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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혐오’. ‘혐오’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오래됐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삶에 불쑥 다가온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혐오와 차별이 더 이상 일부 소수자가 겪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국인-외국인, 남성-여성, 이성애자-동성애자, 성인-아이, 정규직-비정규직 등 한국 사회를 편 가르는 기준이 되어버린 혐오는 이제 우리 모두를 겨냥하고 있다. ‘혐오’와 ‘혐오표현’이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만 방치될 수 없는 이유다. 2020년, 혐오와 차별을 넘어 상생과 공존의 시대로 가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고민해본다. - 참여사회?[기자말]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혐오표현 리포트(2019)>에서는 혐오표현을 '성별, 장애, 종교, 나이, 출신지역, 인종, 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어떤 개인·집단에게 ①모욕, 비하, 멸시, 위협 또는 ②차별·폭력의 선전과 선동을 함으로써 차별을 정당화·조장·강화하는 효과를 갖는 표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혐오표현이 "차별을 정당화·조장·강화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혐오표현은 다른 욕설이나 나쁜 말 하고 날카롭게 구분된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이런 효과가 발생하는가? 

혐오표현의 사회적 해악

바로 성별, 장애, 종교, 나이, 출신지역, 인종, 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모욕할 때 그 효과가 발생한다. 성별 등은 누군가의 정체성에 관한 속성이며, 이 속성을 가지고 누군가를 비난할 때 바로 차별을 조장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 속성에 의해 구분되는 집단은 그 사회에서 취약한 상태에 있는 소수자 집단이며, 그 집단의 속성을 이유로 해서 그 집단을 비난하거나 모욕하면 그 집단에 대한 차별이 조장되거나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네가 정말 싫어"라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비난일 뿐 혐오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만약 "여성들은 책임감이 없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성향이 있어"라고 하거나, "이주노동자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어. 쟤들 어떻게 좀 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말한다면 혐오표현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표현의 '강도'가 아니다. 비난 강도가 심한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혐오표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의 '효과'가 발생해야 혐오표현이 되는 것이다. 여성이나 이주노동자의 취약한 지위를 이용해서 비난하는 발언을 하게 되면, 그것은 그 집단에 대한 공격이 되고 그 집단의 지위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게 된다. 그 집단의 구성원 개인에게 말했든, 그 집단 전체를 향해 일반적으로 말했든 상관 없이 말이다.

이 말은 전염성이 있어,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말을 당연하게 여기고 때로는 그런 말에 동참하게 만든다. 이렇게 혐오표현은 광범위한 사회적 효과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욕설과 구분되는 개념이다. 반면, "나 너 정말 싫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모욕적일 수 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심한 표현을 써도 마찬가지다. 
 
 혐오표현의 문제가 사회의 자정능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에 가깝다.
 혐오표현의 문제가 사회의 자정능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에 가깝다.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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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혐오표현의 유형

차별적 효과를 내는 혐오표현의 유형은 아주 다양하다. "나는 그 사람 쫌…."이라는 정도로 말해도 상당한 수준의 효과를 낼 수 있고, "쫓아내자"라고 선동성 발언으로 효과를 극대화할 수도 있다. 사실 혐오표현의 여부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그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눠 본다면, ①모욕, 비하, 멸시, 위협과 ②차별·폭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양분될 수 있다.

①에는 기본적으로는 그 집단에 대한 '편견'이나 '열등하다고 간주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 저속한 욕설을 담기도 하고 바퀴벌레 등 곤충에 비유하기도 한다. 적나라한 욕설이 아니라 팩트를 표방하거나 정책 제안의 외피를 쓴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난민 범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니 난민을 보면 주의해야 한다"라고 하거나, "에이즈 예방을 위해 동성애를 인정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일단 난민 범죄율은 높지 않고 동성애는 에이즈의 원인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허위다. 하지만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어떤 집단을 범죄집단이나 질병의 원인으로 몰아가는 것 자체가 그 집단의 지위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혐오표현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더욱 교묘하고 은밀하게 표현된 혐오가 더욱 강력한 차별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①에 비하면 ②의 유형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선전과 선동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끌어내거나 촉발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하자"라고 표현되지만, 암시적으로도 선전이나 선동이 가능하다. 대체로 ②의 유형의 해악이 좀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편이다.

혐오표현에 대한 대응은 국가의 책무

그렇다면 이러한 혐오표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먼저 혐오표현이 그 대상집단 구성원들의 사회적 지위를 약화시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단순한 욕설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차별의 효과를 낸다는 점이다. 모든 구성원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민주 공동체에서 차별의 효과를 내는 표현을 방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혐오표현은 어디까지나 '표현'이라는 점이다. 차별의 효과를 내는 '행위'라면 논란이 될 일이 없다. 예컨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성적을 낮게 줬거나 입사시험에서 탈락시키는 등 불이익을 줬다면 당연히 차별이고 금지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혐오표현도 차별적인 효과를 야기한다. '표현도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혐오표현이 차별을 조장하는 행위라면 혐오표현에 대한 공적 규제는 당연하다.

하지만 혐오표현이 표현인 이상 사회적 자정에 의해서 해결 가능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차별행위는 그 자체로 해악이 있고 금지해야 마땅하지만, 혐오'표현'이 표현인 이상 맞받아치는 말(speaking back)에 의해 그 해악을 없애버리거나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혐오표현은 개입보다는 '사상의 자유시장(marketplace of ideas)'❶에서의 자유로운 토론과 논박을 통해 그 사회적 해악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혐오표현의 문제가 사회의 자정능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에 가깝다. 혐오표현이 소수자 집단을 '침묵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을 혐오와 차별에 동참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인위적인 개입 없이 혐오표현이 자정된다는 것은 나이브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날로 확산되고 있는 혐오표현의 실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혐오표현을 방치한다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혐오표현도 표현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에 그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결국 국가와 사회는 혐오표현에 개입해야 할 법적, 도덕적 책무를 갖는다. 다만 그 방법이 혐오표현을 금지하고 형사처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혐오표현에 대한 사회의 대응능력을 향상시키는 쪽으로 국가가 개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혐오표현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혐오표현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차원의 대응이 절실히 요청된다.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라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사회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점은 혐오표현을 사실상 방치해온 한국 사회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혐오표현을 방치하는 것은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책무를 저버리고 혐오표현 조장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❶ 20세기 초 미국 홈즈 대법관의 표현을 따온 말. 일정한 사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을 때, 공공선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므로 국가는 공익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 사상이나 표현에 대한 간섭을 최대한 줄이고 자유시장을 통해 다양한 의견들이 걸러지도록 해야 한다는 뜻 
 
 혐오표현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혐오표현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차원의 대응이 절실히 요청된다
 혐오표현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혐오표현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차원의 대응이 절실히 요청된다
ⓒ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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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홍성수 님은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2020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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