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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로 출장 가는 동생이 내게 같이 가자고 했다. 말인 즉, 자신의 첫째 딸을 싱가포르에 데려가고 싶은데, 아내는 휴가를 낼 수 없고 둘째아이를 봐야 하니, 내가 좀 같이 가 달라는 것. 내 아이인 7세 동글이, 그리고 6세 조카를 데리고 싱가포르라... 흠. 두 말 할 것 없이 오케이다.

육아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애 둘 보는 게 하나보는 것보다 쉽다(물론 연령에 따라 다르다). 특히 서로 영혼의 단짝인 동글이와 조카를 보는 일은 발로 육아를 하는 것만큼이나 쉽다. 그렇게 우리는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남녀 성인 2명과 남녀 아이 2명. 완벽한 4인 '정상가족'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남매와 사촌 구성으로.

첫날은 동생이 회의가 없어 넷이 같이 다녔다. 본격적인 일정은 다음 날부터였다. 조식을 먹자마자 동생은 회의장으로 출근했다. 난 두 아이를 데리고 호텔 수영장에 갔다.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는 날씨에 호텔 수영장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 셋은 그곳을 전세낸 것처럼 자유롭고 재미있게 놀았다. 오후에는 동생과 합류해 싱가포르 필수 여행코스인 산토스 섬에 갔다. 그렇게 여행 이틀째까지는 괜찮았다.

여기선 크게 말해도 돼

문제는 삼일째부터였다. 6살 조카아이는 쑥쓰러움이 많고 예민했다. 조식 먹을 때 뾰루퉁해 있길래 왜 그러냐고 물으니 답이 없었다. 한참 뒤 동생이 슬쩍 귀띔했다. 사촌오빠, 그러니까 우리 아이가 조카가 가져다 준 요구르트를 안 먹어서란다. 동글이는 요구르트를 밥 다 먹고 싶어서 옆에 뒀을 뿐인데 조카는 맘이 상해서 조식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동글이가 조카에게 '요구르트는 이따 먹을 거야'라고 말해주며 상황은 일단락됐다. 7세 동글이도 평소 소심하고 섬세한 아이라 생각했는데 더 여린 조카를 만나 이틀 동안 적응하는 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그나마 괜찮았다. 아이 마음을 읽어주면 되는 거니까. 적응하기 힘든 건 조카의 화법이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말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조카랑 동글이가 워낙 잘 놀아서 주말이나 휴가 때 시도때도 없이 만나는 사이였고, 지난 번에는 동생네 둘째와 올케가 독감에 걸려 우리집에 조카가 이틀이나 머물다 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싱가포르 여행에서 유독 조카의 화법에 적응이 안 돼 답답했다. 아마 온종일 붙어 있으니 조카와 이야기할 시간이 늘고, 그만큼 조카가 내게 무언가를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 빈번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거 때문에 우리도 많이 고민했어. 아이가 자존감이 낮은 거 아닌가 싶어서 말야."

자존감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동생은 역시 아이 부모라 고민이 더 깊었던 듯하다. 

조카의 화법에 안 그래도 더운 날씨가 더 덥게 느껴지던 여행 삼일째였다. 식당에 들렀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택시 뒷좌석에 조카, 동글이, 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조카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무언가 말을 했다. 꽤 긴 말이었는데 내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동글이가 한 마디 했다.

"OO야, 여기선 크게 말해도 돼."

순간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간 나는 조카가 말하는 방식을 탓했다. 나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잘 안 들리면 끝까지 듣지 못하고, 좀 더 크게 말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와 달리, 동글이는 조카가 왜 작게 말하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왜 조카가 동글이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고, 조카의 마음을 읽는 동글이에게 한 수 배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조카가 작게 얘기해도 경청하려 노력했다. 조카 입장에서 헤아려보며 아이는 저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낸 걸까 생각했다.

아이가 풍선을 들고 다니는 이유
 
 책 앞표지
 책 앞표지
ⓒ 상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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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우연히 그림책 <빨간 풍선>을 만난 건 싱가포르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 정도 흐른 뒤였다. 책 표지에 한 아이가 서 있는데,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 커다란 빨간 풍선이 그려져 있다. 

온통 빨간색인 면지에도 표지에서 봤던 아이가 서 있다. 얼굴은 동그란 풍선에 가려져 안 보인다. 이유가 책의 앞부분에 나온다. 주인공인 아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그래서 늘 빨간 풍선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교실에서도 맨 끝에 앉고 바닷가에 물놀이 가서도 수영복을 입고 오리튜브를 허리에 건 채 풍선을 들고 있다.

어느 날 엄마랑 서커스 구경을 간 아이는 아찔한 곡예를 보다 그만 풍선을 놓친다. 풍선이 없으면 안 되는 아이는 풍선을 쫓아간다. 풍선을 쫓아가면서도 나무 뒤에 숨고 자기 팔로 얼굴을 가리며 어떻게든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아이.

그런 아이가 만난 것은 부끄러움 많은 코끼리였다.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서 나오지 못하는 코끼리가 아이의 빨간 풍선을 가지고 있었다. 무사히 풍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계속해서 코끼리가 신경쓰인다. 유치원 재롱잔치 때 부끄러워서 울기만 하던 아이에게 엄마가 건네줬던 빨간 풍선. 결국 아이는 커다란 노란 풍선을 자전거에 달고 코끼리에게 간다.
 
"코끼리야, 이 풍선을 달고 서커스를 해봐. 그럼, 부끄럽지 않을 거야."

코끼리는 그날 무대에서 멋진 묘기를 펼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는 풍선을 손에서 놓는다. 처음으로 아이 얼굴이 드러난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이제 나도 또 다른 용기가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뒷면지는 앞면지처럼 빨간색으로 되어 있지만, 웃고 있는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누구나 빨간 풍선이 필요할 때가 있다

장자끄 상빼의 <얼굴빨개지는 아이>가 생각나는 그림책인 <빨간 풍선>은 아이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나는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과정보다 빨간 풍선을 손에 쥐여준 엄마, 그 풍선으로 인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던 아이가 마음에 남았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풍선을 들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아이. 자신과 비슷한 코끼리에게 노란 풍선을 쥐여주는 아이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동글이도 그때 싱가포르에서 조카 아이에게 빨간 풍선을 쥐여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반대로 조카에게 크게 말해달라고 요구한 나의 행동은,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가 자기 스스로 빨간 풍선을 놓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못하고 자꾸 치워버리려 한 행동 같았다.

살면서 누구나 빨간 풍선이 필요할 때가 있다. 대중 앞에 설 때 쑥스럽고 떨리는 건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나와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 지 길어야 3년밖에 안 된 조카 아이에게 답답함을 느낀 게 부끄럽다. 빨간 풍선 뒤에 숨고 싶어졌다.

이번 추석엔 조카에게 그림책 <빨간 풍선>과 빨간 풍선을 선물하려 한다. 나의 답답함을 호소하기보다, 아이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는 고모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이 될 것 같다.

빨간 풍선

황수민 (지은이), 상출판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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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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