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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친부모로부터 양육이 포기되어 의탁할 곳 없는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위탁모들의 이야기입니다. 가정이 없는 아이들이 새로운 가정을 만나기 전까지 시설이 아닌 가정에서 따뜻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가정위탁입니다. 

이 연재는 원가정에서 끊어진 양육의 끈을 새로운 입양가정으로 단절없이 이어지도록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는 입양기관 위탁모들의 이야기입니다. 입양기관 위탁모는 전체 500여 명 수준이지만 갈수록 고령화되면서 숫자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2018년 봄에 인터뷰하고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합니다. - 기자 말 
 

지인의 권유와 가족의 동의로 위탁모가 되다
 
    
8년 전, 그녀는 마흔 셋 나이에 위탁모가 되었다. 가까이 지내던 동네 언니가 위탁모이기도 했고 아이를 워낙 좋아해 위탁모의 길을 가게 되었다. 위탁비라고 받을 수 있는 돈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8년차 위탁모 한희정씨. 2018년 4월 촬영.
 8년차 위탁모 한희정씨. 2018년 4월 촬영.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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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결혼해 얻은 아이들은 훌쩍 자랐고 가정과 직장에서 성실한 남편 덕에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무료하게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이웃 언니가 아이를 밥 먹이고 어르고 달래는 모습만 봐도 흐뭇해졌다. 아이가 주는 집안의 활기가 느껴졌다. 특히 언니 남편이 퇴근 후 함께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돌아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어린 아이 하나가 가족 모두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언니의 권유에 고민을 했다. 공항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는 남편과 대학생 고등학생이었던 딸 아들의 반대는 없었지만 두려움이 있었다. '아이 하나 키운다는 것이 그저 단순히 양육한다'로 그치는 게 아니라 온갖 정성과 사랑과 몸의 고단함까지 감수해야 하는 법인데 그걸 잘 해낼 확신이 없었다. 위탁은 이별이 예고된 사랑인데 그 사랑의 아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하겠다는 결심보다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거라는 이끌림은 옆에서 보아 온 언니의 모습과 가족들의 주저 없는 동의 때문이었다.

'건호'를 만나다

2011년 9월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에 위탁모 신청을 했다. 교육, 가정방문, 건강검진 등의 절차를 거치고 그해 11월 19일 첫 아이를 받았다. 날짜도 잊지 못한다. 태어난 지 한 달 반 된 남자아이, 이름이 '건호'라고 했다.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신기하게도 그녀는 20년 전 아이를 임신했을 때의 심정이 되살아났다. '어떤 아이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육아용품을 준비하면서 설레고 행복했다. 오로지 아이만이 줄 수 있는 산소처럼 맑은 마음이 느껴졌다.

건호를 안던 순간 떨리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건강한 아이였다. 어떤 사연이 있어 희정씨에게 오게 되었는지 기관에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낳은 부모로부터 양육이 포기된 아이였다. 사연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이가 가장 큰 피해자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아이는 행복할 권리가 있었다.

힘든 아이였다. 자주 울었고 길게 울었다. 멈추지 않는 아이의 눈물을 받아내며 희정씨는 함께 울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된 육아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예상은 했지만 힘든 건 힘든 거였다. 가족들도 같이 걱정해주었지만 누구 하나 아이를 돌려보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각자 남는 시간을 활용해 아이 돌보는데 썼다.

6개월이 넘어가면서 힘든 시기도 지났다.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건호가 온 뒤로 집안의 변화는 확연했다. 각자 방에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아이를 보기 위해 거실에 모여들었다. 주말이 되면 온 가족이 아이 유모차를 끌고 여행을 다녔다. 아이가 주는 선한 영향력이었다. 희정씨 가족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건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건호가 말을 트기 시작한 건 돌 전 10개월부터였다. '엄마'라는 첫 말을 들었을 때 오래 전 그녀가 낳은 아이들로부터 들었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그녀의 아이는 아니었지만 희정씨는 내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아이를 대한 적이 없었다. 키우고 있는 동안은 무조건 그녀의 아이였다. 

2012년 새로운 입양법이 시행되면서 건호에게도 시련이 왔다. 국내입양 절차는 까다로워지고 해외입양은 더 어렵게 되었다. 한국의 입양 문화 탓에 국내입양이 어려운 남자아이였던 건호는 해외입양 절차가 시작됐고 바로 양부모가 정해졌다. 하지만 건호는 혼외자였다. 출생등록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새로 바뀐 입양법은 출생등록이 안 되면 국내입양을 물론 해외입양이 어려웠다. 희정씨는 아이가 시설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게다가 복잡해진 절차 때문에 아이가 위탁되는 기간도 그 전에 비해 몇 배나 더 길어졌다. 어차피 입양되어야 할 아이라면 빨리 새로운 부모를 만나 애착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게 아이의 남은 삶을 위한 정석이다. 아이는 위탁이라는 말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위탁을 하는 동안 아이에게 위탁모는 엄마이고 위탁모의 가족들은 아빠이자 누나이고 형이다. 그렇게 철석같이 생각하면서 아이는 성장한다. 그러다가 새로운 부모가 생기면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걸 아이가 다 감당해야 한다. 바뀐 법은 비정했다. 아이를 위한 법이라면 위탁 기간을 최대한 짧게 짜는 게 정상이다. 그게 진정 아동을 위한 최우선의 이익이다.

천만다행으로 건호를 입양하겠다는 부모가 나타났다. 성본창설 절차를 거쳐 건호 단독호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희정씨는 시설로 가게 될 상황이었을 때 건호를 위탁이 아니라 입양을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어떻게든 시설로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건호의 양부모님은 건호의 삶을 건강하게 살려 준 은인이었다.

건호와 함께 지낸 세월이 15개월이었다. 젖먹이로 와서 몸을 혼자 뒤집고 기고 말하고 걷게 되었다. 그 기적 같은 일을 해내는 동안 희정씨 가족은 늘 아이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다가 온 이별이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고 그녀는 부지런히 아이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앨범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정리하면서 울었다. 건호에게 들려 보낼 장난감을 사면서 울었고 신발을 사 신기면서 울었다. 속옷을 손빨래 하면서 울고, 가서 입을 새 옷을 사 입히며 울었다. 남편도 울고 아이들도 울었다.

아이를 보내는 날 회사에 휴가를 내고 남편이 동행했다. 아이를 새 부모님께 보내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건호의 눈과 마주쳤다. 소중한 무언가를 맥없이 빼앗기는 허탈감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편이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희정씨는 꺽꺽 소리 내 울었다.

건호와의 이별 이틀 만에 '세한'을 만나다
 
 8년차 위탁모 한희정씨. 2018년 4월 촬영.
 8년차 위탁모 한희정씨. 2018년 4월 촬영.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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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소리가 사라진 집은 적막했다. 건호가 떠나면서 남긴 빈 자리가 사무쳤다. 가슴에 휑한 바람만 불었다. 도무지 견딜 재간이 없었다. 기관에 바로 부탁을 해서 아이를 받았다. 건호가 가고 이틀 만이었다. 태어난 지 보름 된 남자아이 '세한'이였다.
   
처음 며칠은 건호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세한이에게 정이 붙지 않았다. 일주일 지나고 열흘 지나면서 아이에 대한 새로운 사랑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한이는 순한 아이였다. 나중에는 말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아이로 자랐다. 천상 밝은 아이가 세한이였다. 가족들 모두에게 에너지를 주는 아이였다. 건호를 잃은 상처에 세한이로 인해 새살이 돋았다. 

세한이는 23개월을 희정씨의 아들로 살다 미국으로 해외입양을 갔다. 생모의 술·담배 이력이 국내입양을 어렵게 만든 경우였다. 우리나라는 5개월 동안 국내입양을 세 번 이상 시도한 후 입양이 안되면 해외입양을 추진한다. 아직 한국의 입양문화는 생모의 정신병력 혹은 아이 건강상 조그마한 흠결이 있으면 입양이 불가능하다. 특히 건강한 여자 아이 중심의 문화다. 국내입양을 갈 수 없는 처지가 분명한 아이도 예외 없이 5개월 동안 세 번 이상 국내입양을 시도한 흔적을 문서로 남겨야 한다.

결국 아이들 평생의 삶을 좌우하는 주 양육자와 애착 형성 시기를 무시한 채 아이들은 평균 20개월이 넘도록 입양 가지 못하고 이별이 예고된 위탁 가정에서 자라게 된다. 세한이가 한국 나이로 3살이 되어 해외입양을 가야 했던 이유였다. 이는 위탁 가족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별의 고통을 주고 양부모에게는 애착 형성의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사자인 아이에게는 생모와의 이별에 더하여 가족으로 알고 지냈던 위탁가정과의 또 다른 이별의 고통이 더해지는 것이다.  

세한이가 양부모가 정해진 때는 12개월 무렵이었다. 복잡한 절차와 수속이 일 년 여를 더 이어진 셈이다. 그 사이 양부모는 세한이를 보기 위해 한국을 몇 번 방문했다. 처음에는 양복을 갖춰 입고 왔고 두 번째는 편안한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다. 세한이와 눈을 맞추기 위해 바닥에 누워 놀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 세한이는 양부모에게 잘 적응했고 낯가림도 하지 않았다.

희정씨는 보름 된 아이와 23개월을 함께 있었다. 세한이가 미국으로 떠나야 할 시기가 다가오면서 그녀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이미 뛰어 다니면서 말도 다 하는 세한이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양부모가 이제 자기 진짜 부모라는 걸 알았고 입양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녀의 눈물을 오히려 세한이가 닦아주곤 했다. '엄마 울지 말라'는 말과 함께. 한국 나이로 세 살이 될 때까지 키워 온 아이였다.

영영 아이를 떠나 보내야 했던 날 이번에도 그녀의 남편이 동행해주었다. 건물 지하 1층에 아이와 양부모가 함께 떠날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아이를 떼어놓을 때까지 그러지 말자 몇 번이나 다짐을 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승합차 문이 닫히기 전 마지막 모습은 그녀와의 이별을 직감한 세한이가 울며불며 차에서 내리려고 떼를 쓰는 장면이었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세한이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눈물을 쏟으며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난 후 양부모님이 보내 준 사진 속에서 세한이는 활짝 웃고 있었다. 밝은 표정에서 벌써 안정된 느낌이 보였다. 안도감이 이는 한편으로 서운함이 밀려왔다. 위탁모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행복한 모습이 그녀가 위탁모인 이유였다.

남편은 세한이보다 앞서 있었던 건호를 더 기억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세한이에 대한 기억이 더 깊다. 그녀도 아이들도 세한이를 보내면서 더 많이 울었다.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 없지만 그 통증은 다 다르듯이 키우고 보낸 아이들은 저마다의 기쁨과 아픔으로 기억에 남았다.

위탁모 3년 차, '주한'이를 안았다

세한이 보내고 바로 받은 아이는 '주한'이었다. 위탁모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3년이 되던 무렵이었다. 생모의 병력 때문에 주한이는 국내입양이 불가능한 아이였다. 주한이는 16개월을 함께 있다 미국 양부모의 품에 안겼다. 주한이의 혹시 모를 유전적 병력을 알면서도 미국 양부모는 입양을 결정했다.

주한이가 와서 돌 무렵 되었을 때 친정아버지의 대장암 소식이 전해졌다. 거기에 갱년기까지 찾아왔다. 병간호에 위탁에 갱년기까지 하나는 놓아야 할 지경이었다. 위탁을 그만 하자는 이야기가 가족들로부터 들려왔다. 그 때 그녀 옆에 언제나 한결 같은 남편이 있었다. 성품이 착한 사람이었다. 한동안 아이를 데리고 자며 그녀를 도왔다. 마침 병원에 근무하던 딸이 이직을 준비하는 한 달 동안 아이를 돌보기도 했다.

가족들 도움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정해진 기간이 있지만 아이를 가족처럼 받아들이고,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아이 양육을 돕고,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함께 이별의 아픔을 견디고 다시 아이를 받아들이는 이 모든 일상을 누구도 싫어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주한이는 201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떠났다. 주한이도 세한이처럼 건물 지하 1층 주차장에서 헤어졌다. 세한이와 달리 그녀는 주한이를 지켜보지 못했다. 세한이와 헤어질 때의 아픈 기억 때문이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눈물의 양은 같았다. 다른 차이라면 주한이와 함께 한 16개월 동안 집안에 닥친 몇 가지 견디기 어려운 일들로 인해 주한이에게 미안하지만 보내서 후련한 마음도 절반은 있었다.

아라와 한별이... 위탁모 일은 마음을 주는 봉사

주한이 보내고 새로 아이를 받은 건 두 달 후였다. 몸도 전과 같지 않았다. 더 쉬고 싶었지만 위탁모가 한참 모자란 상황을 알고 있는 데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2017년 2월 다시 아이를 받았다. 위탁모 하고 네 번째 아이였는데 처음으로 여자아이가 왔다. 태어난 지 10일밖에 안 된 '아라'였다.

그동안 계속 남자 아이만 키우다가 여자아이가 집에 오니 무척 좋았다. 아라는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순했다. 이런 아이 같으면 평생이라도 데리고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건강한 여자아이였다. 아라는 곧 국내입양이 결정되어 떠났다. 그녀의 품에 안긴 지 4개월 만이었다. 기간의 길고 짧음과 관계없이 아이를 키울 때마다 정이 들었고 헤어질 땐 슬픈 마음이 들었다. 각각의 아이들은 각각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기억되었다. 그녀에게는 모두가 사랑스러운 마음과 아린 마음이 동시에 드는 자식들이었다.

2017년 4월 아라를 보내고 온 아이가 한별이었다. 장애는 아니지만 병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국내입양이 불가능한 아이였다. 어떻게 그녀에게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위탁모는 그 이유와 관계없이 아이들을 잘 맡아 키우는 게 할 일이다.
   
 2018년 4월, 위탁모 한희정씨와 다섯 번째 아이 한별이
 2018년 4월, 위탁모 한희정씨와 다섯 번째 아이 한별이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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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그녀를 만나 인터뷰를 할 때 그녀의 품에는 한별이가 안겨 있었다. 7년 차 위탁모 한희정씨의 다섯 번째 아이. 당시 그녀는 한별이와 일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위탁모를 해서 한 달에 받는 돈이 70여 만 원. 사실상 24시간 노동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직업으로 위탁모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녀에게 위탁모 일은 그저 마음을 주는 봉사다. 그녀 나이 올해 51세다.

안정된 직장에 가정적인 남편과 경제적 독립을 한 두 아이를 둔 50대의 전업주부가 편안한 일상을 접어둔 채 젊은 엄마들도 꺼리는 고된 육아를 왜 하느냐고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안 하면 할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갈수록 위탁모 구하기가 어렵다고 들었어요. 요즘 세상에 누가 돈은 안 되고 몸은 24시간 매어 있어야 하는 이런 일을 할까 이해도 돼요. 그래서 더 그만 둘 수가 없어요. 시간도 없고 취미 생활도 못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는 게 아깝지 않아요. 그런 생각이 들면 하루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거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아이를 돌보면서 아이가 행복해 하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좋은 가정으로 갔을 때의 행복감은 다른 것이 따라올 수 없어요. 이 일을 그만 둔다는 것은 제게는 그런 아이를 포기하는 것과 같아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이 일을 할 생각이에요."
     
일 년 전 이 말을 했을 때 한희정씨 품에 안겨 있던 한별이는 보통의 경우라면 평균 20개월 위탁 기간인 6개월 뒤 해외입양을 떠났을 것이다. 그녀는 또 꺽 꺽 소리 내 울며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품에는 여섯 번째 아이가 안겨 있을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우리는 도무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오만가지 이유로 부모 없이 홀로 세상에 남겨진 아이는 계속 생겨난다. 당장 닥치고 있는 문제는 그런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 줄 위탁모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한결 같이 따뜻한 품이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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