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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 집이다. 집처럼 머물 수 있는 안식처를 찾아 여행자들은 헤맨다. 자신의 오롯한 시간을 기대한다. 여행지를 누비는 만큼 머무르는 공간에 대한 기대도 크다. 막연한 기대가 대개는 실망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 군더더기 없는 시간을 보낼 공간은 어떤 기준으로 찾을까. 소노 아야코가 쓴 <약간의 거리를 둔다>를 읽으며 여행지에서도 머무르는 공간은 통풍이 잘 되는 곳이 좋다는 답을 얻는다. 통풍이 나쁘면 집이 썩고 사람도 병든다. 통풍은 간격을 전제로 한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관계가 깊어지면 뒤얽히고 성가셔진다.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되도록 해야 된다. 바로 나주 여행에서 만난 '39-17 마중'이야말로 통풍이 잘 되는 곳이다.
  
39-17 마중에 내려앉은 밤 집처럼 머물 수 있는 안식처를 찾아 여행자들은 헤맨다. 여행지를 누비는 만큼 머무르는 공간에 대한 기대도 크다.나주 여행에서 만난 ‘39-17 마중’이야 말로 기대에 부흥하는 곳이다.ⓒ 최정선
   
'39-17 마중'에 깃든 의미
 
'39-17'이 어떤 뜻인지 궁금할 게다. 숫자는 암호와 동시에 함축적 언어를 내포하고 있다. 목서원은 나주의 향리수장 정석진의 손자 정덕중이 모친을 위해 1939년 건립한 가옥이다. 이곳은 '1939년 나주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처음 이 공간에 도착하자 마중의 남우진 대표와 인사하고 간단히 설명해 주셨지만 그만 단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가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39-17'의 의미는 이미 머릿속에서 블랙아웃(대정전)된 상태. 그때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동료가 다음날 숫자의 의미를 무심코 묻는다.

그러자 안주인 기애자 님이 어리둥절하시며 '제일 중요한 점을 잊으셨군요! 저희 집 강아지도 39와 17입니다' 하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셨다. 사실 나의 양심도 심히 흔들렸다. 단안한 안주인이 상기시킨 숫자의 의미는 머릿속에 각인돼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남 대표는 2017년 목서원을 복원한 후, '난파정(1915년)', '시서헌(1917년)' 등 고택과 정원, 창고까지 옛 건축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마중의 핵심 공간인 목서원은 주인장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단순히 숙박에서 끝나지 않고 공연, 체험을 곁들여 문화 콘텐츠 제작소로 재탄생했다. 남 대표가 지난 2015년 지인의 소개로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폐허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첫눈에 사랑에 빠져 인수하게 됐단다.
  
난파 정석진의 거처이자 난파고택인 목서원 동학농민혁명의 혁혁한 공을 세운 향리수장 난파 정석진의 거처로, 1939년 손자 정덕중이 재건한다. ‘한·일·양 건축 양식’을 절충한 근현대의 대표적 건축물로, 당대 건축대서사(建築代書士)였던 박영만이 설계와 공사를 맡았다.ⓒ 최정선
 
목서원은 1896년 동학농민혁명의 혁혁한 공을 세운 향리수장 난파 정석진의 거처로, 난파고택이라 불렸다. 그의 공을 인정받아 해남군수로 제수된다. 이 가옥은 1939년 손자 정덕중이 재건한다. '한·일·양 건축 양식'을 절충한 근현대의 대표적 건축물로, 당대 건축대서사(建築代書士)였던 박영만이 설계와 공사를 맡았다.
 
39-17 마중을 내려보는 언덕에 난파 정석진 관련 깊은 건물이 있다. 바로 난파정으로, 본래 제당이었다. 이 건물은 정우찬이 아버지 정석진을 추모코자 1915년에 지은 건물을 복원해 재단장했다.
  
3917마중에서 만난 특별한 시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관광콘텐츠인 ‘39-17 마중’은 ‘오랜 길목에서 마주친 특별한 시간, 별안간 나주’를 주제로 공모에 선정됐다. ⓒ 최정선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관광콘텐츠인 '마중3917'은 '오랜 길목에서 마주친 특별한 시간, 별안간 나주'를 주제로 공모에 선정됐다.

남우진 대표는 복합문화공간을 겸한 한옥숙박체험을 통해 동학군으로부터 나주읍성을 지킨 일등공신이면서 1896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맞서 의병장으로 나섰다 참수당한 정석진의 삶을 통해 나주의 근대사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우리 팀과 현장의 여행객들이 함께 어우러져 나주 역사·체험 프로그램인 '금성별곡(錦城別曲)', '율정별리(栗亭別離)', '별보는 우부리' 등에 참여했다. 잠깐 주요 프로그램의 설명을 덧붙이겠다. 금성별곡은 금성(현 나주) 항교의 유생 10명이 한꺼번에 소과에 급제하자 그들의 스승인 박건성이 1480(성종11)년 감격을 노래한 것이다.

이어 율정별곡은 정약용이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형인 정약현과의 이별을 슬퍼하면서 남긴 시이다. 마지막으로 별보는 우부리는 천민 우부리의 딸(숙용 우씨)이 채홍사 눈에 띄어 연산군의 애첩이 된다. 하루 아침에 연산군의 장인이 된 우부리의 횡포를 막고자 박상이 우부리를 잡아다가 벌하는 과정에서 사망하게 되는 일을 엮은 스토리다.
 
체험 프로그램 후 남도 먹거리의 진수를 즐기는 코너가 진행됐다. 이선영 세프와 '남도 음식 명인의 맛 콘서트'가 진행됐다. 음식 만드는 요령과 영산포 홍어 유래 등 나주 음식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나주의 어필진미와 소팔진미 언급이 가장 흥미로웠다. 이어진 바비큐 파티와 세프가 직접 만든 과일 맥주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맛이었다. 마지막 만찬으로 연잎밥이 나왔다. 식사 후 국악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도 진행됐다.
 
목서원과 난파정에서 한옥숙박체험을 하다

목서원의 하룻밤은 표현할 언어가 없을 정도로 특별했다. 한옥의 창호 사이로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새근새근 잠들었다. 두 겹의 미닫이 문 너머로 살포시 밤이 내려앉았다. 목서원의 호위무사인 금목서와 은목서가 밤과 함께 요원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가 만파식적으로 분다.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
 
목서원은 내부 창호, 온돌은 한식, 붙박이 수납장과 집안을 지탱하는 뼈대와 구조는 일본식, 여기에 서양의 방갈로 느낌까지 가미하였다. 어머니가 쓰실 공간에 대한 편리성과 가옥의 멋을 함께 추구해 이채롭다. 방엔 손때묻은 소품들이 고스란히 놓여있다. 일본식 수납장을 열면 천연염색한 정갈한 이불이 반긴다.
  
언덕 위에 아담한 한옥 난파정 난파(蘭坡)는 정석진의 호로 ‘난이 가득 피어있는 가파른 언덕’을 의미한다.ⓒ 최정선
 
언덕 위에 아담한 한옥 난파정도 밤의 적요함에 깃든다. 난파(蘭坡)는 정석진의 호로 '난이 가득 피어 있는 가파른 언덕'을 의미한다. 나주천이 내려다보이는 볕 좋은 명당이 난파정의 위치다. 주위의 대나무 숲에 에둘러져 있어 청량감마저 느껴진다.

100여년 된 고택은 방 2개, 대청마루로 구성된 전통한옥이다. 가운데 2칸을 이은 대청마루를 좌우로 온돌방이 멋스럽다. 고즈넉해 보이는 풍경과 달리 광주·목포간 고속화 도로가 가설되면서 소음이 심하다. 원래 난파정 앞으로 계류가 흐르는 계곡과 그 물길을 따라 금성산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계곡이 사라져 삭막하기 그지없다.
 
소통의 공간, Cafe 39-17 마중
  
예전 쌀 창고를 개조한 카페 마당 곳곳의 테이블이 놓여 있어 실내에서 야외로 펼쳐진 느낌이 든다. 일종의 공간이 확장된 느낌이다ⓒ 최정선
 
카페는 예전 쌀 창고를 개조한 곳이다. 바로 뒤편은 나주향교다. 카페는 안팎이 매력적이다. 마당 곳곳의 테이블이 놓여 있어 실내에서 야외로 펼쳐진 느낌이 든다. 일종의 공간이 확장된 느낌이다. 은은한 금목서, 은목서 아래에 마시는 달콤한 오미자 한 잔은 여유 그 자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느낌이다.
 
카페 북쪽, 수령100년의 보호수인 팽나무와 회화나무,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 그리고 앞마당엔 옛 우물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그 옛날 우물은 삶의 터전이지만 지금은 장식물로 전략해 조금 안타깝다. 카페는 목서원, 갤러리와 함께 39-17 마중의 주요 공간이다. 이곳에서 종종 문화행사도 진행된다. 우리가 간 날은 캘리그라피 행사가 있었다. 덕분에 멋진 캘리 작품도 선물 받았다.
 
<여행귀띔>
 
-주소: 전남나주시향교길42-16
-전화: 061-331-3917
-숙소: 목서원은 은행목, 금목서, 은목서, 회화목으로 구성돼 있다. 난파정은 따로 예약문의를 하셔야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최정선 시민기자는 책 <생각없이 경주> 저자입니다. 이 기사는 블로그 '3초일상의 나찾기'(https://blog.naver.com/bangel94)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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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한국여행작가협회 정회원). <생각없이 경주>, <내일도 통영섬> 저자이며 여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