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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스트레스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기억이 있다. 충격적이어서 잊지 못하고 있다. 학교 따돌림 폭력을 당한 아이의 '텔로미어(염색체 말단에 위치한 염기 서열)'가 그렇지 않은 아이에 비해 짧다는 보고였다. 당시는 텔로미어가 뭔지도 몰랐다. 노화와 죽음의 손상으로부터 DNA를 보호하는 텔로미어가 짧다는 것은 수명이 짧아진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유대인 후손에 관한 연구 결과였다. 극단적 스트레스를 받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의 후손들이 일반인보다 신경적, 심리적 질병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고, 이로 인해 수명이 단축될 수 있다는 보고였다. 나는 의아했다. 후손들은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아닌데 왜.

밝히고 있는 이유는 충격적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홀로코스트)로 각인된 선대의 트라우마 DNA가 후대에 유전된다는 것이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심각한 스트레스, 특히 '아동기 유독성 스트레스'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 책이 나왔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다.

네이딘 버크 해리스 박사는 어떻게 ACE 지수를 만들게 되었나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겉표지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겉표지
ⓒ 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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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아과 의사가 있다. 네이딘 버크 해리스. 그는 샌프란시스코 베이뷰의 공중 보건의로 일하다 겹쳐지는 우연을 발견한다. 7살 디에고는 그 나이라고 믿어질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키가 작다. 53세의 도나는 비만으로 고생하다 43킬로를 성공적으로 감량하지만,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왔고, 그로 인한 당뇨합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해리스 박사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디에고와 도나의 심층 상담에서 이들이 어릴 적 성폭력을 당했다는 뜻밖의 고백을 듣는다. 아동기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디에고의 성장부진과 도나의 섭식장애와 어떤 연관이 있다면, 이는 통상적 진단과 처방으로 치료되기 어렵다. 해리스 박사는 아동기 극심한 스트레스와 유병률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다.

그보다 앞선 고민과 연구가 있었다. 빈센트 펠리티와 로버트 안다가 공동 연구한 '아동학대 및 가정 기능 장애와 성인기 주요 사망 원인들과의 관계: 부정적 아동기 경험 연구'가 그것이다. 성인 17,421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는, 아동기 불행한 경험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낳고 이로 인해 건강이 나빠진다는 최초의 연구였다.

부정적 경험이 높을수록 심장병과 암, 만성폐쇄성 질환에 걸릴 가능성도 높았다. 이 논문은 해리스 박사의 믿음(어릴 적 유독성 스트레스가 유병률을 높인다)을 공고하게 한다. 펠리티와 안다 박사에 힘입어, 해리스 박사는 AC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지수를 고안한다.

ACE 지수는 "18세가 되기 전 열 가지 범주 중 어떤 것을 경험했는지 질문해 각 환자가 아동기에 부정적 경험에 노출된 수준을 판단하는 것"이다. 열 가지 범주에는 학대(정서적, 신체적, 성적), 방임(신체적, 정서적), 가정 내 약물 남용, 정신 질환, 범죄 행위 등이 있으며, 항목 당 1점으로 계산해, 지수가 높을수록 건강 상태가 나쁜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 아동에 이 지수를 적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생각하다, 한 아이가 생각났다. 딸애초등 2학년 때 급우였던 K였다. 딱하게도 이 아이는 '전따'로 불렸다. 그냥 따돌림만 당한 것이 아니다. 욕설은 물론 종종 얻어맞았고, 쓰레기 투척을 당했다. 딸애로부터 이 사실을 듣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K의 엄마와 담임교사에게 알렸다. 뭔가 해결책이 나오리라는 기대와 달리,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딸애와 나는 밀고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고 K의 고난은 나아지지 않았다.

학교 폭력 심리 치료시스템인 '위클래스'로 보내져 치료를 받는다고 했지만, 호전되는 기미가 없었다. 딸애가 전학한 이후에도 간혹 전해지는 K의 소식은 좋지 않았다. 소식이 뜸해지고 잊고 지내다, 지난여름 K를 한 식당에서 조우했다. K를 알아본 건 딸애였다. 화장한 K에게서 나는 그 애의 옛 얼굴을 찾아내지 못했다. 한 가지 마음이 아팠는데, 좀 크긴 했지만 어려서부터 작고 마른 몸은 여전했다.

ACE 지수를 반영한다면, K의 지수는 어떻게 될까? 한편 의구심도 든다. K가 당한 심각한 따돌림은 원인일까, 결과일까? K의 엄마가 한 말이 있었다. K의 엄마는 자신의 처지도 시난고난 하다고 했다. 버럭 대는 남편과 불화하고, 치매 시어머니에 아직 어린 K의 동생까지 살피느라 K를 잘 돌보지 못한다는 하소연이었다. K는 엄마가 힘들까 봐 이런저런 요구도 학교 얘기도 하지 않는 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K가 겪은 유독성 스트레스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가정환경일 수도, 학교 따돌림일 수도 있다. 어쨌든 K는 적실한 치료(대처)의 부재로 이중고에 시달렸던 셈이다.

스트레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회복탄력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역경의 파고에 매몰되었을 것이다. 단, 회복엔 최소한의 기반(환경, 문화, 개인의 노력 등)이 있어야 한다. 해리스 박사도 회복 탄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회복탄력성엔 반드시 사랑을 품은 양육자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부모가 가장 유력하지만, '반드시'라고 믿지는 않는다.

아동기 유독성 스트레스는 신경계, 호르몬계, 면역계에 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활성화될 때, 아이들은 수면 장애, 과민성, 집중력 부족 등을 겪는데, 이렇게 되면 당연히 학습과 행동 문제에 이상이 온다.

호르몬 영향은 디에고의 경우처럼 성장이 지연될 뿐 아니라, 난소와 고환의 기능 이상이나, 도나 처럼 비만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유독한 스트레스는 면역 시스템을 교란해 자가 면역 질환으로 이어져 당뇨, 류머티즘, 셀리악 병 등의 유병률을 높인다. 이렇게 아동기에 태동한 유독성 스트레스는 각종 질병에 취약하게 만드는 위험 인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리스 박사가 역설하는 바는 ACE 지수를 기반으로 한 '예방'에 있다. 그는 전국 소아과 의사들을 네트워크화해, ACE 선별검사 실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로버트 거스리 박사가 '거스리 검사'를 보편화해 뇌 손상을 예방했듯이, 유독성 스트레스의 생체지표를 식별할 수 있는 혈액 검사를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책은 말미에 해리스 박사의 역경을 담는다. 그는 둘째 아이를 잃고 이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신이 무너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어렸을 적 겪은 역경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조현병을 앓은 엄마는 주로 불안했고 때로 행복을 주기도 했지만, 어릴 적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건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조현병 발병 후 실종된 혈육에 대한 아픔까지 안고 있다. 이 부분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해리스 박사의 아동기 유독성 스트레스는 단지 엄마가 준 스트레스에만 기인했을까. 또한 아이를 잃은 후 발발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단지 아동기 유독성 스트레스 때문일까. 그의 조현병 유전력은 어떤 작용도 하지 않았을까.

"유독성 스트레스는 스트레스 반응이 혼란에 빠질 때 생기는 결과다. 이건 경제적 문제나 지역의 문제, 성격 문제가 아닌,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이다."(324)

스트레스의 과정과 결과가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은 수긍한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들여다볼 때, 경제, 지역,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한 해리스 박사의 주장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1945년 네덜란드는 기근으로 심장병, 조현증, 우울증 등의 유병률이 몇 배나 높아지는 비극을 겪었다.

경제 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들은 결핵이 확산되고 사망률이 높아지는 고통에 놓였다.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와 유족은 여전히 고통의 수렁에서 건져지지 않고 있다. 위 예시 중 스트레스에 노출된 대상이 아동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 역경 속 아동들이 겪었을 스트레스가 경제, 지역, 성격(유전)과 연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아픔이 길이 되려면> 참고).

그럼에도 해리스 박사의 이 말, "치유하기에 늦은 때란 결코 없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수면, 정신 건강, 건강한 관계, 운동, 영양, 그리고 명상까지 제공된다면, 치유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아동기가 불행했다고 끝까지 불행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병을 찾아 고치는 일이 어떤 낙인이 되어서도 안 된다.

해리스 박사의 제언은 예방으로 막을 수 있는 병을 방치해서 사람을 고통 속에 가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것이다. 옳은 말이다. 유해한 환경, 안전과 복지의 부재, 양극화된 계층이 분화되며 유발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채, 어려서부터 각자도생을 체화하고 살아가는 한국의 아이들, 생각만 해도 마음 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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