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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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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인 종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600여 년 동안 문화의 역사를 일궈온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는 종로에서 나고 자라며 예술을 펼쳐왔거나, 종로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 시대의 예술인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한글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 있는 강병인 멋글씨예술가ⓒ 강병인글씨연구소
  
강병인 서예가가 붓을 드는 순간은 오랜 사유가 끝난 이후다. 그 위에 비로소 글자들은 종이 위에 알알이 맺힌다. 때로는 계절의 옷을 입고, 향기를 내뿜는가 하면, 넘치는 흥을 주체하다 못해 살아 움직이는 글자들은 이러한 산고의 시간 속에서 탄생되었다.

영혼을 담아 쓴 글씨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 후학 양성을 통해 한글디자인의 발전에 기여해온 그를 '세종의 한글 정신을 잇는 이들이 꿈꾸는 터'라고 명명한 서촌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과거의 유산을 현재에 되살리다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22일까지 마포중앙도서관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 <독립열사 말씀, 글씨로 보다>는 오랜 역사에서 길어낸 명문(名文)의 의미를 현재에 되살리기 위해 힘써온 그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이 뜻 깊은 행보는 시간을 거슬러 지난 2014년부터 닻을 올렸다. 상암동 부엉이근린공원 내 구 일본군관사에서 열린 8·15 광복 69주년 기념 특별전 <독립열사의 말씀 강병인의 글씨로 보다>를 통해서였다.

"독립열사 말씀을 써서 전시를 하면, 일본군 관사에 잔존해있는 불온한 기운을 다 빼내고, 새로운 정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찾아뵐 수 있는 독립열사 묘를 찾아가서 참배하기도 했고, 독립 열사 한분 한분의 삶과 정신, 말씀이 쓰인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면서 써내려갔죠. 그 다음해, 광복 70주년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옥사 내에서 전시를 했고요."
 
전시 <독립열사 말씀, 글씨로 보다> 중 <한겨레> 지면 16쪽에 써내려간 단재 신채호 선생님 말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도 없다' / 강병인 작ⓒ 강병인글씨연구소
  
올해는 더욱 특별한 해인만큼, 촉박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독립열사들의 말씀에 열 세 분의 말씀을 추가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안중근 의사의 '동포에게 고함' 등의 글을 포함해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최현배, 이극로 선생과 외국인으로써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호머 헐버트 선생의 글들까지 총 30점의 작품이 공개되었다.
 
전시 <독립열사 말씀, 글씨로 보다> / 글씨 강병인ⓒ 강병인글씨연구소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전시의 방향을 크게 세 가지로 잡았어요. 첫 번째는 독립열사 말씀들을 옮기되, 그분들의 글씨가 육성으로 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어요. 죽음을 무릅쓴 결의와 강인한 의지, 그리고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쓴 고결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 작품들이 서예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보니 글씨를 보면서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조형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셋째로는 독립열사 한 분 한 분의 철학과 말씀이 다르듯이 하나하나의 작품에서 구도와 글꼴을 다르게 하여 한글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고민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 말씀 중 '얼렁뚱땅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작품 앞에 사람들이 한참을 서 있어요. 이 말씀은 현 시대에도 딱 들어맞는 말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얼렁뚱땅, 대충대충 일하다 일어난 사회참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뜻 깊은 해에 좋은 말씀을 살피고 새기는 것도 좋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보자는 취지를 담고 싶었습니다."

 
전시 <독립열사 말씀, 글씨로 보다> 중 남강 이승훈 선생의 『씨앗』/ 강병인 작ⓒ 강병인글씨연구소
 
그의 고민은 일제 강점기에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남강 이승훈 선생님의 '씨앗'이라는 글자 속에서 그대로 읽힌다.

"좋은 씨앗을 심고, 잘 자라게 하면, 먼 훗날 무성한 숲이 되고 큰 산을 이루게 될 거잖아요?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튼튼한 인재를 많이 키울 때 우리나라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어요."

전시를 찾은 가족들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과 글씨 곁에서 좀처럼 떠나지 못하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모습에 그는 남다른 보람을 느꼈다 말한다.

"독립열사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우리가 왜 나라를 잃었을까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특히 부모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와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함을 느꼈죠. 아이는 우리의 미래잖아요."
 
자유로움 속에서 글씨와 노닐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특활반인 서예반에 들어간 것은 수업이 끝난 후에 꿀을 실컷 먹게 해주겠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러나 꿀보다 달콤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서예의 재미였다. 그저 좋아서 전념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가 거기 있었다.

"딱 다섯 마디로 끝납니다. '좋아하니까'. 그 하나예요. 집안에 서예를 했던 분도 없었고, 동네에서 정식으로 전수받을 수 있는 서당이 있던 것도 아니거든요. 글씨를 쓰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졌어요. 주변의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는 마음도 없어졌고요."
   
한중일 문화올림픽 아트포스터 전 오프닝 퍼포먼스/2017년/ 글씨 강병인ⓒ 강병인글씨연구소
 
중학교 2학년 때, 교과서에서 접한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 감탄한 그는 영원히 먹과 함께 살겠노라 다짐하며 '영묵(永墨)'이라는 호를 짓는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줄곧 저의 정신적인 스승님이셨어요. 어린 나이에 교과서만 보고 선생님의 깊이 있는 작품 세계를 어떻게 다 이해했겠습니까만, 문신·실학자·서예가 등 수많은 수식어 중에서 유독 '서예가'라는 말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좋은 글씨를 쓰는 서예가가 되어보자'라는 꿈을 그때 가슴에 새겼어요.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호를 붙잡고 있었던 거죠. 만약 그 호를 짓지 않았다면, 제대로 자아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만큼 제게는 소중합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경기도 성남으로 올라와 시계 공장에 다닐 때도,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할 때도, 군대에 있을 때에도, 그는 쓰고 또 썼다. 스승은 없었으나, 그 결핍이 그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켰다.

"즐거우니까 잘하고 못하고를 따진 적이 없어요. 물론 큰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이나, 서예를 전공한 사람에 비하면 기본기가 부족했죠. 그렇지만 그 차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더 많은 노력을 했어요. 스승이 없다는 것은 곧 자유를 뜻하기도 하거든요. 서예가 도제식이다 보니 어떤 스승 밑에서 배우면, 그분의 철학이나 글씨체를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만큼 저를 어떤 틀에 가두지 않고, 색다른 글씨를 쓸 수 있겠다 싶었어요. 더 잘 쓰려고 누군가와 경쟁할 필요도 없으니 더 좋은 환경 안에 있었던 셈이죠."
        
강병인 작가 작업실 속 글씨의 흔적이 느껴지는 붓ⓒ 강병인글씨연구소
 
출판사 편집디자이너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 1992년 위드콤디자인을 설립했고, 그즈음 일본을 여행하며 서예가 디자인적인 쓰임이 있다는 사실에 눈뜨게 된다.

"같은 서예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죠. 물론 당시에도 서예가들이 상업적인 용도의 글씨를 쓰기도 했지만, 저는 더 전문적으로 풀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97년에 찾아온 IMF로 받아두었던 어음들이 부도가 나면서 덩달아 디자인회사를 접게 되었고, 신용불량자 신세에 내몰리는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서예만큼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98년도에는 처제의 보증을 받아 단돈 500만원으로 그래픽잡지 '프로워크'를 창간하며 새로운 도전을 기약했다.

그러나 운영 미숙으로 인한 자금난 등으로 이마저도 폐간을 하게 된다. 비록 햇수로 2년, 12호를 끝으로 잡지는 사라졌지만, 당시에 제대로 된 디자인 결과물을 기록하고 쌓아가는 잡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획기적이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당시 그래픽 디자인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매월 큰 광고대행사와 편집디자인회사의 우수한 디자인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아카이빙이 전혀 되질 않고 있었어요.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우리나라의 훌륭한 기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위대한 유산이잖아요. 매해 수많은 디자이너가 배출되는 시대에 정작 중요한 디자인 자료들은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보니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죠.

좋은 디자인을 모아 제공해야겠다는 사명감에서 시작했지만, 경영난으로 폐간을 결정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거래하던 인쇄소가 IMF 때 인쇄비를 제대로 지불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저의 재기를 위해 창간부터 폐간 때까지 잡지 인쇄를 무료로 해주었고, 필름 출력과 제본까지 협찬을 받아 진행하면서 큰 힘을 얻었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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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