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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슬픔. 풍암정으로 가는 단풍나무길. 제 몸의 전부였던 것을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붉은 슬픔. 풍암정으로 가는 단풍나무길. 제 몸의 전부였던 것을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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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도종환 시인의 시 '단풍 드는 날' 중에서 일부

광주 무등산에서 가장 늦게 가을이 내려앉는 곳, 원효계곡의 단풍나무들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아름답게 불타고 있다. 제 몸속의 붉은 화염을 토해 내며 생의 정절을 이루고 있다.

무등산의 북서쪽을 흐르는 원효계곡의 끝자락에는 단풍나무들처럼 제 삶의 이유를 버리고 세상을 등진 은둔 처사가 머물렀던 정자가 있다. 풍암 김덕보(楓巖 金德普 1571∼1627)가 지은 '풍암정'이다. 풍암정(楓巖亭), 이름 그대로 '단풍과 바위'의 정자다.
 
 풍암정으로 드는 길목의 초입 충효동 도요지 입구. 멀리 뒤쪽으로 무등산 의상봉이 보인다
 풍암정으로 드는 길목의 초입 충효동 도요지 입구. 멀리 뒤쪽으로 무등산 의상봉이 보인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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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암정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저수지, 풍암제의 모습.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이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광주호를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풍암정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저수지, 풍암제의 모습.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이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광주호를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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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풍암정으로 가는 길의 오색 단풍은 아름다움의 경지를 넘어선다. 처연(凄然)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붉은 슬픔이다. 핏빛 화려함 뒤에 숨겨진 처연함의 근원은 나라가 어려울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지만, 그 충성의 대가로 역모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역사와 혼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옹졸한 군주, 선조의 '영웅 죽이기'

우리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조선 중기, 사화와 당쟁이 극으로 치닫던 시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광주 석저촌(石底村 지금의 충효동)에 살았던 김덕홍(金德弘)·덕령(德齡)·덕보(德普) 3형제는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 현감 이귀 등의 권고를 받고 의병을 규합하여 전라도 곳곳에서 왜군들과 맞서 싸우며 곡창 호남을 지켜냈다.

둘째형 덕령은 선조로부터 정 6품 형조좌랑과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을 정도로 충성스럽고 용맹했다. 왕세자 광해군은 '호랑이보다 더 날쌔고 용맹하다'는 뜻의 '익호 장군(翼虎將軍)'의 칭호와 함께 군기를 내렸다. 김덕령 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 광주시 북구 금곡동 충장사에는 '충용문'과 '익호문'이 있다.

고경명(高敬命) 장군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전했던 큰형 덕홍이 고경명 장군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했다. 4년 후 1596년, 작은형 덕령은 전란 중에 발생한 역모 사건, '이몽학의 난'에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아 의금부로 압송됐다.
 
 이즈음 풍암정으로 가는 길의 붉은 단풍은 아름다움의 경지를 넘어선다. 처연(凄然)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이즈음 풍암정으로 가는 길의 붉은 단풍은 아름다움의 경지를 넘어선다. 처연(凄然)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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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다가 환궁한 옹졸한 군주, 선조는 흉흉해진 백성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해 이른바 '영웅 죽이기'를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과 의병장 김덕령을 제물로 삼았다. 이순신 장군은 파직되고 '백의종군'하게 된다.

의병장 김덕령은 역적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선조의 국문을 당한다. 심문은 가혹했다. 형틀에 매인체 정강이 뼈가 부스러지는 지독한 고문을 당하던 중 김덕령 장군은 '춘산곡'이라는 시조 한 수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큰형 덕홍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작은 형 덕령의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 병력이었다. 의금부 앞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막내 동생, 덕보의 눈앞에 형 덕령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나왔다. 1596년 8월 21일의 일이었다.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던 '충(忠)'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형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호남 의병장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 세상을 등지다

김덕령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전쟁의 영웅들은 피신하거나 은거했다. 영남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는 의병을 해산하고 산속에 숨어 화를 면했다. 도원수 권율 장군은 선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계를 띄웠다. 호남과 영남 등지에서는 의병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무등산 원효계곡에 자리한 풍암정은 호남의병장 김덕령의 동생, 풍암 김덕보(楓巖 金德普 1571∼1627)가 지은 정자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15호
 무등산 원효계곡에 자리한 풍암정은 호남의병장 김덕령의 동생, 풍암 김덕보(楓巖 金德普 1571∼1627)가 지은 정자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15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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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주검을 수레에 싣고 고향땅 광주로 내려오는 동생의 흉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열흘을 넘게 걸어 고향에 도착한 동생 덕보는 고향마을 석저촌에 형의 시신을 묻었다. 이미 몇 해 전에 큰형 덕홍을 잃은 터라 슬픔은 배가 됐지만 덕보는 눈물을 삼켰다.

제 백성조차 지켜 주지 못한 무능한 군주와 형을 죽인 세상을 한탄하며 김덕보는 아무도 모르게 지리산 골짜기에 은거했다. 화전을 갈고 날품팔이를 하며 철저하게 은둔했다. 그렇게 몇 년간을 숨어 지내다 고향으로 돌아와 무등산의 깊은 계곡에 정자를 세우고 자신의 호, '풍암(楓巖)'을 따서 풍암정이라 불렀다.

전쟁으로 두 형을 잃은 김덕보는 이곳 풍암정에서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유유자적했다. 무등산 주변 사람들과 교유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은둔 처사의 삶을 살았다.
 
 무등산에서 발원한 역사의 물길이 풍암정 앞을 도도히 휘돌아 나가고 있다
 무등산에서 발원한 역사의 물길이 풍암정 앞을 도도히 휘돌아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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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형 김덕령이 죽은 지 31년 지나고 이 땅에 또 다른 전쟁의 역사가 되풀이됐다. 1627년(인조 5년)에 발생한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이번에는 금나라가 쳐들어 왔다. 세상일에는 뜻을 두지 않고 풍암정에서 학문연구에만 몰두하던 김덕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때 그랬던 것처럼 김덕보는 친구인 은봉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지만, 노환으로 거병하지 못하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모집한 의병들을 안방준에게 넘겨주고 세상을 떠났다.

원효계곡의 끝자락에 자리한 풍암정은 푸른 이끼로 뒤덮인 바위 사이 커다란 전나무와 노송 사이에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다. 무등산에서 발원한 역사의 물길이 풍암정 앞을 도도히 휘돌아 나가고 있다.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풍암정에 들렀다가 남긴 글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정자앞 커다란 바위에는 풍암(楓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자앞 커다란 바위에는 풍암(楓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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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기암괴석과 큰 바위 사이에 백여 그루가 넘는 단풍나무가 끼어 있어 서리 맞은 단풍잎이 떨어져 물에 잠기니 계곡물 조차 붉게 물들었다..."

지금 그때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만, 은둔 처사의 집으로 가는 길목의 단풍나무들은  제 몸의 전부였던 것을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생의 절정에 서있다. 400여 년 전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의로운 형제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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