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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축제가 펼쳐지는 청도 프로방스.ⓒ 경북매일 자료사진
20대 초반 시절.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프랑스 배우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제목이 참으로 시적(詩的)이라며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난다.

밤이 낮보다 아름다운 곳은 또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에 자리한 '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장'이 바로 그곳. 앞서의 영화 제목처럼 말하자면 "아이들의 밤은 어른들의 낮보다 아름답다" 정도가 될 듯하다.

수천수만 개의 환한 조명이 청도의 밤을 밝히는 빛축제장은 해가 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관광지.

"폴 세잔,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등 이름난 화가들이 사랑한 프로방스(포도주로도 유명한 프랑스 남동부 도시)의 분위기를 청도로 옮기고자 했다"는 것이 축제장 관계자의 말이다.
 
환하게 불 밝히고 여행객을 기다리는 청도 프로방스.ⓒ 경북매일 자료사진
 
터지는 빛의 향연에 넋을 빼앗긴 꼬마들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거울로 만들어진 미로를 헤매다가 유령 차장의 안내에 따라 열차에 오른다. 반짝이는 야광 물고기와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프로방스 스튜디오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빛이 없는 어두운 벤치에선 갓 연애를 시작한 젊은 남녀가 밀어를 속삭이기도 한다. 나이 지긋한 여행자들은 그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밤이 내린 '청도 프로방스'는 아이들에겐 즐거움을, 어른들에겐 낭만을 선물하는 공간이다.

감으로 만든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청도 와인터널

프로방스 빛축제장 지척엔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와인 터널'이 있다. 청도 특산이라는 '감 와인'이 눈길을 끈다.

대한제국 말기인 1898년 만들어진 이 터널은 붉은 벽돌의 아치형 천정과 자연석 벽면으로 조성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터널 중 하나'로 불린다. 지난 2006년부터 와인 숙성고와 와인 바로 사용됐다고 한다.
 
낭만적 애주가를 반기는 청도 와인터널.ⓒ 경북매일 자료사진
   
네온사인으로 만든 포도주병이 빛나는 와인터널.ⓒ 경북매일 지료사진
 
"내부는 항상 섭씨 13~15도 정도로 유지된다. 여름에는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려는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게 와인 터널 입구에서 만난 동네 주민의 자랑 섞인 설명이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와인과 동창과 가족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날짜를 써 붙여 만든 와인 저장통, 꽤 큰 규모의 와인 바가 이곳을 처음 찾은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터널로 들어가기 전 조그만 상가에선 곶감과 감식초, 청도의 농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손님을 부르는 아주머니들의 사투리가 정겨웠다.

여기까지 와서 '감으로 만든 와인' 한 잔쯤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진열·판매되는 와인도 부담스런 가격은 아니다.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로 만들어진 와인을 맛보는 색다른 즐거움에 와인 바에 마주앉은 노부부의 얼굴이 미소로 환했다.

끊긴 길과 붉은 단풍이 만들어내는 절경

길이 끊긴 높고 거대한 절벽에 꽃빛 닮은 단풍이 흐드러졌다. 재론의 여지없는 절경이다. 인간의 능력 밖에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가을 풍경이 놀라움을 불러왔다.
 
맑은 물빛에 단풍이 비친 공암풍벽.ⓒ 경북매일 자료사진

'공암풍벽(孔巖楓壁)'. 청도팔경 중 4번째로 손꼽히는 수려한 경관이 기자를 매혹했다. 오래 전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풍벽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강 속 바위는 쪼개진 채 몇 해를 살아왔나
비탈길 오르고 좁은 길 통과하니 서늘한 기운
산수 좋은 곳에 산다고 부질없이 말해왔건만
나, 오늘에야 참된 별천지를 보았노라.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서 경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공암풍벽은 30m에 육박하는 기세 좋은 바위에 오색 단풍의 손길이 더해져 여행자를 불러 모은다.

반원 형태의 절벽은 사철 내내 감탄사를 선물하지만, "가을에 보는 풍광이 최고"라는 게 청도군청 직원의 설명이다.

운문댐이 만들어지면서는 풍벽 아래로 가는 길이 끊겼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신비감과 서정적 낭만을 더해준다. 원래 '진짜 아름다움'은 만질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 아닌가.

공암풍벽을 찾아가는 길. 조그만 시골마을 여러 개를 통과하게 된다. 빠알간 감이 익어가는 소읍의 풍경이 그저 그만이다. 잊고 살았던 1970년대 유년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소환됐다. 

막막한 생의 절벽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꿈꾸는 삶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한탄하는 사람, 절망감에 혼자서 오래 울어본 사람들에게 공암풍벽과 마주해보길 권한다. 희망은 먼 곳에 있지만 온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공암풍벽 인근엔 호거산 운문사가

신라 진흥왕 18년(557년)에 창건된 천년고찰 운문사도 빼놓으면 서운한 '최고의 가을 관광지'다. 공암풍벽에서 15분쯤 차를 달리면 널찍한 땅 위에 큰 규모로 들어선 운문사와 만나게 된다.
 
운문사로 들어서는 입구.ⓒ 홍성식
   
운문사 법당 아래서 바라본 하늘.ⓒ 홍성식
 
이 절은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생긴 후부터 여승들의 사찰로 유명했다. 올라가는 길 주위로 수백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

운문사에는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 9점이나 있다. 절 안을 돌아보며 금당 앞 석등, 동서 삼층석탑,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신불회도, 달마대사 벽화, 석조여래좌상 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만만찮다.

공암풍벽과 운문사는 천천히 걷는 것이 어울리는, 느림이 얼마든지 용인되는 청도의 가을 여행지다.

빼놓으면 아쉬운 청도의 또 다른 볼거리들

"아는 만큼, 애정을 가진 만큼 보이는 것"이 유적이고 관광지다. 기왕지사 청도를 찾았으니 가능하면 많은 곳들을 둘러보고 싶었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청도 신화랑풍류마을.ⓒ 경북매일 자료사진
 
운문면에 시원스럽게 들어선 '청도 신화랑풍류마을'은 충절을 지키고 예술을 아꼈던 화랑의 정신을 계승하고, 미래를 살아갈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화랑의 정체성을 알리고 연관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 연수교육과 수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화랑오계관, 국궁장,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인 화랑촌, 오토캠핑장 등을 갖췄다. 가상현실 체험이 가능한 화랑정신기념관도 흥미롭다.
 
청도 소싸움을 형상화한 인형.ⓒ 홍성식
 
애초엔 소를 키우는 목동들이 재미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청도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의 하나가 됐으니 바로 '소싸움'이다. 살아 있는 동물들의 다툼이라 호오가 갈릴 수 있으나 흥미롭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주말에는 실전 소싸움을 관람할 수 있다. 경기가 없는 평일에 청도를 찾은 사람들은 '청도 소싸움테마파크'에서 아쉬움을 달랜다. 역사관, 문화관, 기획전시실이 청도 소싸움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싸움소와 힘을 겨루거나, 가상의 소와 달리기를 하는 독특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소싸움장은 물론 테마파크도 입장이 무료다.
 
청도 범곡리 지석묘군.ⓒ 경북매일 자료사진
 
차를 타고 청도 시내를 달리다가 발견한 특별한 풍경이 있다. '범곡리 지석묘군(凡谷里 支石墓群)'이다. 우리의 기억 아득한 곳에 존재하는 옛날 사람들이 삶을 다하고 묻힌 곳.

이곳의 지석묘들은 상석을 지면에 밀착시켜 만든 남방 스타일이다. 그렇기에 얼핏 보기엔 커다란 바위들이 풀밭 위에 불규칙하게 들어서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나 또한 그냥 지나칠 뻔했다.

5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동편에 22기, 서편에 12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 유적으로 볼 때 청도엔 작지 않은 규모의 집단거주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학계의 견해다. 범곡리 지석묘군은 경북기념물 제99호.

차를 멈추고 잠시 여기를 걸어보았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의 삶은 얼마나 짧고도 덧없는 것일까? 불쑥 다가온 형이상학적 질문들 곁으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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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