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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옛 일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동 할머니의 시민장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노란 나비. (자료사진)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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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민족운동사론>(서해문집·2008)은 1939년 3월 보도된 복수의 신문 기사를 인용해 일제강점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 인신매매 범죄 사건을 전한다.  

하윤명 부부는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도회에 나가고 싶어 하는 농촌 처녀들에게 접근했다. 피해자들을 속여 중국 베이징·텐진·목단강·상하이 등지에 700원~1000원을 받고 창기로 팔아넘겼다. 이들은 16세 정도의 소녀들을 상대로 서울로 데리고 가 좋은 직업을 알선해 주겠다고 속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윤명 부부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이 팔아넘긴 여성은 처음 알려진 65명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성시내 각 유곽에 넘긴 사람만 50여 명에 이르고 기타 텐진과 상하이 방면으로 중국인에게 매매한 경우가 20여 명 등 모두 150명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언론은 수사 진행에 따라 피해자 수가 훨씬 많아질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윤명은 "좋은 곳에 취직시켜주겠다"거나 "수양딸로 삼아 좋은 곳에 시집 보내주겠다"는 등의 감언이설로 피해 여성을 유인해 '위안소' 등으로 팔아버렸다. 그는 1925년부터 대전형무소 간수로 근무했다. 이후 1934년 부녀 유괴를 하며 인천에서 송학루라는 창가를 경영했다. 5년 뒤인 1939년에 부녀자 유괴 혐의로 경찰에 검거됐다.

이때 "으오! 가여운 소녀들(<매일신보> 1939년 3월7일자)" "색마 유괴마 하윤명 죄상(<조광> 제3권 제5호(1939년5월1일)" 등 인신매매범으로서의 악행이 전 조선의 언론을 통해 고발됐다.  

같은 해 이동제(당시 37세)는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조선인과 일본인을 가리지 않고 부녀자를 유괴해 팔아넘긴 혐의로 검거됐다. 이동제는 검거 당시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군 위안소를 경영했다. 

이것은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이 발부한 구인장으로 확인된다. 구인장엔 그의 직업이 한구시 삼인로에 위치한 위안소 경영자로 적시돼 있었다. 그는 체포 당시 상하이에서 나가사키로 입항한 연락선 상해환에 타고 있다가 나가사키로 상륙하려는 때 나가사키 수상경찰에 의해 검거됐다. 경찰 조사 결과, 이동제는 일본을 비롯해 조선 각지에서 부녀자 수십 명을 중국으로 유괴, 팔아넘긴 부녀 유괴 상습자로 드러났다.

2000년 전후 '위안부' 문제 연구자들이 일본에서 발견한 '판결문'엔 또 다른 일본인 인신매매범의 존재가 드러나 있다. 

피고 무라카미 도미오는 1932년 나가사키에 사는 일본인 여성 15명을 납치해 상하이에 설치되는 일본 해군 위안소의 '위안부'가 되도록 한 혐의(부녀자 '국외 이송 유괴죄')로 1936년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1937년 3월 초 대심원(대법원) 판결로 2년 6개월의 징역형이 확정됐다. 그는 상하이 메이메이리 26번지에서 해군위안소 아케보노를 운영했던 인물이다. 

그들은 어떻게 면죄부를 받았나

무라카미 도미오는 실제로 2년 6개월의 형기를 채웠을까. 하윤명과 이동제는 떠들썩한 언론 보도 뒤 재판에서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놀랍게도 이들이 제대로 처벌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현재까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조선총독부 자료를 통해 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2019)에서 무라카미 도미오에 대해 "1939년과 1940년, 1942년에도 여전히 아케보노 업주로서 상하이 지역 재류 일본인 명부(<지나재류방인인명록>)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보면, 형량을 모두 채우지 않고 나와서 계속해서 해군위안소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유괴 혐의로 중형을 받았다 해도 일본군으로부터 여전히 신뢰를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고 분석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종합연구(Ⅰ)>(2015)에서도 하윤명 부부와 이동제의 처벌 여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해당 보고서는 하윤명에 대해 "정식 재판과정을 거쳤다면 최소 만기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돌아다니며 인사소개업자로서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그가 경찰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재판을 받고 형을 살았다는 흔적, 즉 재판 및 (감옥) 입감 서류는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이동제 역시 신문에선 이렇게 보도돼도 과연 처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제 당국이 군의 요구에 응하는 행위에 대해선 불법행위라도 눈감아주었던 시기인데, 이동제는 한커우에서 위안소를 하고 있는 자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밝혔다. 

해당 보고서는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임종국의 <밤의 일제침략사>(한빛문화사·1984)를 인용해 "하윤명이 전쟁 말기에 싱가포르에서 군 위안소를 경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하윤명이란 자는 인신매매·인사소개업·창가·군 위안소 경영 등 '군 위안부'제와 관련한 상당한 영역에 걸친 영업을 한 자"라고 결론지었다.   

계속해서 보고서는 이것을 "인신매매범·소개업자 등의 불법이 '권력기관'과 연결돼 있고 이에 따라 권력기관의 '비호'를 받았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이런 점을 통해 보면 조선에서 인신매매업자나 소개업자 등에 대한 단속이 소홀해 불처벌한 것보다 일제와 공모관계가 있어서 불처벌됐던 것이 사회에 더 악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평했다. 이들 사례는 당시 '군 위안부'제가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윤명과 이동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중국 관내' 친일파로 등재돼 있다. 

'위안부' 문제 연구를 종합해 보면, 당시의 직업소개소(인사소개소)는 여성들에게 건전한 일자리를 소개해주는 곳이 아니었다. 일본군이 '군 위안부' 동원을 요구하면 조선에선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가 중심이 되고 그 '수족'으로서 움직이는 것이 소개업자·접객업자·청부업자 등이었다. 소개업자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인신매매범과도 상시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인신매매범과 공모하거나 (여성의 납치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인신매매 당한 여성들을 음식점이나 대좌부업(유곽)자·군위안소로 넘겼다.  

일본군 '위안부'제 운영 책임을 민간인인 업자들에게 전가시키면서 일본군과 정부에게 '면죄부'를 주는 연구활동이 꾸준히 있어 왔다. 여성들을 동원·관리한 것은 위안소 주인일 뿐 일본군은 이와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불처벌 사례들은 결국 일본군이 업자들을 수족으로 부리면서 여성들을 위안소로 동원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하윤명 부부와 이동제, 무라카미 같은 인신매매범 겸 위안소 경영자들은 일본군이 직접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주는 존재로, 일본군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기에 형기를 모두 채우지 않거나 아예 처벌받지 않고 복귀했던 것이다.

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본군 위안소 업자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연구>(2018)에서 "연구 결과 일본군은 야전주보(군대 영내 매점) 규정에서 규정된 바와 같이 군위안소를 군의 부속시설로서 보았고, 군위안소 업자는 민간인만이 아니라 군속·군인 등 다양하게 구성돼 일본군의 요구에 응하는 구조로 돼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군위안소 유형에 따라 다소 달라질 가능성이 있지만, 일본군 위안소 업자는 군인·군속일 경우는 물론 민간인인 경우에도 준군속으로 보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참고 문헌] 
강정숙, <일본군 위안소 업자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연구>, 여성연구 96권, 2018
박정애, <조선총독부 자료를 통해 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동북아역사재단 '일제 식민지 피해 실태와 과제' 심포지엄 자료집, 2019.9.4.
이인선·황정임·김동식·강정숙·조윤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종합연구(Ⅰ)>,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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