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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톡톡이 공개한 '스텔싱 예고' 댓글들. 낙태죄 헌법불합치 소식을 알린 기사에, 일부 네티즌들이 "강제 임신을 시키겠다, 100명이 목표"라거나 "싸튀(스텔싱을 의미하는 인터넷 용어)도 합법적"이라는 댓글을 남겼다.
 국회톡톡이 공개한 "스텔싱 예고" 댓글들. 낙태죄 헌법불합치 소식을 알린 기사에, 일부 네티즌들이 "강제 임신을 시키겠다, 100명이 목표"라거나 "싸튀(스텔싱을 의미하는 인터넷 용어)도 합법적"이라는 댓글을 남겼다.
ⓒ 국회톡톡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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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여성의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여성의 인권과 태아의 생명권 사이의 대결 구도로 프레이밍된 기존의 논의 수준을 일보 전진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이 대중, 학계, 정치권에 흘러넘쳤다.
 
그런데 남성 이용자 중심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엉뚱한 반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낙태죄가 폐지됐으니, 콘돔에 구멍을 뚫겠다'는 식의 예고글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낙태죄가 사라진 세상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경기를 일으켰다. 법의 이름으로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을 처벌할 수 없다면, 자기 차원의 복수로 여성들을 처벌하겠다는 무시무시한, 남성중심적 생각을 부끄러움도 없이 내비쳤다.
 
스텔싱이 무엇이길래, 낙태죄가 사라진 세상에서 남성들의 마지막 자가 처벌 수단이 된 것일까?
 
침대라는 치외법권
 
'스텔싱'(stealthing)은 성관계 중 상대방과의 합의 없이 몰래 피임기구를 제거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 피임기구는 주로 콘돔이고, 행위자는 그래서 주로 남성이 된다. 레이더 등에 탐지되지는 않도록 위장하는 군사 기술인 '스텔스'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스텔싱은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한국의 법체계 안에선 아직까지 폭력도, 범죄도 아닌 것으로 규정된다. 그저 '기분 나쁜 섹스'의 일종으로 여겨지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텔싱은 원치 않는 임신 혹은 성병 감염 등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신체와 정신에 대한 명백한 폭력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남성 파트너에게 스텔싱을 당했다'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낙태죄 폐지 이후 '스텔싱을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일부 남성들도 있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스텔싱이 공론화 되기 시작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스텔싱 관련 처벌 법안을 마련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올라왔으며, 3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동의 의사를 표했다(링크). 또, 법안 제안 플랫폼인 '국회톡톡'에서도 비슷한 요청이 등장해 1800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링크). 이에 국회톡톡 측은 관련 법안을 발의할 의원이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법제사법위원회와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중 누구도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일부 의원실에서 "스텔싱은 (형사처벌 과정에서) 증거로 입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는 답변을 내놓았을 뿐이다.
 
우리가 성행위를 하는 동안 침대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 된다. 극도로 사적이고 극도로 개인적인 이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법적으로 다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성, 비밀성, 은폐성 등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성적 상황에서 교묘하게 발생하는 폭력을 범죄화하는 게 어려운 이유다. 입법 책임자들 모두가 이 법안을 외면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콘돔을 쓰는 섹스에만 동의했다
 
 콘돔
 콘돔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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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텔싱을 범죄로 인정한 선례가 분명 존재한다. 캐나다와 스위스, 그리고 독일에서는 각각 2014년, 2017년, 그리고 2018년에 스텔싱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이들 나라에서 스텔싱을 성범죄로 규정했다고 볼 수 있지만, 각국이 범죄의 수위를 이해한 방식은 달랐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캐나다에서는 이를 강간죄로 처벌했다. 하지만 바이스와 로이터 등에 따르면, 스위스 재판부는 2017년 1월 1심에서 이를 강간으로 인정했으나 2017년 5월 2심에선 죄목(강간→더러운 행위, rape→defilement)이 바뀌었다(관련 링크). 이 지점은 스텔싱을 성범죄로 해석할 때에 그 결과에 대한 법조계의 의견이 여전히 분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전문가들은 스텔싱은 '명백하게 강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강간에 근접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섹스를 하기로 동의했기 때문에 강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스텔싱을 둘러싼 온도 차는 성관계에서의 '동의'라는 개념을 재고하게 한다. 성적 관계에서 공유된 모든 동의는 '조건부 동의'를 의미하고, 여기에서 말하는 조건이란 '상호 합의 하의 안전한 피임'이다. 스텔싱, 즉 선결 조건이 무너진 이후의 동의를 진정한 '동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스텔싱을 강간으로 정의할 수 있느냐는 논쟁보다 우선 집중해야 할 것은, 스텔싱 성범죄를 입법화하고, 피해자들에게 피해를 설명할 수 있는 법적 언어를 주는 것이다. 스텔싱을 성범죄로 설명할 수 있는 법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분 나쁜 섹스' '안 좋았던 섹스' '배신당한 섹스' 등으로 정리되고 말 것이다. 즉, 피해에 대한 분명한 감정이 그저 기분의 문제로 치부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불쾌한 섹스'가 아니라 범죄다
 
스텔싱은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늦게 깨닫거나, 아예 깨닫지 못할 수도 있기에 악독하고 중한 범죄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기회조차 빼앗는다는 점에선 더 잔인하다. 스텔싱은 표면적으론 성관계에 대한 '동의' 이후에 발생하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폭력으로 규정되지 않아 왔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성적 권력을 이용한 남성들의 폭력이 점점 더 교묘하고 비밀스럽게 진화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영리하게 진화하는 성폭력 앞에 맞서려면, 우리 법이 더 예민해지고 촘촘해져야 한다. 지금은 스텔싱을 성범죄로 설명할 수 없는 법적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텔싱은 반드시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한국은 성에 관해 솔직하게 질문하고 진지한 대답을 듣는 것 자체가 거의 투쟁인 사회다. 극도로 사적인 영역으로 여겨지는 섹스에 대해 공적으로, 정치적으로 논하지 않는다면,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폭력을 구분해내고 범죄를 구분해낼 수 없다.

섹스와 관련된 '불쾌한' 경험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단 불쾌하다면, 의심하자. 성범죄가 늘 물리력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동의' 이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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