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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 '브라더스 키퍼' 대표 김성민씨를 만났다. '브라더스 키퍼'는 보호종결아동 자립을 위한 사회적 기업으로 벽면 녹화 업체인 '브레스 키퍼'를 설립해 운영 중이다. '보호종결아동'이란 18세가 되어 보육원 등 시설에서 퇴소한 청년들을 의미한다.

"저는 보육원에서 17년을 자랐습니다. 맞고 굶는 게 일상이었죠. 너무 힘들어서 중학교 때는 가방에 칼을 넣고 다녔어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천사의 얼굴을 한 김성민씨의 이 한 마디는 한국에서 '고아'로 자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깨닫게 했다. 보육원에서 폭력과 모욕, 굶주림에 시달리던 소년 김성민은 '모든 괴로움이 나를 버린 부모 탓'이라 여겼다. '그들을 만나면 복수하기 위해' 가방에 칼을 넣고 다녔다.
 
'원망의 조건'을 '감사의 조건'으로 바꾼 하나님과의 만남
 
 보육원에서 폭력과 모욕, 굶주림에 시달리던 소년 김성민은 '모든 괴로움이 나를 버린 부모 탓'이라 여겼다. 그들을 만나면 복수하기 위해 가방에 칼을 넣고 다녔다.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부모를 원망하던 성민씨가 칼을 내려놓고, 마음을 바꾼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하나님을 만나면서였다.
 보육원에서 폭력과 모욕, 굶주림에 시달리던 소년 김성민은 "모든 괴로움이 나를 버린 부모 탓"이라 여겼다. 그들을 만나면 복수하기 위해 가방에 칼을 넣고 다녔다.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부모를 원망하던 성민씨가 칼을 내려놓고, 마음을 바꾼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하나님을 만나면서였다.
ⓒ 김소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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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성민씨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한다. 1985년 보육원 입소 당시의 그에 대한 정보는 단 두 줄이었다. '안동초등학교 앞에서 발견' '세 살 추정'. 그는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부모'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처음으로 '부모'라는 개념을 알게 된 것은 학교에 들어가면서였다. 다른 아이들에게 있는 부모를 자기는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그때서야 인지하게 되었다. 학년 초에 교사들이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하던 시절이었다.

국가 방침에 따라 빨리 조사를 마쳐야 했지만 학급당 50~60명 되는 학생들을 차례로 면담하려면 족히 한 달은 걸릴 터였기에, 이 조사는 많은 아이에게 상처를 남겼다. 특히 성민씨같은 보육원 아동들에게는 잔인한 일이었다. 그는 그때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엄마 없는 사람 왼손 들어. 아빠 없는 사람 오른손 들어... 우리는 양손을 다 들고 있었어요."

선생님들의 차별은 서러웠지만 그 밖의 학교생활은 힘들지 않았다. 학우들은 매 맞고 싸우는 데 이골이 난 보육원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보육원 안에서 생활하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시간이었다. 폭력은 주로 원아들 사이에서 자행되었다. 성민씨가 있던 당시 보육원에 80명의 원아가 있었는데, 식당 아주머니 포함 어른은 단 네 명뿐이었다. 층별로 남교사 한 명, 여교사 한 명, 그리고 원장님,  이렇게 단 세 명의 교사가 80명의 원아를 보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문제가 안 생기도록 관리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우리들은 거의 형들 손에 컸어요. 그때는 형들의 폭력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라요. 중학생, 고등학생인 아이들에게 무슨 선한 생각들이 나올 수 있겠어요?"

한 번은 좀 나이 먹어서 보육원에 들어온 한 원아가 형들을 경찰에 신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때 성민씨와 친구들은 지긋지긋한 폭력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더 나빴다. 경찰은 교사들에게 사건을 일임했고 교사들은 다시 이 문제를 형들에게 넘겼다. 신고한 아이는 형들에게 보복으로 더욱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성민씨와 원아들은 세상 어디에도 자기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없고,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에 각인했다. 그렇게 형들에게 맞던 동생들은 자라서 다시 어린 원아들을 매질했다. 폭력은 끊을 수 없는 고리가 되어 대물림됐다.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부모를 원망하던 성민씨가 칼을 내려놓고 마음을 바꾼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하나님을 만나면서였다. 그는 하나님께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지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대답을 들었다. 지금까지 겪은 괴로움은 부모의 실수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굶주리고 맞고 상처받는 고아로 살게 함으로써,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성민씨를 훈련시켰던 것이다. 성민씨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을 용서했다. 원망의 조건이 감사의 조건으로 바뀌었다. 보육원에서 보낸 시간은 성민씨에게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도구를 벼리기 위한 시간'으로 거듭났다.

'브라더스 키퍼' 설립으로 고아를 돕다
 

보육원 원아들이 공통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18세가 되어 보육원을 떠나는 '퇴소'의 날이다. 아무리 끔찍한 보육원 생활도 '퇴소'의 막막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육원을 떠난 선배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원아들의 공포는 더욱 커졌다. 형들은 주로 교도소에 갔고, 누나들은 성매매하거나 미혼모가 되었다고 했다. 그나마 숙식 제공이 되는 식당에서 적은 급여를 받고 일하는 형이 가장 잘 된 경우였다.

"퇴소 당시 자립 지원금을 받지 못했어요. 저는 차비도 형들이 보내줬는 걸요."

18세에 시설에서 퇴소하는 청년들은 각 지방자치 정부로부터 '자립지원금'을 받는다. 지자체에 따라 300만 원에서 600만 원 사이의 금액이 지급되지만 이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천 아시안게임이 있던 2014년 인천에서 시설을 퇴소한 청년들 가운데 이 돈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시안 게임을 하느라 복지 예산을 줄여야 했고, 이런 경우 제일 먼저 삭감되는 것이 시설퇴소인들의 자립지원금이다. 장애인이나 다문화 새터민 등 다른 복지 예산을 손을 대면 즉각 반대 여론이 일어나며 사회적 파장이 커진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시설 퇴소인들, 고아들은 자기들을 대변할 목소리조차 가지지 못한 가장 무력한 사람들이다.

보육원에서 퇴소한 성민씨는 가방 하나 들고 서울로 왔다. 막막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식당에 들어가 2년간 일하며 돈을 모았다. 2년 후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보육원에 다시 연락했다. 보육원 측은 의논하기 위해 들린 성민씨에게 한 NGO 단체를 소개했다. 그 뒤 대학에 들어가 사회복지 선교학을 공부하면서 그 단체에서 7년간 근무했다. 그가 들어간 NGO 단체는 보육원 아동을 후원하고 돕는 일을 했는데,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계를 느꼈다. 후원이나 교육만 잘해주면 보육원 아동들도 건강하게 자립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후원이 끊기면 바로 범죄나 성매매의 길로 빠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시설퇴소인들을 직접 인터뷰하며 원인을 조사했다. 그리고 자립을 위해 필요한 것은 후원이나 교육보다 '일자리'라는 결론을 얻었다.

성민씨는 일하던 NGO 단체에서 나와 한동안 시설 퇴소 청년들을 일반 회사에 연결해주는 일을 했다.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교인들 가운데 회사 대표들을 찾아 청년들과 매칭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3개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다. 성민씨는 이런 현상의 이유를 알기 위해 또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시설 퇴소 청년들이라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상처가 부정적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잘해주면 "내가 고아라서 잘해주나?",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면 "내가 고아라서 나한테 이러나?" 하는 자격지심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보육원 안에서 생존 습관으로 가지게 된 거짓말하는 버릇도 문제였다.

그 무렵 교회에서 만난 조경건설업체인 '창조원' 대표가 성민씨에게 보육원 아동 후원을 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성민씨는 후원으로 아이들을 살릴 수 없다며 일자리를 부탁했고, 두 명의 시설퇴소 청년이 창조원에서 근무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한 명은 처음 출근하는 날 도망을 가버렸고, 한 명만 취업했다. 그 한 명은 예상외로 너무나 잘 적응했다. 성민씨는 그 이유를 알아보았고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회사 사람들이 잘 대해주기도 했지만 매일 살아 있는 녹색 식물을 대하면서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성민씨는 당시 준비하고 있던 사회적 기업의 방향을 바꿨다.

성민씨는 원래 교육 쪽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교육으로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는 한계를 느꼈다. 때마침 창조원 대표는 자기 회사의 실내조성 기술을 무상으로 이전해 줄 테니 성민씨에게 직접 회사를 만들어 해보라고 했다. 여러 전문가와 시장조사를 했다. 결론은 긍정적이었다. 미세먼지 관련 이슈도 컸고 조경 쪽은 세대교체가 되지 않아 고령화되어 있었다. 또 시설 퇴소 청년들은 80%가 공업고등학교와 농업고등학교 졸업생이기에 기술력이 있었다.

마침내 2018년 5월 2일 '브라더스 키퍼'라는 이름의 사회적 기업이 설립되었다. 사업을 해나가면서 회사 이름과 하는 일이 매칭되지 않는 점을 보완하고자 같은 해 가을 브랜드 네임을 따로 만든 것이 '브레스 키퍼'다. '숨을 지킨다'는 뜻이 기업의 일과 딱 맞아떨어졌다. 성민씨는 앞으로도 사업 분야를 다양화해나가며 '브라더스 키퍼'의 이니셜을 딴 'BK'로 다양한 브랜드를 만들어낼 예정이다. 
  
눈물의 결혼식, 그리고 형제를 지키는 자
 

스물일곱 살, 성민씨는 결혼을 했다. 스물여섯에 다시 학생이 된 성민씨는 대학에서 동갑내기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LG 연구소에서 근무를 하다가 그만두고 선교학을 공부하기 위해 학생이 되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한 부부의 결혼식에는 4개 보육원이 초대되었다. 행복한 결혼에 대한 기대 자체가 없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이날 그는 너무 많이 울었다. 자신이 나온 보육원 아이들의 축가 연주도 감동적이었지만 그보다는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였다. "저 이제 이렇게 잘 자라서 행복한 결혼합니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한 부부의 결혼식에는 4개 보육원이 초대되었다. 행복한 결혼에 대한 기대 자체가 없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이날 그는 너무 많이 울었다. 자신이 나온 보육원 아이들의 축가 연주도 감동적이었지만 그보다는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였다. "저 이제 이렇게 잘 자라서 행복한 결혼합니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었다.
ⓒ 김소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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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씨 부부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한 결혼식에 4개 보육원 아동들을 초대했다. 행복한 결혼에 대한 기대 자체가 없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이날 그는 정말 많이 울었다. 자신이 나온 보육원 아이들의 축가 연주도 감동적이었지만 그보다는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였다. "저 이제 이렇게 잘 자라서 행복하게 결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날 느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세월이 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혼 후 3년 정도는 버스나 지하철 타고 가다가 우연히 눈이 마주친 아저씨 아주머니가 빤히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부모는 자식을 알아본다는데 혹시 저 분이 내 엄마일까? 저 사람이 내 아빠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주민센터에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그동안 주민센터에서 연락이 와서 부모를 찾았다는 시설 퇴소 청년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좋은 사례는 아니다. '성년이 된 자녀가 가족으로 등록되어 있어 기초생활 수급을 못 받으니 인연을 끊을 수 없냐'는 부모의 민원이 시발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전화가 온 날, 성민씨는 회의가 늦게 끝나 마음을 졸이며 밤을 보냈다. 다음날에야 주민센터에 연락해 확인하니 어이없게도 사업 견적을 의뢰하는 전화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부모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성민씨는 보육원을 퇴소한 뒤 결혼하기 전까지 외로웠다. 매일매일 그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외로운 날이 명절이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이고 함께 지내는 날, 텔레비전에서도 온통 행복한 가족들의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그는 혼자였다. 성민씨는 '나중에 결혼하면 자기처럼 명절을 외롭게 보내는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다행히도 아내는 물론 장인 장모님까지 그와 뜻을 함께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성민씨 가족의 '명절 모임'이 시작되었다. 첫해 추석에 한 사람을 데려왔는데, 너무 좋았다. 이듬해는 양손에 한 명씩 손을 잡고 데려왔다. 이렇게 매년 인원이 늘어나서 나중에는 펜션을 빌려서 모였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단체도 아닌 개인이 해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한계가 왔다. 성민씨는 '하나님,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라며 손을 놓아 버렸다. 3개월 동안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교회에는 나갔다. 어느 주일,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런데 아벨을 죽여서 동생이 어떤 상태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가인은 오히려 하나님께 반문했다.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한 마디가 성민씨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는 가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내 형들, 동생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나 잘 아는데 내가 외면하고 있었구나!'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성민씨는 생각했다. '내가 NGO 활동을 하든 사회적 기업을 하든 이 이름을 가져가야겠다'고. '형제를 지키는 자', 이것이 '브라더스 키퍼', 성민씨가 대표로 일하는 사회적 기업의 이름 속에 담긴 뜻이다.

'고아'라는 말을 차별에서 긍지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성민씨가 고아라서 차별을 느낀 적은 매우 많다. 보육원 아동들이 가장 먼저 차별을 느끼는 곳은 학교이다. 좋은 교사도 있지만 대부분 교사가 고아를 하대했다.

"친구들이 함부로 할 땐 때리면 되지만 선생님들은 어찌할 수 없잖아요? 보육원에서 하도 맞고 싸워서 친구들과 싸우는 건 아무 느낌도 없으니 겁나지 않죠."

학교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나도 보육원 아이들이 제일 먼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그들에게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숨겨야 하는 콤플렉스가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번 차별을 느꼈다. 서울 올라와서 처음 구한 일자리에서 성민씨는 보육원 출신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서에서 그가 일하는 식당으로 연락이 왔다. 성민씨가 나온 보육원의 컴퓨터가 다 없어졌는데 퇴소생 전부 용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사장과 통화하면서 성민씨가 보육원 출신임을 알렸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용의자가 되었고 개인의 사생활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안동에서 안양으로 이사 오면서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받아야 했는데 주인이 차일피일 미루며 주지 않았다. 어느 날 집주인은 어떻게 알았는지 성민씨에게 '알아보니 당신 고아던데'라며 이유 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고아라는 사실은 성민씨에게 상처가 아니었다. 성민씨는 차분히 말했다.

"그건 내 자랑거리인데 어떻게 아셨나요?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그는 생각했다. '보육원 출신 청년들이 매 순간 이런 일을 당하겠구나, 사람들은 우리가 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결코 선한 용도로 쓰지 않는구나'라고.

그의 회사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보육원 출신을 우대한다.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감춰야 했던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지금부터라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긍정적 경험을 주고자 함이다. 더구나 '브라더스 키퍼'는 보육원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므로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실제로 장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브라더스 키퍼'는 보육원에서 보낸 모든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한다.

"회사에 들어온 청년들은 정말 많이 회복되고 얼굴을 똑바로 들고 죄의식 없이 보육원 출신임을 당당히 얘기하고 있어요."

입양되는 게 최선이지만, 보육원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

NGO 단체 활동을 했던 7년 동안 성민씨는 보육원 아동들과 함께 하는 캠프에 여러 번 참석했다. 캠프에 참석할 때마다 그는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어른이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활동가들을 제쳐두고 아이들은 모두 성민씨에게 왔다. 성민씨는 무엇때문에 아이들이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을 좋아하고 따르는지 궁금했다. 문득 깨달았다. 자기들처럼 보육원 출신인 선배가 대단한 사람들과 나란히 캠프에 왔다는 사실이 좋아서였다. 그것만으로도 성민씨는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었다.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성민씨도 자존감을 회복했다. 그 경험은 '브라더스 키퍼' 운영에 중요한 목표를 제공하고 있다. 회사 직원이 되는 시설 퇴소 청년들을 잘 훈련하고 교육해서 보육원 아이들의 희망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계획도 있다. 보육원을 방문해서 봉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으로 24시간 아이들 곁에 있는 교사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다. 결국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교사들이기 때문이다. 보육원을 방문해서 보면 교사들이 아이들보다 더 상처가 많고 마음이 피폐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상처받은 아이들을 대하다 보니 지쳐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잘 기르고 잘 적응하도록 해야겠다는 마음보다 "이 문제아, 빨리 나갔으면 좋겠어"라는 식의 마음을 가진다. 
          
 '브라더스 키퍼'는 벽면 녹화 업체인 '브레스 키퍼'를 설립, 운영 중이다. 이 회사는 보육원 출신 청년을 우대 채용하고 보육원에서 보낸 모든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한다. (맨 오른쪽이 김성민씨)
 "브라더스 키퍼"는 벽면 녹화 업체인 "브레스 키퍼"를 설립, 운영 중이다. 이 회사는 보육원 출신 청년을 우대 채용하고 보육원에서 보낸 모든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한다. (맨 오른쪽이 김성민씨)
ⓒ 브라더스키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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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든 아이가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육원 퇴소생들과 성인 입양인들을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차이'더라고요. 보육원이 정답은 아닌 거죠. 그런데도 여전히 고아들은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우리나라가 저출산 국가인데 고아는 아직도 많이 생기고 있어요. 아이들이 모두 입양되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시설이 필요한 거죠. 시설에 대한 지원이 아동에게만 집중되다 보니 선생님들이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제대로 돌봄이 이루어지지 못하니까 보육원을 퇴소하면 바로 문제 발생하는 거고요. 부모가 어떤가에 따라 아이가 달라지듯이 선생님들을 위한 치유 교육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자녀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성민씨는 결혼한 지 9년째 되지만 아직도 집이 전셋집이고 9평에 산다고 했다. 계속해서 시설퇴소인들을 돕는 일로 소진하다 보니 가정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아내와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 가본 것도 돈을 모아 놓으면 보육원 아동 문제로 써야 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부부는 '해외여행을 가면 한 나라만 볼 수 있지만 한 사람이 하나의 세상이니 사람을 도우면 여러 세상을 볼 수 있다'며 위안했다. 이제 조금씩 사업이 자리 잡히면서 성민씨 부부도 자녀를 생각하고 있다. 워낙 성민씨가 보육원 아동을 돕는 일에 집중하고 있기에 아내는 '아이를 낳지 말고 나와 있는 아이들을 잘 기르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아로 자란 성민씨는 자신의 친생자를 보고 싶은 바람도 있다. '그래서 첫째 아이 낳고 나서 입양도 하자'고 했다며 성민씨는 선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그는 '브라더스 키퍼'를 통해 더 많은 일자리 브랜드를 만들어 낼 예정이다. 식물을 대하며 정서적으로 회복되는 것에서 착안해서 식물치유프로그램을 전국 보육원에 서비스할 계획도 있다. 해야 할 일들이 무궁무진하다며 그는 말했다.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모든 일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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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공교육, 청소년 독서, 대안 학교, 미혼모 문제,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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