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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의 전기를 최초로 쓴 귀스타브 반 지트는 <요하네스 베르메르>(1925)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그의 삶을 모르고 오직 그의 작품으로만 알 수 있는 화가가 있다."

이 진술의 의도는 인간 베르메르에 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부차적인 이야기(정보)로 화가의 작품 세계를 풍성하게 구성할 수 없어 그의 작품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의미다. 가령 고흐 같은 경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삶의 행적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고흐 일생의 궤적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정보가 되어 관객들이 작품을 감상할 때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베르메르 삶은 베일에 싸여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메르는 렘브란트처럼 당대의 슈퍼스타도 아니고 특별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다. 평생 델프트를 벗어나지 않았고, 길드에 속한 전문화가로서 그림을 그렸지만 많은 작품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홀란드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졌지만 플랑드르 전역에서는 명성을 떨치진 못했다. 이러니 그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오직 세 가지다. 출생일자(1632년), 카나리나와의 결혼과 동시에 화가조합에 가입(1653년) 그리고 사망연도(1675) 뿐이다.

이런 캄캄한 세계에서 베르메르가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그의 사후 150년이 지나 토네 뵈르거라는 열혈 진보주의이자 미술평론가에 의해서다. 토네 뵈르거는 1848년 프랑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가담했다가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벨기에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평론가 및 전시기획자로 변신한다. 뵈르거는 잊혀진 화가 베르메르를 발굴하여 널리 알리고 전 유럽을 뒤져 작품의 소재를 밝혔다.
 
 베르메의 작품 '델프트 풍경' <출처: 위키피디아>
 베르메의 작품 "델프트 풍경" <출처: 위키피디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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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르거 덕분에 국제적 스타가 됐지만 그의 작품은 이미 전세계에 흩어져 일목요연한 감상은 힘들게 되었다. 오죽하면 그가 활동했던 델프트에서조차 그의 작품을 단 한 점도 구경할 수 없지 않은가. 베르메르는 그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 오히려 신비화되었고 그의 작품에 대한 시비도 그치지 않았다. 뵈르거가 베르메르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던 117점은 세월이 지날수록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밝혀지는 바람에 숫자가 점점 줄어 현재는 37점만이 베르메르의 진품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베르메르의 작품 세계는 너무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미술전공자도 아닌 필자가 첨언하는 건 우물물 한바가지 퍼서 도도한 강물에 보태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미학과 도상학적 해석은 미술 전공자들이 쏟아놓은 말의 잔치만 주워 담아도 소화불량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몇 개의 작품에서 지극히 협소한 시각으로 특정한 내용을 덧붙이는 일뿐이다.

베르메르의 명성에 한동안 공백기가 있던 탓에 소문과 억측 그리고 엉뚱한 사건이 지난 백년 간 끊이지 않았다. 베르메르를 논쟁의 한복판으로 끌고 간 몇 가지 화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렘브란트와의 관계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다. 두 사람은 한 세대 차이가 나지만 네덜란드 황금기 시절을 공유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두 사람의 그림에서 시대를 읽고 역사를 떠올린다. 그런 다음 그 시절의 영광을 음미한다. 그만큼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이 둘은 문화적 자존심의 원천이다.

몇 년 전 영국 BBC 방송에서 <파워 오브 아트>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여기서 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가 누구인가를 놓고 전문가들끼리 토론을 하고 청중들이 투표하는 이벤트까지 했다. 화풍과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을 대놓고 우열을 가리는 건 대중들의 호기심에 편승한 천박한 이벤트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렘브란트와 베르메르, 이 둘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때로는 각자, 때로는 함께 묶여서 대중들에게 호출되었다. 혹시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있다. 암스테르담과 델프트 사이 거리가 그리 멀리 않고, 화가로서의 활동 기간이 20년 정도 중복되는데 작품 제작은 대부분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러니 거장들끼리 잠깐이라도 만나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추측성 주장을 접하다보면 대중들의 무의식 속에는 베르메르가 렘브란트의 제자였으면 하는 소망이 잠재돼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가? 베르메르가 렘브란트의 화실에 직접 지도를 받은 제자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고 화풍을 이어받으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인가. 사람들은 그게 꼭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그런 쪽으로 몰아가고 싶어 한다. 대중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문비평가들도 틈만 나면 이 둘을 엮으려고 하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베르메르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진주 귀고리 소녀'<출처: 위키피디아>
 베르메르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진주 귀고리 소녀"<출처: 위키피디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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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시작은 앞에서 얘기했듯 베르메르를 발굴한 뵈르거였다. 그는 렘브란트가 탕자로 분해 부인 사스키야를 무릎에 앉히고 술을 마시는 그림과 베르메르의 작품 '뚜쟁이'를 비교해 구도와 화풍이 비슷하다며 베르메르가 렘브란트에게 배웠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가 더 우세해졌다. 무엇보다 베르메르가 포착한 빛이 렘브란트와 전혀 다르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빈약한 자료 때문에 베르메르의 화풍이 어디서 유래하고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만, 베르메르의 독창성만큼은 어느 누구 유파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이라는데 동의한다. 굳이 유추하자면 당시 델프트에 살았던 레오나르드 브라메르라는 이류 화가에게 그림을 배웠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귀스타브 반 지프),

베르메르의 스승은 누구였을까? 이 명제는 호사가들의 입에 끊이지 않는 화제였지만 대중의 호기심과 입맛에 맡는 결론은 끝내 이끌어내지 못했다. 여기서 필자가 할 수 있는 건 베르메르 전기의 선구자인 귀스타브 반 지프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화제를 마무리할 뿐이다.

"베르메르는 누구도 닮지 않았다. 그는 당대 홀란드 미술과 뿌리부터 다르다. 단지 작품의 표현과 스타일과 시각만이 아니라, 솜씨에서도 그렇다. 그는 정말 자신이 열광적으로 그린 개성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들을 끌어냈던 것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자신만의 시선과 사고 외에는." 

2. 카메라 옵스큐라의 사용

카메라로 보는 프레임은 인간의 시선과 다르다. 인간의 시선은 대상에 초점을 맞춰 시각적 정보에 우열을 주는 데 반해 카메라는 프레임 내부에 우열을 두지 않고 균질하게 사물을 표현한다. 따라서 카메라의 프레임이 인간의 시선과 마찰을 빚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시야를 제공할 때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17세기 화가들이 처음 카메라 옵스큐라를 봤을 때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시각적 정보에 환호를 하며 이를 화폭에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솟구쳤다.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소형 암상자 앞에 렌즈를 달아 상자 안 은판에 상이 맺히도록 하는 광학 장치다. 이것이 훗날 카메라로 발전한다. 17세기에는 실용 과학이 활발하게 발전할 때였다. 베르메르의 친구로 여겨지는 레벤후크가 두 개의 렌즈를 이용해 현미경을 최초로 발명했다. 당시 화가들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화면의 구도를 잡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일반화되기는 베르메르 보다 수 년 뒤의 일이다. 어쨌든 베르메르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카메라 옵스큐라는 있었다. 그런데 베르메르의 작품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로 보는 것 같은 구도가 잡힌다는 것이다.
 
 카메라 옵스큐라 <출처: 위키피디아>
 카메라 옵스큐라 <출처: 위키피디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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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의 작품이 얼핏 보면 세밀한 묘사와 정교한 표현에 집중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충 찍어 바른 것 같은 점묘가 제법 보인다. 작품 <빨간 모자를 쓴 소녀>에서 손과 의자,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귀고리가 대표적인 예다. 살짝 찍어바른 점묘에도 불구하고 전체 그림에서 정밀하게 표현되는 건 구도에 오차가 없기 때문이다. <사관과 웃고 있는 소녀>에서 사관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느껴지는 것도 카메라 옵스큐라 영향이라고 한다. 점묘적 표현은 훗날 인상파에게 영향을 줘 어떤 미술사가는 베르메르가 인상파의 원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베르메르는 일부러 원근법을 무시하며 화면의 간결함을 추구했는데 이는 카메라 옵스큐라로 구도를 잡는다면 나올 수 없는 배치라고 한다. 고바야시 유리코에 따르면 작품 <우유를 따르는 여인>에서 빵과 항아리가 놓여 있는 테이블이 실제보다 왜곡되어 있는데 정확한 투시원근법에 따르면 우유는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또한 작품 <연애편지>도 화가가 의도적으로 화면을 세로로 삼등분하여 두 여인과 배경 그림을 주목하게 만들었는데 카메라 옵스큐라로 구도를 잡았으면 그림이 훨씬 길어지거나 아니면 인물이 작게 그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  <출처: 위키피디아>
 우유를 따르는 여인 <출처: 위키피디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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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관과 웃고 있는 소녀 <출처: 위키피디아>
 사관과 웃고 있는 소녀 <출처: 위키피디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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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베르메르가 카메라 옵스큐라에 의지했는지 아닌지의 진실 여부보다, 화가의 창작 의도와 작품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작품에 따라 카메라 옵스큐라의 상과 일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이를 배제하고 회화적 조작을 한 것도 있다. 이는 작품의 주제나 모티프에 따라 화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그래, 이번 작품은 카메라 옵스큐라 구도로 하는 게 낫겠어. 아냐 이번에는 내가 생각하는 구도에 따르겠어. 혹은 카메라 옵스큐라에 따라 그려놓고는 나중에 덧칠하면서 구도를 변형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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