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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하고 싶었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연극을 하고 싶었다. 중학교 때 잠깐 했던 연극반 때문인지(<한여름밤의 꿈>을 죽도록 연습했지만, 끝내 상연은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수업은 안 듣고 책상 밑으로 돌려가면서 읽었던 <유리가면> 때문인지("마야, 나무가 되어라!"), 대학교 때 들었던 교양 연극수업 때문인지(뭔지도 잘 모르고 감상문 쓰러<관객모독>보러갔다가 물벼락 맞았다)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극을 하고 싶었다. 
 
 홍천녀가 되려면 눈알도 없어져야 하는데……!
 홍천녀가 되려면 눈알도 없어져야 하는데……!
ⓒ 미우치 스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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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어째선지 지루한 일상을 조금은 바꿀 것 같았다. 밀려오는 정보에 찌들고, 사고하지도, 향유하지도 않고, 스스로에 대해서건 사회에 대해서건 밍숭맹숭하게 무뎌진 감각에 아주 조금은 각성제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돌아가면서 대본을 읽고, 무대에 오르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사람들과 함께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매주 수요일마다 참여연대 지하 1층에서 연극을 연습하고 있다.  <그녀가 사라졌다>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남동훈 연출님은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을 때 읽으라고 했다. 연극은 중간에 나갈 수 있는 게 아니고, 한 호흡으로 봐야 하는 공연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자기 전 조명을 낮춰두고 방해 없이 문을 닫은 다음 한 호흡으로 읽었다. 인물들의 면면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의 '진짜 서사'는 무엇인지, 대본은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었다.
 
 참여연대 지하 1층에서, 이렇게 생동감 있는 표정이 있었는지 새삼 확인한다. (그리고 몹시 놀란다)
 참여연대 지하 1층에서, 이렇게 생동감 있는 표정이 있었는지 새삼 확인한다. (그리고 몹시 놀란다)
ⓒ 느티나무 시민연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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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아서 밀러나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읽는 건 좋아했지만, 연극을 한다는 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건 외따로 글자와 만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가장 놀라웠던 건, 연극은 대본을 읽으면서 완성된다는 것이었다. 희곡은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가 아니라, 상호개입을 요청하는 텍스트였다.

느티나무 시민연극단은 각자 자신을 교사, 학생, 직장인, 다양한 여러 가지 정체성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연극 앞에서는 모두 진지하게 배우가 되었다. 대본을 읽고 의견을 덧붙이는 과정을 처음으로 보았다. 이 인물이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이 상황이 이 인물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인물의 상황을 상정하고 추정해서 인물의 총체적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했다. 대본은 그저 종이였을 뿐인데 갑자기 공간감이 생겼다. 다 같이 극을 읽을수록 2차원이었던 인물이 뼈와 살을 가지고 텍스트 속에서 3차원으로 불쑥 솟아올랐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인물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볼 때마다 새롭게 놀랐다.

느티나무 시민연극단이 처음으로 상연한 연극은 세월호에 관한 연극이었다고 했다. 이 사회의 시민들에게 어떻게 공감하고 애도해야 하는지, 무엇으로 그 슬픔에 연결되어야 하는지 물어야만 했던 사건을 이들은 연극으로 만들었다. 그 연극을 보지 못했지만, 연극을 하면서 왜 그 마음을 굳이 '연극'이라는 형태로 표현했는지 약간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느티나무 시민연극단이 처음으로 상연한 연극 《기억을 기억하라》
 느티나무 시민연극단이 처음으로 상연한 연극 《기억을 기억하라》
ⓒ 느티나무 시민연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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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영화가 아니다. 한 번에 찍고서 똑같은 걸 반복해서 틀 수 없다. 매 순간마다 새롭게 상연해야 하고, 새로운 상연은 같은 대본으로 하더라도 결코 이전과 같지 않다. 호흡, 순간의 움직임, 눈빛,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뀐다. 관객은 카메라가 제공하는 시야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작은 무대 안에서 자신이 집중하고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다. 공연자들은 그 작은 무대를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 움직인다. 같은 대본을 몇 번씩 읽고 있지만,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

화면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간이 앞에서 움직인다는 게 만들어내는 공기는 특별하다. 인형도 아니고 스크린도 아닌, 언제든 내 삶에 뛰어들 수 있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마음으로 말을 걸어온다. 서사는 물론 '진짜'가 아니지만 사람은 '진짜'로 내 앞에 펼쳐진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공의 힘을 키우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공공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에서 나온다. 이 문제가 내가 아니라 저 사람에게는 어떻게 다가갔을지 상상하는 힘에서 나온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다른 배경에 서 있고, 다른 존재로 완성되었는지 오롯한 개인으로서 인정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연극은 그 모든 것들을 단단하게 훈련시킨다.

내가 맡은 배역은 주인공 '그녀'의 조카다. 서른이 넘은 나는 열아홉 살 소녀가 사라진 고모에 대해 느끼는 애정과 공감을 상상한다. 엄마 아빠에 대한 비죽임, 자기 삶의 외로움, 고모를 볼 때마다 곧잘 기꺼워지는 순간들. 열아홉 살 소녀는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다. 내 삶에서 유추할 수 없는 수많은 시간들이 그녀의 삶에 켜켜이 쌓여 있다. 요즘에는 가끔 <유리가면>의 마야가 했던 것처럼, 그 인물이 되어서 걷고 생각하고 밥을 먹어본다. 나와는 먼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본다. 이제는 몇 달 전까지는 알지도 못했던 열아홉 살 소녀에게 '연대'의 인사를 보낼 수 있다.

며칠만 더 지나면 공연이다. 12월 7일에는 내가 만난 소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게 될 것이다. 느티나무 시민연극단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신이 발견한 연대의 마음을 관객 앞에서 드러낼 것이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신기하고 따스하다. 사라진 그녀를 찾아내 줄 관객의 마음을 상상하게 된다.
 
 《그녀가 사라졌다》, 인권연극제에 출품됩니다. 성동마을극장 12/7 ~12/8. 자세한 내용은 포스터를 참조해주세요.
 《그녀가 사라졌다》, 인권연극제에 출품됩니다. 성동마을극장 12/7 ~12/8. 자세한 내용은 포스터를 참조해주세요.
ⓒ 이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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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극을 하고 있다.
 
▲ [느티나무 시민연극단] ㄱㅡㄴㅕㄱㅏ ㅅㅏㄹㅏㅈㅕㅆㄷㅏ
ⓒ 강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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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느티나무 시민연극단 연극 <그녀가 사라졌다>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참여연대 홈페이지의 http://academy.peoplepower21.org/Notice/24772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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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시민연극단은 현실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개인의 고민과 사회의 갈등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며 우리들의 이야기로 연극을 만들어 가는 모임입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연극워크숍 수강을 계기로 모인, 연극과 삶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닌 일반 시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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