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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월, 우리 가족이 일주일 동안 머문 네덜란드 인상기다. 짧은 여행이라 영혼을 깨우는 깊은 통찰은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무뎌진 감각을 꼬집어 잠자는 감성 정도는 일깨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씁니다. - 기자말

사실 에라스무스의 저서는 현대를 사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쉽게 공감하기 힘들다. 에라스무의 작품은 패러디(풍자와 해학)가 독법(讀法)의 프레임이다. 재치와 비꼼과 촌철은 그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언어의 속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콘텍스트의 이해가 없거나 배경 지식을 장착하지 않고 읽으면 이해 불능이거나 가능하더라도 울림이 없다. 아우라가 없는 메시지로서만 읽게 될 때 독자는 지루해진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에라스무스의 저서가 많이 읽히지 않는 이유다.

그래도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라틴어 문구가 있으니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 등이다. 이들이 <격언집>에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전쟁은 겪어보지 않은 자에게나 달콤하다 dulce bellum inexpertis'라는 문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남북한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우리 사회 일곽에서 '전쟁 불사'를 외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떠올리는 라틴어 격언이다.

문제는 이런 자들이 전쟁 나면 가장 먼저 도망갈 태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아르킬로키아 에딕타Archilochia edicta>를 격언집에서 떠올려야 한다. 아르킬로스는 그리스의 서정 시인으로서 당시 전사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지키는 방패(명예) 때문에 죽는 것을 보고, 싸움이 불리할 땐 방패 따윈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놓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군사제일주의를 멋지게 풍자했던 그가 정작 자기 처가 식구에게는 독설을 퍼부어 자살까지 이르게 만들었다고. 이런 이유로 악의적 표현을 일삼는 자를 '아르킬로스의 발언'이라고 했다(<에라스뮈스와 친구들>,김태권).

베스트셀러 지식인으로 행복한 인생을 즐겼을 것 같은 에라스무스지만 종교개혁의 광풍에 휩싸이게 되며 순탄치 않은 삶을 맞이하게 된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시작된 반가톨릭 운동은 전유럽을 휩쓸면서 가톨릭 세력과 격렬한 대립을 했다. 유명인사인 에라스무스를 이용하고자 가톨릭과 신교 양쪽에서 모두에서 에라스무스가 자기들 편이라고 주장한다.

에라스무스는 로마교황청이냐 루터파냐의 이분법 구도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벨기에 루뱅에서 대학교수로 있던 에라스무스는 이런 상황을 못 견뎌 교수직을 내던지고 스위스 바젤로 숨는다. 숨는다고 해결이 되는 건 아닌지라 극단적 이해관계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시달리던 에라스무스는 1529년(55세)에 독일 프라이부르그로 이주한다.

에라스무스는 구교와 신교 어느 쪽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가 우려한 건 극단적 주장이 가져오는 사회적 혼란이었다. 그의 우려대로 서유럽은 종교전쟁이 벌어져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된다.

일부에선 에라스무스를 줏대 없고 기회주의자로 폄하하기도 했지만, 격언집에 나와 있듯이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진 않는다una hirundo non facit ver'가 그의 본심였지 않았을까 하는 게 후대 지구촌 어느 구석에서 날아온 서생의 생각이다.

후반기 곤고한 삶의 역정을 보냈던 에라스무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며 생을 맺는다. 52살 때, 라인강을 따라 여행하고 있던 에라스무스는 보파르트에서 자신의 책을 읽고 있는 세관원을 보고 반가워서 말을 건넨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쓴 격언집이 소도시 하급관리에게도 읽히는 걸 보고 가슴 벅찼던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교분을 나눈다.

에라스무스는 세관원 에센펠더에게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했다. 에센필더는 에라스무스가 해석한 <구약성서> 시편의 구절 하나를 뽑아 이에 대한 생각을 글로 남겨주길 원했다. 에라스무스는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으나 격동의 세월 속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8년의 세월이 흘러 죽음을 앞둔 70세의 에라스무스는 그때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글을 써서 에센필더에게 헌정했다. 교황도 신교 지도자도, 왕도, 귀족도 아닌 평범한 하급관리를 위해 펜을 든 에라스무스는 애초에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글을 썼던 그의 작가정신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에라스무스는 숨을 거둔다.
 
 에라스무스 다리.
 에라스무스 다리.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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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강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에라스무스 다리를 왕복하고 보니 제법 다리도 아팠다. 발길을 다시 중앙역으로 향하다 용변도 해결할 겸 맥도날드에 들렀다. 유럽은 화장실 인심이 후하지 않아 상업시설을 이용하면서 해결하곤 한다.

화장실이 귀할 뿐만 아니라 툭하면 유료여서 공공시설을 무료로 이용하던 우리의 습관으로 볼 때 왠지 야박해 보인다. 아니 어쩌면 우리네 화장실 인심이 너무 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50센트유로지만 파리에서는 1유로까지 하는 곳도 있었다. 세상에, 소변 한 번에 1300원이라니! 차라리 방광 터지고 말지, 얼굴을 찡그리며 끝까지 참던 아내였다.

중앙역으로 돌아오니 5시 경이었다. 암스테르담 행 열차에 오르니 피곤이 몰려왔다. 기차가 출발하자 설핏 기운 해가 유리빌딩을 빨갛게 색칠하고 있다. 로테르담을 일별하면서 본 개성 만점 건물들에 서열을 매기자면 단연코 큐브하우스가 맨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참외처럼 샛노랗게 매달린 큐브 열매, 로테르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풍경일 것이다.

기차가 출발한 지 십오 분 정도 되자 델프트 역에 정차했다. 갑자기 집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내리자! 한다. "우리가 언제 또 오겠어." 아내는 홀린 듯 입구로 나갔다. 아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와 딸도 따라 내렸다.

델프트에서 내리다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직 아워'라는 용어가 있다. 여명이나 석양 무렵 빛과 어둠이 서로의 자리를 내주고 섞이면서 채도가 낮은 광경을 연출한다. 여명에는 연한 복숭아색이 빛의 알갱이 속에 스며있는 것 같고, 낙조에는 푸르스름한 색이 세상에 내려앉는 느낌이다(나의 주관적 느낌). 세상에 필터를 끼우는 것 같은 이 색감에 매혹돼 많은 사진가들이 이 시간대를 즐겨 찾는다. 내가 델프트를 만난 건 허파에 코발트블루빛 공기가 가득 차게 되는 매직 아워 시간이었다.

델프트 역에서 중심지인 광장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린다. 광장에 도착하니 5시 30분경, 해가 설핏 기울며 어스름해졌다. 델프트 역시 물의 도시라서 운하가 거미줄처럼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소도시의 운하는 동네를 흐르는 개울처럼 친근하면서 운치가 있다. 집들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풍으로 좁은 면에 기다란 창을 가진 세로 주택이 나란히 붙어 있다.

가파른 박공지붕과 집집마다 다른 벽돌색이 모자이크화를 보는 것처럼 시선의 분주함을 유도하는데, 이 분주함은 피로감이 아닌 생경한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암스테르담보다 규모가 작은 주택들이 나란히 붙어 마치 레고블록처럼 아기자기한데, 집들이 운하에 비치니 마치 커다란 요술경을 보는 것처럼 신기하기조차 하다. 한마디로 현실 속의 동화나라 같다. 집사람과 딸아이도 연신 '예쁘다'란 말을 내뱉는다.
 
 델프트 옛 시청
 델프트 옛 시청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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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시청 앞 마르크트 광장으로 가니 매일 서는 장(場)은 철수하는 중이고 유적지는 굳게 문이 닫혔다. 바로크풍의 화려한 옛 시청 외관을 보면서 과거의 영화가 남달랐음을 짐작할 뿐이다.

그때 광장 한 구석에 관광안내센터가 보였다. 여섯 시가 다 돼 종종걸음으로 갔다. 중년여성(직원) 두 명이 마악 문을 닫으며 나오고 있었다. 익스큐즈 미, 하면서 안내지도를 얻을 수 있냐니까, 친절한 미소와 함께 근무시간이 지나서 줄 수가 없다고 한다. 거참, 문 열고 안내 창구에 쌓여 있는 종이 하나 꺼내면 될 텐데…. 조금 얄밉기도 하다.

그래도 어떡할 것인가, 그들의 생활 문화인 걸.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항용 떠올리듯 공공기관(관광안내센터에서 일하니 공공기관 소속일 거라 추측)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장삿집에서도 그러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가늠이 잘 안 된다. 부자든 빈자든 관료든 학자든 모든 사람의 행동양식이 돈벌이에 포섭된 한국인의 의식구조로선 도무지 이해 못할 장면에 맞닥뜨리게 되니 외려 우리가 당황하게 된다.

광장 입구에 예쁜 도자기를 진열 해놓은 가게들이 있다. 그중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려다가 일단 시청과 유명한 교회부터 보고 오려고 돌아섰다. 시간이 급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시청과 교회는 문이 닫혀 외관만 둘러보고 다시 가게에 왔다. 가게 주인도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쇼윈도 밖에서 우리가 구경하는 걸 뻔히 보면서도 주인은 조명을 확 꺼버린다.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으며 '쏘리, 우리 퇴근해야 돼~.' 하는 눈빛을 보낸다. 약간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우리나라 가게 같으면… 이들이 잘못 된 건지, 우리가 잘못 된 건지. 잘잘못을 따지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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