평창동에서 만난 인카스 정애리 회장은 유쾌하고 솔직했다.

"이제는 우리도 해외에서 입양을 해오는 나라가 되어야 해요. 국제적 책임을 나눠가져야 하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니까요. 이건 아주 현실적인 얘기입니다. 우리나라엔 국제 결혼한 동남아인 어머니를 따라 들어온 '중도입국자녀'들이 많이 있어요. 이런 경우 한국인 아버지가 입양을 하거나, 동거 비자를 받아 18세까지 한국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미 해외 입양은 미국이나 유럽의 이야기만은 아닌 거지요. 이왕 국제적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난민이나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입양을 한다면 훨씬 융화도 잘되겠지요? 그러다보면 입양가족이나 다문화가족에 대한 편견도 희석될 거고요."
 

지금도 1만 명이 넘는 아동이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는 한국의 현실('아동복지시설현황' 2018년 보건복지부 발표)을 감안하면 선뜻 공감되지 않는 의견이었다. 그에게서 들은 새로운 견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그의 통찰은 현실과 상식을 뛰어넘어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6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 회장의 생각에는 톡톡 튀는 참신함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결코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시설아동들과 입양을 둘러싼 우리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경험으로부터 나온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공생원'집 딸로 태어나
 
윤학자 할머니, '공생원' 원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정애리 회장은 목포에 있는 고아원 ‘공생원’에서 나고 자랐다. 그에게는 부모와 함께 하는 단란한 유년기의 추억이 없다. 전후의 한국은 고아들이 넘쳐났고, 그는 어릴 때 500명에 달하는 원아들 속에 섞여 자랐다.(앞줄, 오른쪽에서 일곱번째가 정애리 회장, 당시 4세)
▲ 윤학자 할머니, "공생원" 원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정애리 회장은 목포에 있는 고아원 ‘공생원’에서 나고 자랐다. 그에게는 부모와 함께 하는 단란한 유년기의 추억이 없다. 전후의 한국은 고아들이 넘쳐났고, 그는 어릴 때 500명에 달하는 원아들 속에 섞여 자랐다.(앞줄, 오른쪽에서 일곱번째가 정애리 회장, 당시 4세)
ⓒ InK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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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애리 회장은 목포에 있는 보육원 '공생원'에서 나고 자랐다. 그에게는 부모와 함께 하는 단란한 유년기의 추억이 없다. 전후의 한국은 고아들이 넘쳐났고, 그는 어릴 때 500명에 달하는 원아들 속에 섞여 자랐다. 함께 학교를 다녔고, 함께 어울려 놀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어떤 아이도 어린 정애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원장집 딸에게 시비를 건 아이를 혼내주겠다고 몰려드는 원아들의 숫자만 봐도 기가 질릴 정도였으니까.

1928년 정 회장의 외조부인 윤치호 전도사가 다리 밑에서 추위에 떨고 있던 고아 7명을 데려다 함께 생활한 것이 '공생원'의 출발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거지와 고아가 너무 많았기에 원아의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그러던 중 윤치호 전도사는 자원봉사를 하러 온 일본인 음악교사 마우치 치즈코(한국이름 윤학자)와 결혼을 했다.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인과의 결혼을, 윤치호의 집안이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주위의 반대를 딛고 국적과 민족을 뛰어넘는 기독교 신앙 속에서 결합했다. 외할머니 윤학자는 조국 일본의 만행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국의 고아를 진심으로 돌봤다.

해방되자 그들 부부는 친일파로 몰렸다. 몰려든 한국인들이 외조부모를 단죄하려 했을 때, 공생원 원아들은 인간띠를 만들어 윤학자를 보호했다. 그렇게 윤학자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 그 후 1951년 원아들을 먹일 식량을 구하러 나갔던 외조부가 실종됐다. 홀로 남은 윤학자는 전쟁통에 아이들을 두고 도망갈 수 없다며 끝까지 공생원을 지켰다.

외조부모의 신앙과 봉사의 삶은 정애리 회장 일가 구성원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동생 정애라는 현재 공생원 7대 원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린 정애리는 달랐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그렇게 고생하고 엄마 아버지도 하나님과 원아들을 위해서만 살았는데, 나까지 그렇게 사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아?'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외조부와 부모님의 뜻을 왜곡하는 사람들을 어려서부터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또 500명이나 되는 원아들 사이에서 부대낀 경험도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역시 '공생원' 집 딸답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은 깊고 강했다. 사람을 믿지 않는 대신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의논했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절실했던지 기도 때문에 병이 낫는 경험도 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다. 4살 때부터 미대에 가겠다는 꿈이 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목사님이 정 회장을 위한 기도를 해주었는데, 그때 "너는 미술을 하면 안 된다. 너의 일은 따로 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하지 않고 다른 길로 가면 다리를 쓰지 못할 것이다"라 했다.

기도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그는 "다시는 저 목사님 집에 오시지 못하게 해요"라며 화를 냈지만, 고3 첫날 정말로 다리에 심한 통증과 함께 마비가 왔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미대를 못 가고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다.

교수님들의 권유로 대학원까지 진학한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한남동에 있는 여성직업훈련원 기숙사 사감을 했다. 당시 직업훈련원은 주로 보육원 등 시설을 나온 젊은이들이 들어와 취업하기 위해 기술을 배우는 곳이었다. '공생원'집 딸은 그들과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적임자였다.

1985년에는 우연한 계기로 홀트아동복지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생이었던 그가 흥미를 가진 분야는 청소년 사역이었는데, 홀트에서는 그와 상관없이 주로 미혼모 상담을 했다. 그런데 미혼모들을 만나다 보니, 그들은 주로 그가 어릴 때 함께 자랐던 보육원 출신들이었고, 직업훈련원에서 만난 시설퇴소인들이었다. 뜻하지 않게 이번에도 정 회장은 그 일에 적격자였다.

그리고 4년 후 출산을 하면서 홀트아동복지회를 그만두었다. 그때부터는 어려서 원했던 대로 철저히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았다. 정 회장은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열성 엄마'였다. 교육열에 불타는 의욕적인 젊은 엄마답게 자녀들을 국제학교에 보냈다. 한국에서만 돋보이는 인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인물로 키우고 싶어서였다.

수시로 아이들 손을 잡고 해외로 나갔다. 더 좋은 경험과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잊은 것처럼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 '공생원'에서 태어나서 자라며 누려보지 못한 평범한 삶과, 개인적 욕망을 추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
  
청천벽력 같은 레마의 말씀

 
'레마의 말씀'에 저항했던 정애리 회장 1996년 어느날 새벽기도를 하는데, ‘레마의 말씀’이 들려왔다. ‘레마의 말씀’은 신앙이 깊은 기독교인들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다.“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그렇게 고생하고 엄마 아버지도 하나님과 원아들을 위해서만 살았는데, 나까지 그렇게 사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아?” 정 회장은 이 말씀에 저항했다.
▲ "레마의 말씀"에 저항했던 정애리 회장 1996년 어느날 새벽기도를 하는데, ‘레마의 말씀’이 들려왔다. ‘레마의 말씀’은 신앙이 깊은 기독교인들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다.“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그렇게 고생하고 엄마 아버지도 하나님과 원아들을 위해서만 살았는데, 나까지 그렇게 사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아?” 정 회장은 이 말씀에 저항했다.
ⓒ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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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면서도 그는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수시로 하는 믿음이 좋은 집사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갖고 있었던 사람보다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버릇 때문이었다. 그러던 1996년 어느날 새벽기도를 하는데, '레마의 말씀'이 들려왔다.

'레마의 말씀'은 신앙이 깊은 기독교인들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에게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과거에도 자주 그런 경험을 했기에 그렇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주 구체적인 문장으로 길게 들려왔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정애리 회장은 그 말씀을 그대로 외우고 있다.

"모세를 봐라. 바로 공주에게 입양되었지만 민족을 살리지 않았느냐? 에스더를 봐라. 모르드게 삼촌 밑에서 자랐지만, 그가 민족을 살린 것과 같이, 요셉을 봐라. 형들에 의해 팔려갔지만 그가 민족을 살린 것 같이, 내가 뜻이 있고 섭리가 있어서 입양인들을 세계에 흩은 것이다. 그들을 찾아서 그들의 상처된 마음을 치유하고 그곳에 복음을 넣어서 세계 복음화하기를 원한다."

이날부터 이 말씀에 대한 정 회장의 '2년간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두 남매의 엄마로, 주부로 나와 내 가족만 편안하고 행복하면 된다고 믿으며, 세상 때를 묻혀가며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게 목표였던 그에게 그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하나님, 왜 저인가요? 세계복음화라면 목사님들 시키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미 그의 가슴 속 깊이 들어와 버린 하나님의 영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굉장히 암시적인 꿈들도 계속 꿨다. 결국 어느날 항복하고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말씀을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한 발짝도 뗄 수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 할 때 환각이고 환청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답이 들렸다. "이사야 61장"

이사야 61장을 찾아 읽은 정 회장은 펑펑 울었다. 그 속에 그의 고민과 방법이 다 있었고, 실천의 이유도 들어있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장 1~3절)

그렇게 1999년 1월, 정애리 회장의 실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한 달 간 국회도서관과 대학도서관을 다 뒤져서 해외 입양에 대한 모든 논문, 신문을 다 복사해왔다. 그리고 자녀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간 사이 밤새 읽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공했던 사회복지학 지식도 도움이 됐다. 2월이 되자 논문 저자와 기자들을 찾아가서 직접 만났다. 그러면서 몇 개의 NGO 단체들이 해외입양인 관련 활동을 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1950년대부터 계속된 해외입양으로 세계에 흩어져 있던 한국계 입양인들에게 한국은 미지의 나라였다. 그러나 88올림픽을 계기로 그런 한국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과 분단, 독재 등으로 위험 국가로 여겨졌던 한국이 '가 볼 수 있는 안전한 나라'로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해외입양인들이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초기 방문은 충동적이었다. 입양부모와 사이가 좋으면 입양부모가 속상해 할까봐, 혹은 입양부모에게 생각 없이 얘기했다가 거절당해서, 이미 사춘기를 지나며 갈등이 깊은 경우 등등의 이유로, 입양부모와 상의도 없이 재대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한국을 찾아왔다. 그렇게 왔으니 묵을 곳도 구하기 힘들었고, 낳은 부모를 찾을 길도 막막했다. 그런 그들을 경실련, 구세군 등 여러 NGO단체에서 나서서 도왔지만, 정 회장이 찾아갔던 무렵에는 다들 손을 놓고 있었다.

그들 단체들은 국제적 네트워킹에 대한 기대감 등으로 처음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도움만을 계속 줘야하는 이 일에 지쳐버렸다. 해외입양인들은 도움을 당연시할 뿐 고마워하거나 호응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정애리 회장은 이 일에 적임자였다. '공생원'집 딸로 성장하며 그는 도움 받는 사람들이 고마워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들을 이해했기에 피드백에 대한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1999년, 14개국 22만 명의 해외입양인과 200만 명의 해외입양가족 그리고 그들의 친생가족들의 복지와 권익을 위해 일하는 인카스가 설립되었다.

사회복지 사업에 100% 정답은 없다

인카스는 해외입양인들의 사후관리를 돕는다. 초기에는 특히 낳은 부모를 찾아주는 일을 많이 했다. 해외입양인들의 경우 백인들 사이에서 동양인으로 자라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때문에 '뿌리찾기'가 중요하다. 정회장이 얘기해준 몇 가지 사례는 그런 혼란을 잘 보여준다.

그는 아틀란타에서 어떤 입양부모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 아이가 서너살 되니까 자신의 생김새가 부모와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루는 아이가 유치원에 갔다 와서 "너희들, 우리 엄마 아빠 아니지? 우리 엄마 아빠 어디 있어?"라고 물었다. 그래서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와 입양 사실을 얘기해 주었다. 그 뒤로 아이는 일주일 동안 밥만 먹으면, 현관 앞에 가서 쪼그리고 앉아 낳은 부모를 기다렸다. 일주일 후에는 포기했는지 그만두었지만, 입양부모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해외입양인들은 사춘기가 되면서 더 복잡한 혼란을 겪는다. 정 회장이 또다른 입양부모에게서 들었다는 사례는 그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사춘기가 되어 반항하는 아이에게 입양부모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그렇게 힘들게 하느냐? 너를 입양한 게 잘 못이냐?'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아이가 '그럼, 잘못이지'라고 대답했다. '네가 백인들 사이에 동양인을 입양해 데려와 기르려고 할 때, 동양애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를 생각해 봤어? 그런 바보 같은 머리를 가진 건 잘못이잖아'라는 항변을 했다. 그때부터 그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어렵지만, 인카스 설립 초기에 해외입양인들에게 낳은 부모를 찾아주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는 것도 힘들었지만, 가보면 입양인은 둘째치고 생모부터 도와야 할 상황인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제천 부근 시골까지 오랜 시간 택시를 타고 들어갔는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 집이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나오는데, 그분의 딸이 입양인이 찾는다는 생모였다. 그런데 찾아놓고 보니 생모가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정 회장은 제천 군청에 가서 공무원들에게 생모의 질환이 심각하니 서류를 만들어 요양원에 보내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쉽게 수긍하려 하지 않는 공무원들을 '저렇게 두었다가 사고 나면 군청에서 책임질 거냐'고 설득해서 서류를 작성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뿌리찾기'를 위한 서류를 모았다가, 세 건 이상 모이면 그 지역으로 찾아갔다. 가보면, 다들 너무 어렵게 살고 있어서 속상했다. 아이가 와도 밥 한 끼 해먹일 수도 없거나, 제대로 앉아 얘기나눌 공간조차 없는 집들이 많았다.

정 회장은 '뿌리찾기'란 단순히 낳은 부모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고 했다. 해외입양인들은 대개 한국에 오면 편안함을 느낀다. 생김새가 똑같은 사람들 속에 있는 안정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한국에 눌러앉고 싶을 만큼 한국을 좋아한다. 그러나 오래 머무르며 여러 경험을 하다보면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대놓고 '입양아인 너희들은 더러운 피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처음에 대했던 영어 잘하는 중산층뿐만 아니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기도 한다. 정 회장은 낳은 부모나 원가족을 찾는 것뿐 아니라, 이런 과정 까지 뿌리찾기로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인카스는 해외입양인이 한국에 머무르고자 하는 경우, 숙식을 제공하는 일도 한다.
 
"해외입양인들의 상처는 한 순간에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일이 어려웠어요. 그 입양인이 열 살이면 10년, 스무살이면 20년, 30살이면 30년 동안의 상처인 거죠. 배고픈 어린아이는 빵 하나를 주면 해결되지만, 이들의 문제는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 낳은 부모에 대한 불신, 보낸 나라에 대한 불신, 그리고 입양된 나라와 부모에 대한 복잡한 감정 등 여러 겹겹의 문제가 있어요."


정 회장은 입양부모에게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한국말을 가르치라고 권한다. 입양아는 내면은 백인으로 자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외양은 어쩔 수 없는 동양인이기에 또 하나의 선택지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입양갈 때는 본인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자란 뒤에는 한국이라는 또다른 선택지를 주고자 함이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하는 해외입양인들도 꽤 보아왔지만, 대부분의 입양인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인카스 활동 초기에 한국에 온 입양인들이 정 회장에게 양부모에게 학대당했고,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호소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그때는 "그냥 보육원에서 기르는 게 나았던 걸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며 한국에서 살겠다던 입양인들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일자리 구하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고 막막해지면 다시 본국의 입양부모에게 돌아갔다.

어려울 때 그들을 돕고 받아주는 것은 정작 '국가가 나쁘고 해외입양이 나쁘다'며 부추기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이 원망하던 입양부모였다. 그것을 보며 정 회장은 '그래도 보육원보다는 해외라 하더라도 입양이 낫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와 사이가 나빠져도 주변에 이모 삼촌이라도 있다는 게 큰 힘이 되는 것을 보았다. '가족'이란 한 사람의 '울타리'이기에 아무리 보육원의 여건이 좋아진다 해도 시설은 입양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정 회장의 이런 생각도 어느 교회수련회에 참석했던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깨졌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정 회장의 아들은 대형교회에서 하는 수련회에 참석했다. 타월을 따로 준비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샤워한 뒤에 선풍기 앞에서 몸을 말렸는데, 항상 대여섯 명이 같이 말렸다고 했다. 정 회장의 아들이 "너도 타월을 깜박 잊고 안 가져왔니?"라고 물었더니, 한 아이는 "우리 집엔 그런 거 없어"라고 대답했고, 한 아이는 "내가 가져오면 다른 가족이 쓸 수 없어"라고 말했다.

이 교회 수련회는 수련회비를 따로 받지 않아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이 참석했던 것이다. 그 중 한 아이는 '어머니는 집을 나간 지 오래 됐고 동생과 둘이 사는데, 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 와서 돈을 주고 간다'고 했다. 그 돈으로 한 달을 사는데, 다음에 아버지가 올 날짜가 되어가면, 돈이 다 떨어져서 며칠씩 굶는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이런 얘기를 하며, "나는 공생원에 있는 아이들이 가장 불쌍하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신이 키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보육원에 맡길 수 있는 부모는 그래도 괜찮은 부모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닐하우스에 살면서 자다가 폭우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아이도 있었어요. 그렇게 살면서 미래에 대해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어떤 아이는 아버지가 술 먹고 집에 오는 날은 때리니까, 집을 나가 트럭 밑에서 잔다고 하더라고요. 또 한 아이는 집에 세면장이 없어서 동네 빌딩에서 세수를 하고 학교에 간다고 했어요. 저는 제가 어떻게 사는지 그애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살아왔던 스스로가 창피했어요. 엄마, 저는 커서 빈민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얘기를 듣고 정 회장도 놀랐다. 같이 살기만 했지 아이들을 학대하고 방임하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보육원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정 회장에 따르면, 사회복지 프로그램에는 100% 옳은 '정답'은 없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너무나 어려운 사정이 많고, 개개인의 아픈 사연이 많다. 정 회장은 그런 구체적 현실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느 한 가지 방법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다고 했다. 미혼모 복지든, 입양이든, 보육원이든 모든 분야가 의미 있다. 다만 아동문제에 접근하는 전문가들은 말 한 마디, 정책 하나 하나에 모두 신중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의 결과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한 어린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죽은 필립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추방 위기 입양인을 돕기로

정애리 회장은 처음 5년 정도의 기간 동안 자비로 인카스 활동을 해나갔다. 점점 일들이 많아지고, 규모가 커졌다. 사실은 나라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그는 3년이 걸리는 국비예산 투쟁을 했다. 필요하면 어디든 찾아갔다. 두려운 것도 없었고, 권위적 존재에게 굽히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옳다고 믿는 말과 행동은 해야만 했다.

정부부처에 방문하면 엄청난 수모를 겪었다. '무엇 때문에 해외입양인들을 한국으로 다시 불러내서 복잡한 일을 만드나요?'라고 따져 물으며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사람들에게 받는 무시나 비난은 두렵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역을 빨리 마치고 개인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아동권리보장원도 생겼고, 이 기관을 통해 국·내외 해외입양인 관련 활동을 위한 재정도 확보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해외입양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해외입양인들도 있지만, 한국 체류 중 범죄를 저질러 다시 한국으로부터 추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인카스가 개입하여 추방을 막는 일을 한다.

한국 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저질렀으면 추방되어 마땅할 수도 있으나, 해외로 입양을 간 것도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는데, 또 '자기 선택과 상관없이' 한국으로부터 추방되는 것은 상처를 두 번 주는 일이기에 그렇다. 정 회장은 해외입양인에게도 태어난 나라인 '한국에 대한 지분'이 있으니 그것을 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추방이 아닌 '선택'을 하도록 해달라고 호소한다.

한편 2000년 이전에 미국으로 입양 갔던 아동 중 1만 4000명 정도는 영주권만 있는 상태에서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아서 시민권이 없다. 그래서 범죄 등 미국 내에서 문제를 일으켜 한국으로 추방되는 사례가 발생했다. 정회장은 최근 4년간 미국으로부터 추방된 입양인들을 위한 일시거주시설 '로뎀의집'을 맡아서 운영했다. 아동권리보장원에서 위기관리 보호소를 만들었고, 이 시설이 정착될 때까지 정 회장이 처음 설계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4년 정도 지속됐다. 그때 보호했던 해외입양인 가운데, 미국에서 추방되어 2017년 자살한 필립도 있었다. 필립은 조현병을 앓았다. 사춘기에 발병한 조현병은 처음 부모에게 강하게 반항하는 것처럼 표현된다. 결국 집을 나가 혼자 사는 동안 병은 점점 악화됐고, 약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절도를 해서, 감옥을 들락날락하다가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추방자 보호소에 있었고, 나중에는 홀트에서 보호하다 추방 입양인을 위한 일시거주시설이 생기면서 로뎀의집으로 옮겼다. 필립은 한국에서도 2년 반을 감옥에 있었고, 조현병 치료를 받으며 로뎀의 집에서 2년 반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이 보호시설은 매우 위험했다. 그가 시설을 맡아 하는 동안 시설 내에서 살인 현장이 벌어질 뻔한 위험한 순간이 두 번이나 있었다. 급기야 주변 사람들은 정 회장에게 이 일을 빨리 그만두라고 했다. 어떤 법적 근거도 없는 시설이고, 시스템이나 재정도 불안한 상태이니 다른 기관에 맡기라고 계속 충고했다. 그는 고심 끝에 시설에 살던 추방 입양인들을 모두 취업시켜 내보냈다. 시설이 비워지고 6개월 만에 시설은 자연스럽게 폐쇄됐다.

정 회장은 억지로 떠밀려 한 일이라 손 털고 시원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있다가 필립이 자살했다. 필립의 병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어쩌면 올 것이 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사건은 정 회장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장례식장에 가면서 그는 고민했다. "그 집을 폐쇄하지 않고 운영했으면 필립이 살았을까?"

그 후 그는 입양인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성인이 된 뒤에 본인이 스스로 시민권을 얻기 위한 법적 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은 듯했다. 정 회장은 그들을 돕기 위해 미국에서 활동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변호사 비용이 한 명 당 3000불 정도 들 것이라 예상되어, 미국 내에서 강연 등 모금활동을 하기 위해 지금은 자신과 인카스의 이야기를 담은 책도 집필 중이다. 미국 내에 있는 필립과 같은 추방위기 입양인들을 구하는 것이 필립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이기에.

하나님, 당신 닮기를 원합니다
 
InKAS 2019년 모국방문단 정애리 회장은 지금도 한국에 머무는 해외입양인 20명을 하우징에서 돌보고 있다. 인카스는 모국방문단도 매년 6개 팀을 관리한다.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정애리 회장)
▲ InKAS 2019년 모국방문단 정애리 회장은 지금도 한국에 머무는 해외입양인 20명을 하우징에서 돌보고 있다. 인카스는 모국방문단도 매년 6개 팀을 관리한다.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정애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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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에 지쳐 '이제 그만두고 싶다'는 그에게, 그를 오랫동안 보아온 입양인이 말했다.

"그만두다니, 무책임해요. 우리에게 이런 세상을 보여줘 놓고 나서…. 그럴 거면 시작도 말았어야죠.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이제 좀 '진짜'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말이죠. 처음에는 그냥 워커(일꾼)처럼 보였거든요. 이제 당신의 진실한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그만둬선 안됩니다."

정애리 회장은 지금도 한국에 머무는 해외입양인 20명을 하우징에서 돌보고 있다. 인카스는 모국방문단도 매년 6개 팀을 관리한다. 추방입양인을 위한 로뎀의집을 맡을 당시에는 퇴근 후에는 로뎀의집에 가서 살았다. 그렇게 20년을 달려왔다. 처음 10년을 쉴 틈 없이 살았던 것은 하나님이 맡긴 그의 몫을 빨리 끝내고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원했던 축복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진짜 축복의 삶이었구나. 나는 딸 하나, 아들 하나 밖에 안 낳았는데, 전 세계에 많은 마음의 자식들을 주셨구나. 내가 원했던 부귀영화, 유명세보다 더 귀한 것, 내 마음의 행복함과 평안함을 얻었구나.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 때문이었고, 흔들리지 않고 직진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었구나.'

공생원집 딸로 태어나 보육원에서 자라고, 하고 싶었던 미술을 하지 못하고 사회복지학을 하고, 직업훈련원에서 시설퇴소생들을 만나고, 홀트에서 미혼모들을 상담한 것 등 당시에는 연관성이 없어보였던 것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아떨어져 그를 이 길로 이끌었다.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끌려왔던 길이였기에 주변에서 칭찬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아닌 것 같아 거북 했고 착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에 애써 저항했다. 위선하기보다는 위악하는 게 편했다.

요즘 정애리 회장은 자신과의 긴 싸움이 끝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는 이제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당신 닮기를 원합니다."    

[기획 /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
① "'고아'라는 건 내 자랑거리, 알아줘서 고맙습니다" http://omn.kr/1kmk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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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공교육, 청소년 독서, 대안 학교, 미혼모 문제,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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