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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가보고 싶었다. 들어가면 죽어서도 나올 수 없었다는 곳, 소록도. 작은 사슴을 닮은 모습이라 '소록(小鹿)'도라 불렸지만, 어여쁜 이름과는 달리, 한센인들에 대한 인권 탄압의 역사가 아프게 얼룩진 곳이다.

왜 소록도를 오고 싶었는지는 명쾌히 설명하기 힘들다. 연원을 찾자면, 어릴 적 공포로 왜곡된 채 저장된 한센인들에 대한 기억일 테고, 젊을 때 읽었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도 아련히 남아 있긴 했다. 그리고 최근에 읽은 정창권의 <근대 장애인사> 속 한센인들에 대한 기록이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데 일조했다고나 할까.

소록도에 대한 단상
 
 20대 때 나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도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없었다. 어느 섬에서 벌어진 인권 탄압의 현장을 가공한 이야기로만 알았고, 그 현장이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곳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재했던 소록도라는 걸 알게 된 건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도 아주 오랜 뒤였다. (사진은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표지)
 20대 때 나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도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없었다. 어느 섬에서 벌어진 인권 탄압의 현장을 가공한 이야기로만 알았고, 그 현장이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곳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재했던 소록도라는 걸 알게 된 건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도 아주 오랜 뒤였다. (사진은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표지)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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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엔 계란을 팔러 다니던 아저씨가 있었다. 그 아저씨가 파는 계란이 속칭 '문둥이 마을'에서 나오는 거였다. 아저씨와 계란을 경계하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에, 어린 나는 계란을 파는 아저씨와 '문둥이 마을'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대체 산동네 깊은 곳에 있다는 '문둥이 마을'은 어디이며, '문둥이'란 누구를 이르는 것일까.

어릴 적 영화 제목은 기억에 없지만, 예수가 나환자들에게 세례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후드를 쓴 채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드러나는 몸의 대부분은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들을 금기시하는 이유가 이들이 싸매고 감추고 있는 곳의 음험함 때문이라고 막연히 짐작했던 것 같다.

대체 사람들이 왜 저들을 두려워 하느냐는 내 질문에, '문둥병' 때문이라는 답을 엄마였는지 아버지였는지에게서 들었다. 한센병이 '무섭고 나쁜 병'이라는 왜곡된 원형을 가지게 된 시작이었다.

20대 때 나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도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없었다. 어느 섬에서 벌어진 인권 탄압의 현장을 가공한 이야기로만 알았고, 그 현장이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곳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재했던 소록도라는 걸 알게 된 건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도 아주 오랜 뒤였다. 내게 소록도와 한센병은 그렇게 비가시화돼 있었다.

가족여행으로 순천만을 가보기로 하고 하루는 고흥에 가보기로 작정하자, 소록도가 떠올랐다. 굳이 '다크 투어리즘'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냥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근대 장애인사>를 읽다, 어릴 적 한센병에 대한 어두운 기억이 길어올려졌기 때문일 텐데, 부끄럽고 미안했기 때문이리라.

소록도에 들어서자 남편은 어릴 적 기억을 꺼내 놓았다. 어렸을 때 한센인들을 직접 보았다는 남편은 한센인들을 가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던 존재로 기억하고 있었다. 왜 그들을 만나게 됐는지는 잊었지만, 어린아이의 간을 꺼내 먹는다는 둥 온갖 괴담의 주인공들인 한센인들을 대면했던 장면은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고 했다.

그 시절 기억에 멈춰 있던 남편은 황당하게도 여전히 한센병이 유전 된다고 믿고 있었다. 나와 딸이 그렇지 않다고, 바로 그 부분이 한센인들에 대한 인권침해의 수단이 됐다고 강하게 반박했지만, 믿지 않았다. 그의 믿음이 무너진 건 소록도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부터다. 한센병이 아직도 유전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남편뿐일까.

소록도 곳곳에 스며 있는 한센인들의 아픔
 

다리(소록대교)가 놓여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소록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소록도에서 바라본 바다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감금된 한센인들에게는 어땠을까. 수탄장(월 1회 한센병 환자가 가족을 면회하던 곳)에 들어서는데 소록도 탐방을 하는 한 무리의 방문객들과 마주쳤다. 소록도 해설사가 설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날이 더우니 평소보다 간략히 설명하겠노라고 했다. 은근슬쩍 무리에 끼어들어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소록도 감금실  한센인들을 가두던 곳. 동절기, 마루를 들어내 물을 채운 후 얼려 추위에 약한 한센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 소록도 감금실  한센인들을 가두던 곳. 동절기, 마루를 들어내 물을 채운 후 얼려 추위에 약한 한센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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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시실에 보존 중인 해부대  검시실 또는 해부실로 불리는 곳에서 사망한 한센인들을 해부했다.
▲ 검시실에 보존 중인 해부대  검시실 또는 해부실로 불리는 곳에서 사망한 한센인들을 해부했다.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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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사는 검시실과 감금실로 짐작되는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로 무리를 안내했다.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보려니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은 평생 '세 번 죽는다'(한센병에 걸리면서, 죽어 해부 당하면서, 해부 당한 몸이 화장 당하면서)는 해설사의 설명이 덧붙여졌다.

검시실은 사망한 한센인들이 검시를 위해 해부를 하던 곳이다. 돌로 만들어진 해부대가 보존 중이었다. 홈이 파져 있는 부분으로 해부 시 나오는 피를 흘려 보냈다는 해설사는 설명은, 존엄한 죽음이 한센인들에겐 예외였음을 알려주었다.

소록도의 감옥인 감금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수용자들을 길들이기 위해 징벌로 가두던 곳. 형무소와 유사한 H형은 감금실의 목적을 증명하고 있다. 추위에 약한 수감자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마루 아래 물을 넣어 얼릴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감금실을 보자,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한센인들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일제의 잔혹함을 전달하려는 해설사의 설명이 절절했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 한센병이 급증했다.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괴담이 돌자, 한센인들에 대한 민심이 더욱 각박해졌다. 주로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던 한센병원들은 1935년 일제의 '조선나예방령'으로 강제 수용이 법제화된다. 이때부터 총독부에 위한 한센인 관리가 철저히 이루어지며, 한센인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심각히 자행된다(<근대 장애인사> 참고).
 
소록도 이춘상 의인 기념판  한센인 이춘상이 일본인 스오 원장을 죽인 의거를 기록한 기념판
▲ 소록도 이춘상 의인 기념판  한센인 이춘상이 일본인 스오 원장을 죽인 의거를 기록한 기념판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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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가 아닌 격리가 목적이던 소록도 갱생원은 강제 수용과 함께 강제 노역이 이루어졌다. 몸이 성치 않은 한센인들에 의해 조성된 중앙공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들의 신역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인권 탄압에 분노한 젊은 한센인 이춘상이 가장 악랄했다는 일본인 스오 원장을 죽인 거사를 기린 안내판이 있었다.

당시 이춘상은 27세의 청년이었다. 그의 거사는 일제에 항거한 의사로 지정되지 않았는데, 의사자 지정 과정에서 이춘상이 한센인으로 알려지면 가문에 불명예가 될 것을 우려해 가족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센병에 대한 낙인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절감하게 한다.

소록도 갱생원에 세워진 건물들은 대부분 붉은 벽돌로 탄탄히 지워져 있다. 소록도에는 1933부터 벽돌 공장이 운영됐는데, 여기서 구운 벽돌을 팔아 소록도 갱생원을 유지했다고 한다.

더 많은 벽돌 생산을 위해 한센인들은 어떤 보호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식지도 않은 벽돌을 나르며 모진 노역을 당했다. 통증을 느끼는 감각을 상실한 한센병 환자들에게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벽돌을 나르게 한 것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통증을 느낄 수 없는 몸을 어떻게 돌보겠는가.

이뿐인가. 한센병이 유전이 된다고 믿었던 일제는 한센인들의 자손이 태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수용인들에 대한 강제 단종과 낙태수술을 강행했다. 그럼 해방이 된 후 우리 정부는 어땠을까? 소록도 병원에서는 1990년대까지 동거하는 부부에게 원칙적으로 정관절제 수술을 받게 했다.
 
소록도 구라탑  오마도 간척공사에 참여한 국제워트캠프 단워들이 한센병이 근절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조성한 기념탑
▲ 소록도 구라탑  오마도 간척공사에 참여한 국제워트캠프 단워들이 한센병이 근절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조성한 기념탑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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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공원에는 흰색의 '구라탑'이 있는데, 탑의 '구라(求癩)'란 나병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와 이 탑을 세운 이들의 이름이 탑에 새겨져 있다. 이 탑은 일제와 무관한 '오마도 간척사업'을 배경으로 하는데,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는 시종일관 열성이던 해설사는 웬일인지 이 탑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일제만 한센인의 인권을 유린한 것이 아니다

오마도 간척사업은 일제가 아닌 한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일이다. 대한변협은 '권력이 사회적 약자였던 나환자들을 착취 유린한 대표적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소록도 한센인들은 바다를 메워 농지가 생기면 정착촌을 짓고 자활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맨손으로 간척사업에 투입됐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나환자들이 소록도에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한 소록도 밖 주민들은 한센인들의 오마도 간척사업에 결사반대한다. 당시 공화당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주민들의 편에 섰고, 한센인들은 거의 다 만들어진 오마도 간척지를 빼앗겼다. 이것이 한국 정부가 한센인을 대한 방식이다. 한센인을 반인권적으로 배제 소외시킨 일제의 정책과 무엇이 다른가?

오랜 식민지에서 나라가 해방됐어도 한센인들은 해방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한센인들을 여전히 감금된 채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일제가 한센인들을 인권침해한 사실을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이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 도쿠다 변호사였다는 것은 무엇을 함의하는 것일까? 도쿠다 변호사의 노력은 한국 변호사들을 자각시켰고, 이후 '한센병 소록도 보상청구 한국 변호단'을 꾸리게 했다고 한다.

일제는 식민지 국민인 조선인을 2등민으로 내면화시켰다. 이중 장애인이나 전염성이 강한 한센인들은 3등민 혹은 비인간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소록도 갱생원은 계속 유지되며 한센인들의 인권을 유린했다. 일제의 탄압만 가시화하고, 이후 한국 정부에 의해 계속 자행됐던 인권침해를 말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소록도 방문을 끝내고 소록대교를 건너며, 남편은 이렇게까지 한센인들에 대한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 당했다는 것을 알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어릴 적 연민과 공포가 뒤섞인 한센인들에 대한 기억이, 조작, 왜곡으로 얼룩진 것이라는 진실 앞에 불편해지지 않으면 이상한 일 아닌가. 남편은 그제서야 한센병이 유전이 된다는 오래된 믿음을 무너뜨린 듯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근대 장애인사 - 장애인 소외와 배제의 기원을 찾아서

정창권 (지은이), 사우(2019)


당신들의 천국

이청준 (지은이), 문학과지성사(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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