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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모이> 중 한 장면.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 오른쪽)과 '까막눈' 김판수(유해진 분).
 영화 <말모이> 중 한 장면.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 오른쪽)과 "까막눈" 김판수(유해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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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갖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간 우리말 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었는데 영화 속에서 유해진(김판수 분)은 '까막눈'으로 나온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하는데 전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라 편지나 서신이 오면 아들 덕진에게 의존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말모이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에게 1달 내로 글을 다 떼라는 지시를 받는다. 늦은 나이, 게다가 공부와 담을 쌓았으니 그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래서 배우고, 배우고, 때로는 혼나고... 수차례 ㄱ,ㄴ,ㄷ 부터 계속 반복한다. 잊어버리면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자책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간판을 하나하나씩 읽어내려가더니 결국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당시 영화를 보면서 필자가 어쩔 수 없이 수험 영어를 해야 했던 상황에 놓였던 것이 기억났다. 필자도 영어 단어가 너무나도 고통이었었다. 늘 시험을 보고 나면 잊어버리기 십상이었다. 수도 없이 자책하고 그만둘까 고민했었다. 그러던 중 학원강사가 해 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월요일 단어 시험 본 것 다 기억나요? 당연히 기억 다 안 나요. 그래서 계속 보아야 해요. 본인이 시험을 보는 전날까지 계속. 물론 안 외워지는 단어는 끝까지 외우기 힘들어요. 급하니까 손으로 써서 외우지 않나요? 물론 쪽지시험 보니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쪽지 시험 후 다시 잘 안 보니 당연히 잊어버리죠. 100개 외웠는데 80개 기억하고 20개 잊어버려서 시험치기 전날까지 노력하는 것이 좋아요? 아님 20개만 기억나고 80개 계속 잊어버린 채 시험장 가는 것이 좋아요? 본인은 지극히 정상이에요. 계속 봐요. 계속. 마지막까지. 날 믿어요. 당신은 지극히 정상인이에요."

그래서 속는 셈 치고 매일 열어서 보았다. 책상에서 엎드려 자다가도 열어서 보고 안 외워지면 중얼거리기도 해 보았다. 지겨우면 책 뒤에서부터 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단어책을 보다가 방에다 신경질이나 던져버린 날도 있었다. 도대체 해도 해도 그날이 그날 같고 끝이 없어 보여 욕을 한 무더기 바닥에다 뱉기도 했다. '뭐라도 들어 와 있겠지', '끝은 나겠지', '적어도 바보가 아니겠지'라는 자조도 했다. 

5회독, 10회독, 20회독... 횟수가 쌓이면서 조금씩 모르는 단어 숫자가 줄어갔다. 혼동이 오는 단어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보는 속도도 빨라졌다. 하루 종일 보아도 절반 조금 더 보았는데 컨디션이 좋으면 몇 시간이면 다 볼 수 있는 속도로 올라왔다. 어쨌든 시험 보기 전날까지 단어장을 손에 놓지 않았고 100%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쉽지만 이 정도면 괜찮네. 후회는 없어'라고 말하고 시원섭섭하게 추억 한 켠으로 털어냈다. 

'우리 아이는 못 외워'라는 허상

영화 이야기와 사담을 섞어서 한 이유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의 학자 에빙하우스가 이야기한 '망각의 곡선'을 봤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공부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아이들은 절대 바보가 아니니 희망을 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당시 강사님도 심하게 냉소적이었던 내게 아래의 그래프를 그리면서 설명해 주었다. 
 
에빙하우스의 기억력 곡선 단어 100개를 외웠다는 가정하에 그려보았다. 실제 저렇게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자책하는 아이들이 많다.
▲ 에빙하우스의 기억력 곡선 단어 100개를 외웠다는 가정하에 그려보았다. 실제 저렇게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자책하는 아이들이 많다.
ⓒ 장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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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녀들에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진리를 공부할 때만 예외를 둔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답답한 마음에 '너는 왜 맨날 까먹냐'고 핀잔도 준다. 하지만 예외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필자도 간혹 조카나 아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다이어트에 가까울 정도로 열심히 손으로 쓰면서 외우고 학원에 가서 단어 쪽지 시험을 보러 가는 장면이다. 다행히 조카는 학원에서 제시하는 항상 커트라인은 잘 넘겨온다.

문제는 다음 날이다. 특히 단어 학습은 휘발성이 강해 어제 잘 외웠다고 오늘 다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내일이면 더 심해진다. 당연한 현상이다. 영어는 엄연히 외국어다. 우리말에 비해 현저하게 사용 빈도가 떨어지는데 그것을 집어넣으려면 반복뿐이다. 당장 잊어버렸다고 아이들을 혼내야 할 것이 아닌 것이다. 

한 번은 가족들이 모인 자리였는데 누나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조카가 단어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 다음 날이면 거의 다 잊어버려서 자책하는 것 보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부모 마음이야 똑같고 대학 입시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어가 중요하다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조카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라고 누나부터 안심시켰다. 그리고 조카를 불러 앉혔다.

"삼촌이 물어보는데 널 혼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 괜찮아. 엄마 허락받았어. 혹시 학원에서 단어 시험 보고 나면 다음 날 어떻게 해?"

"그냥 다음 시험 볼 것 외워요. 시험 못 보면 남아서 외워야 해요."

    
아이 입장에서는 집에 빨리 가 쉬고 싶기 때문에 예상했던 답이었다. 결국 계속 '까먹고, 까먹고'를 반복하는 악순환이었던 것. 답답한 현실 속에서 전투를 벌이는 아이를 뒤로하고 누나에게 차분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어쩔 수 없긴 한데... 남으면 애가 속상하고 학원의 단어 시험은 잘 봐야 하니까 조카가 했던 방법 그대로 유지를 해 줘. 다만 아이한테 부담은 주지 말고 하루에 한 번 단어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보게 해. 하루에 다 못 봐도 상관없어. 계속 반복해서 다 보게 해. 일단 한 번 다 보면 그 다음부터는 속도가 붙어서 금방 봐. 학원 진도 상관 말고 그냥 시켜. 분명 조금씩 변화가 생길 거야."

"그래서 외워져? 써야 하는 것 아니야?"

의심이 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조급하니까.

"수능 보는데 수능에서 영어 단어 쓰라는 문제는 없어. 결국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잖아? 그럼 차라리 단어하고 뜻이 눈에 누가 더 많이 익었느냐 싸움이야. 계속 반복시켜. 그리고 단어장 이것저것 사지 말고 차라리 학원에서 쓰는 교재만 반복시켜. 이 교재가 좋다. 저 교재가 좋다 이야기에 팔리지 말고 속는 셈 치고 하나만 계속 반복해서 시켜 봐. 애 분명히 변해."

지금의 교육이 학부모들의 조급증을 부추기는 것은 맞지만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정상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예의는 아니지만 고집을 부렸다. 속는 셈 치고 진행했고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외우는 것이 덜 힘들다는 이야기를 건네 들었다. 나중에는 습관이 붙어서 쉬는 시간에도 짬짬히 보기 시작해 벌써 책을 어러번 반복 해 기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실 웃으면서 컨설팅 비용 안 주냐는 핀잔에 누나가 그때 짜증 내서 미안했다는 사과는 했지만.

해마다 느끼지만 새 해 1월 2일이면 가장 북적거리는 2곳이 있다. 한 곳은 다이어트를 위해 헬스장으로 대표되는 트레이닝 센터. 한 곳은 서점이다. 서점은 외국어를 공부하겠다 마음먹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책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내려놓는다. 시간이 없어서 못 하겠다는 이유도 많지만 그것만큼 대다수의 이유는 '외워도 외워도 잊어버려서 힘 빠진다'였다. 안타깝지만 비싼 책값만 허공으로 날린다. 

필자는 '이 책으로 공부하면 빨리 실력이 붙는다'라고 마케팅하는 회사들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뭔가 차별화가 없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실 어떤 책이든 내용은 비슷하다. 서점에서 펴 보았을 때 좀 더 내 눈에 편하게 들어오는 책, 좀 더 내 마음에 드는 책 차이이다. 

하지만 어떤 공부든 '요행은 없다'. 여러 번 봐야 하고 눈에 익어야 내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시험이든 합격한 사람들의 수기집을 읽어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다. 바로 '반복'이다. 특히 단어(또는 어휘) 암기 학습이 '반복의 최종 보스'인 이유가 지루하고 재미없고 쉽게 잊어버려 금방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당연하다. 그러니 '단어를 자꾸 잊어버려 큰일이에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습관을 붙여 단어를 오래 기억하게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어차피 '잊어버리니까'.

산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어차피 내려올 것 뭐하러 올라가요'라는 답변이다. 단어 암기를 하기 싫어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답변도 '어차피 잊어버릴 것 뭐하러 해요'라는 냉소 섞인 답변이다. 지금부터 '어차피 잊어버리니 반복하자'라고 생각해 보자. 단어 몇 자 바뀐 문장이지만 마음가짐 자체가 변할 수 있다.

말이 무서운 이유는 말을 뱉는 순간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말을 온 힘을 들여 말살하려는 이유도 말이 가지고 있는 '정신'을 이용해 완전히 우리를 세뇌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말모이>에서 그 때문에 숱한 고문을 버틴 이유도 일제가 언어를 이용해 정신마저 지배당하면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강사가 내게 해 주었던 말을 덧붙이자면 '다른 책 기웃거리지 말고 하나만 정해서 외울 것', '본인이 가지고 있는 단어장이 가장 좋은 책이라고 믿을 것'이었다. 혹시나 공부를 하려는데 자꾸 잊어먹는다고 고민하는 학생이 있다면 꼭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충분히 본인은 '정상'이니 포기하지 말고 여러 번 반복하면 어느 순간 열려 있다고. 다만 '포기하고 본인 머리를 탓하는 순간 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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