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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재정비촉진지구 3구역'으로 불리는 입정동으로 가기 위해 을지로3가역 지상으로 올라와 자동차도로변을 따라 걷다가 좁은 골목으로 휘돌아 들어가면 갑작스레 1970-1980년대의 경관과 마주친다. 마치 드라마 세트장에 들어온 거 같은데 TV에서 봤던 익숙한 배우들은 없고 무명의 배우들만 보인다.

이들은 마치 전문기술자를 연기하는 것 같다. 이들은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진짜 기술자일까. 이 곳은 1980년대를 재현한 드라마 세트장일까, 아니면 2020년에 현존하는 실제 동네일까. 입정동은 도심 한복판에 있지만, 이 동네로 들어오면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입정동 골목 풍경
 입정동 골목 풍경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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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정동 공간의 풍경, 그 공간을 만들어온 사람

입정동에 들어서면, 골목길은 굽이굽이 휘어져 있고 길이 끊긴 거 같다가도 다시 이어진다. 무심히 걷다보면 길을 잃기 쉽상이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쯤 우연히 원하는 목적지에 서 있다. 길의 폭도 일정치 않다. 양 어깨가 닿는 비좁은 길이었다가,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넓은 영역에 다다른다. 좁은 골목은 어디쯤에서 더 좁은 골목으로 나뉘어졌다가 또 다시 합쳐진다.

길의 형태만큼 다양한 경관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허름하게 덮여있는 지붕 아래로 한옥과 일식가옥이 눈에 띈다. 외부에 붙어 있는 간판에는 아주 오래된 글씨체로 기술용어를 지칭하는 듯한 단어들이 적혀 있다. 좁은 길에서는 짐을 싣고 나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고, 작업장 안에서는 번쩍이는 금속들 사이에서 바쁘게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업장이 좁아 골목에 나와 작업하는 곳도 있다.

바쁘게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기술자들은 대충하는 듯 무심해 보이지만 그들만의 원칙이 있는 듯 하다. 그들의 손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도구들이 쥐어져 있다. 불빛이 번쩍이기도 하고, 쇠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공업용 약품 냄새가 나기도 한다. 여기는 지금까지 지내왔던 도시가 아니라 가상의 드라마 세트장 같다. 

하지만 입정동 안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면, 비현실적인 가상이기는 커녕 현실에 실제하는 공간과 사람이자 우리의 역사를 잘 담고 있는 유산들이다. 우선, 구불구불하고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조선 후기의 도시조직이 유지되면서 주거지역이 산업지역으로 용도가 변하고 필지가 분할되어온 물리적 변화가 쌓여있다.

건축물대장을 확인해보면 이곳에 1930년대 건축물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곳곳에 있는 한옥과 일식가옥은 시대에 따른 특징과 변천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011년 서울시가 수행한 <4대문안 문화유적 보존방안 연구>에서 이곳을 "조선후기의 도시조직이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지역"으로 평가할 만큼, 아직도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 곳에서 작업하는 기술자들은 평균 40년 가량 이 곳에서 일하면서 이 지역의 산업생태계를 만들어온 살아있는 역사적 유산이다. 이들은 현장에서의 오랜 경험을 통해 기술을 숙련화하고 체화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작업에 있어 기계보다 정확하고 정교하다. 심지어 높은 작업 완성도를 위해 상황과 필요에 맞게 직접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장인성을 갖고서 오랜 시간 동안 제품을 만들어왔다. 오죽했으면 "청계천에 오면 못 만드는 게 없다"는 말이 생겼을까.

유산을 고려하지 않는 철거, 아쉬운 서울시 정책
 
 세운도시재생사업 목표로 제시된 '역사적 도시조직의 보존'. (출처: 서울시, 2017, <세운상가일대 도시재생 활성화계획 보고서>)
 세운도시재생사업 목표로 제시된 "역사적 도시조직의 보존". (출처: 서울시, 2017, <세운상가일대 도시재생 활성화계획 보고서>)
ⓒ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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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운3-1, 4, 5구역은 한창 공사중이다. 2018년 12월 강제철거가 시작된 이후로 이러한 유산들이 사라져버렸다. 나머지 구역도 유산적 가치에 대한 고려는 미흡한 채, 재개발을 위한 진행절차를 밟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산과 관련된 기존의 서울시 정책을 보면 아쉬운 부분들이 많다.

우선, 주변 맥락에 대한 고려없이 개별 건물만 남기는 방식이다. 서울시가 유산을 다루는 기존의 사례들은 대부분 가치있다고 판단되는 대표적인 건축물 한두 개만을 남겨 박물관 혹은 문화시설로 만드는 경우였다. 하지만 개별 유산들은 인접한 다른 유산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명확해지고 온전히 이해된다.

입정동의 경우, 주물공장은 목형업체와 긴밀하게 협업하고 있고, 시보리공장은 금형을 깎는 정밀가공업체와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거의 모든 공장들은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때나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다방에서 차를 시켜먹는다. 지금은 제 기능을 하지는 않지만, 목욕탕과 세탁소는 교통수단이 지금과 같이 발달되기 전 지방 거래처 사람들이 들렀던 곳이다.

이렇듯 개별 유산들은 지역에서 발생했던 전체적인 생활의 맥락과 관계에서 봐야 보다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공사 중인 아파트가 다 지어지면, 입정동의 남은 구역들은 고층 건물 사이에서 외딴 섬과 같은 고립된 모습이 될 것은 뻔하다.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도심 한가운데에 어디에나 있는 아파트를 지으면서, 그 개발이 미칠 사회문화적 영향과 효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싶다.

다음은, 생활자들에 대한 고려없이 건물 외형만 남기는 경우다. 대부분의 보존 사례들은 건물만을 남기고 여기에 기존의 용도 대신 새로운 용도를 부여하면서 소위 '힙'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려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건물은 사람들이 생활했던 공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건물의 외형을 조금씩 바꾸고 건물에 기능을 부여하는 주체이다. 그래서 혹자는 건축 당시 원형으로 복원하는 것보다 사람이 남아 외형을 지속적으로 쓸모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보존이라고도 한다.

또한 외부자나 방문객의 시선만이 아니라, 내부자의 관점에서 가치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올해 초, 재개발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서울시는 보존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오래된 음식점을 중점적으로 조명했지만, 이는 외부자의 관점에서만 이곳의 가치를 평가한 것이다. 입정동의 대부분은 작업장과 공구판매점이고, 이 지역 상인들의 생활을 고려해보면 을지면옥 외에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다른 음식점들이 많다. 실제 생활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포 외에도 조명해야 할 다양한 유산들이 있다.

유산의 가치를 섬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법적인 절차가 있다. 개발시 건물을 철거하기 이전에 가치있는 유산들을 조사하는 '지표조사'다. 지표조사는 개발 이전에 땅 위에 있는 유산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촘촘히 따져보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가치가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보존해야 하는지' 등을 고려한다. 하지만, 세운3구역의 경우는 이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

법적으로 재개발사업 면적이 일정면적 이상인 경우, 지표조사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지만, 세운3구역은 한 구역을 10개로 쪼개서 분할 개발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지표조사를 해야 하는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표조사 없이 철거가 진행되었다. 면적이 작다고 유산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닐텐데, 이런 예외 상황에서도 섬세한 조사를 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단순히 면적이라는 양적인 기준 외에도 다른 기준들을 마련해야 한다.

서울시는 시민들과 함께 입정동 철공소 골목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유산적 가치에 대한 고려 없이 철거가 진행됐다. 중구는 '을지유람'이라는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는데, 최근 3구역 내부지점들이 빠지는 루트로 크게 변경되었다. 이는 재개발 사업 진행시 유산의 가치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쉽게 유산의 가치를 번복해서는 안 된다. 유산의 공공적 가치를 최대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사업 계획에 넣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서울미래유산에 등록된 입정동 철공소 골목.
 서울미래유산에 등록된 입정동 철공소 골목.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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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살아 있는 입정동 박물관이 필요하다

흔히 '박물관'을 우리는 과거의 것을 하나의 공간에 모아 전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박물관의 개념이 이러한 전통적 개념에서 보다 의미있는 새로운 개념으로 대체된 지 오래되었다. '살아있는 박물관'이나 '에코뮤지엄'은 건축물의 형태만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생활했던 사람들도 고려하고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과거의 산물들을 다루고 사라진 과거를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라, 현재를 다루고 현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라는 의미이다. 점적인 개념으로 개별 유산을 간주하고 보존하는 관점을 넘어서서, 개별 유산들을 묶음으로 보고 개별 유산간의 관계성에도 조명하는 면적인 개념의 보존이 필요하다. 입정동에서 이러한 관계성은 제품이 만들어지는 생산 네트워크이며 기술자간의 협업체계이다. 

몇 개의 개별 건축물만 남긴 형태적 보존은 드라마 세트장에 불과하다. 입정동의 공간과 사람 그리고 네트워크가 뒤얽혀 만들어내는 '입정동스러운 분위기'는 이 모든 것이 고려될 때만 지속될 수 있다. 입정동에서는 전통적인 개념의 박물관보다는 건축물을 사용하고 있는 기술자들과 각 유산 간의 관계성까지 고려된 '살아있는 박물관'이 있어야 한다. 이들이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기술을 지속하며 협업해왔던 동료들과 계속 함께 할 수 있는 '입정동 박물관' 말이다.
 
안근철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에서 활동하며 지역조사연구를 한다. 주민참여형 계획, 문화유산 관련 실무를 했으며 현재 한국외대 정보•기록학과에 재학중이다. 도시공간(특히 재개발지역, 산업유산) 아카이브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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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수표도시환경정비사업 등의 이름으로 재개발 될 위기에 처한 청계천-을지로를 지키고자 작년 연말 결성된 예술가, 디자이너, 메이커, 연구자, 시민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도시재생이란 이름의 재개발로부터 이 곳의 가치를 기록하고 알리고 지킬 수 있도록 상인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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