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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배움터경당)은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며 2014년부터 해마다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열어왔습니다. 매해 가을, '교육'(2014), '글쓰기'(2015), '역사'(2016), '마을'(2017), '진실-언론과 정치'(2018)에 관해 공부했습니다.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뜻깊은 배움을 이어온 지난 시간을 발판 삼아 올해도 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를 엽니다.

2019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주제는 '生의 命 - 農농·革혁·美미·言언'입니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의 질문 앞에 애타는 목마름으로 그 이유와 길을 묻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김준권 평화나무농장 대표(農농) · 김종훈 오마이뉴스 기자(革혁) · 유순혜 화가(美미) · 최봉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대표(言언). 주제마다 이끌어주실 길잡이 선생님들입니다. 이들을 통해 '生의 命'의 음성을 좀 더 선명히 듣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9월부터 12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마다 열립니다. (2019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소개 보러가기) - 기자 말



'최한솔.' 순우리말로 높고 큰 소나무라는 뜻이다. 막내 이모가 지어주셨다. 이름 때문일까. 어려서부터 소나무가 좋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는 이름 뜻을 풀어 자기소개서에 참 많이도 써먹었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사람이 되겠다. 곁에 까치가 있으면 길조를 뜻하고, 학이 있으면 장생을 뜻하는 소나무처럼 함께하는 이들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겠다. 그렇게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했었다.

'솔아.' 지인들은 나를 친근하게 부를 때 이름의 끝 자만 따서 부르곤 한다. 이름이 불릴 때, 기분이 좋다. 교사로 있으니 '선생님'이라 불릴 때가 많은데, 아이들이 '한솔샘' 하고 이름을 불러주면 새삼 기분이 좋아진다. 너무 익숙하지만, 이렇게 때때로 좋아지곤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道)'에 대해 설명하며,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라고 했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무어라 따지기 어렵고, '도(道)'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에야 만물의 모태로서 설명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즉, 이름으로 존재가 인식되고, 존재 이유를 부여받으며, 이름이 곧 그 존재가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이다. 이름을 불러줄 때, 그때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이름은 불리는 것이다.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이름 아니겠는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우리나라 속담도 있듯이 살아서는 불리고, 죽어서는 남는 것, 그것이 이름이다. 우리는 이름으로 산다.

그런데 여기, 살아서도 불리지 못하고, 죽어서도 남지 못한 이름들이 있다. 2019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두 번째 시간을 마치고 돌아와 잠들기 전,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뇌었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간 이름들을, 역사만 기억하고 있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라고 부르자

2019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생의 명-농農·혁革·미美·언言 두 번째 시간 주제는 '혁(革)'이다. 우리를 '혁(革)'의 길로 인도해준 이는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다. 그는 최근에 <임정로드4000km>와 <약산로드7000km> 두 권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강의를 시작하려는데 김종훈 기자가 대뜸 사과한다. 강의 제목을 바꿔야겠다는 것이다. 본래 강의 제목은 임정로드를 소개하는 '일생에 한 번은 김구의 계단에 서라!'였으나 이날 주제인 '혁(革)'에 더 어울리는 것은 약산 김원봉인 것 같다며 <약산로드7000km>의 내용을 중심으로 강의를 하겠다고 했다.    

 
 열강을 예고하는 김종훈 기자. 김원봉 장군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왔다. 강의할 때마다 입는 유니폼이라고 했다.
 열강을 예고하는 김종훈 기자. 김원봉 장군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왔다. 강의할 때마다 입는 유니폼이라고 했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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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라고 부르자."

그가 새롭게 내놓은 제목이다. 참석자들은 되려 새로운 주제가 '혁(革)'과 더 잘 어울린다며 환영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임정로드4000km>와 <약산로드7000km> 두 권의 책을 모두 꼼꼼히 읽어왔다. 모든 이야기를 해주려는 김종훈 기자의 열정에 더없는 화답인 셈이다.  

   
 김종훈 기자의 강의를 기대하며 환영하고 있는 참석자들.
 김종훈 기자의 강의를 기대하며 환영하고 있는 참석자들.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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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을 만나다

사비를 탈탈 털었다. 휴가도 반납했다. 김종훈 기자는 지난 2년간 약산 김원봉의 자취를 좇기 위해 틈날 때마다 밀양으로, 중국으로 향했다. 주말이면 밤낮없이 글을 썼다. 본업에도 충실하며 기사도 열심히 썼다. 그가 2년이 넘도록 발자취조차 흐릿한 김원봉의 이름을 따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1910년 밀양보통공립학교 시절, 일왕 메이지의 생일이었다. 김원봉은 평생의 동지 윤세주와 평소보다 일찍 등교한다. 당시 일왕의 생일은 연중 가장 큰 행사였다. 전교생의 책상에는 일장기가 펼쳐져 있었다. 김원봉과 윤세주는 일장기를 모두 걷어 보란 듯이 똥통에 투척한다. 그의 나이 열둘이었다. 이 일로 인해 김원봉은 맞는다. 졸지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그런 그를 받아준 곳은 전홍표 교장이 있는 동화중학이다. 전홍표 교장은 학생들을 모아 체력과 병법을 익히는 연무단을 만들기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그는 김원봉의 애국심을 더욱 고취했다.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 민족의 운명은 언제나 슬프고 비참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이 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한때라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전홍표 교장은 3.1운동에도 크게 기여한다. 면사무소 등사기를 몰래 빼내 태극기를 수백 매씩 인쇄하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등 3.1운동에 전력을 다한다. 일제의 폭력 진압에 맞서 조선이 해방하는 방법은 오직 무장투쟁이라는 내용의 '고천문高天文'을 지어 발표하기도 한다.

맹렬히 의를 행하다, 의열단

김원봉 역시 강력한 일제에 대항해 자주독립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무력투쟁뿐이라고 생각했다. 비폭력으로는 결코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군대가 필요했다. 김원봉은 동화중학 이후 중앙고등학교에서 만난 동지 약수 김두전과 여성 이명건과 함께 중국에서 군대 창설을 도모했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났다. 민중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이 소식을 들은 김두전과 이명건은 고국으로 돌아가 힘을 보태겠다고 했다. 김원봉은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읽고 무장투쟁의 내용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일제는 더 악랄하게 민중을 탄압했고, 민중들의 고초에 김원봉 또한 가슴 아파했다. 비폭력으로 맞설 수 없다는 김원봉의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김두전과 이명건이 고국으로 돌아가자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를 찾는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등 애국지사들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기관이다. 그곳에서 총기류 취급, 폭탄 제조법 등 실전에 필요한 기술을 배웠다. 무엇보다 함께 군대를 꾸릴 동지들을 만났다.

1919년 11월 10일, 옳을 의(義), 매서울 열(烈). 드디어 김원봉은 맹렬하게 의를 행하는 군대라는 의미를 담아 의열단(義烈團) 창단한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난 열 명의 동지와 함께. 그의 나이 스물하나였다.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團義) 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何時何地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9. 하나가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반배(返背)한 자를 처살(處殺)함.
       
 참석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의 걸음 앞에 숙연해지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함께하는 배움은 즐겁다. 김종훈 기자의 열정도 한몫 했다.
 참석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의 걸음 앞에 숙연해지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함께하는 배움은 즐겁다. 김종훈 기자의 열정도 한몫 했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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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회에 응한 박재혁, 의열단원의 기개

의열단은 창립하자마자 곧바로 의거를 준비한다. 하지만 거사를 치르기도 전에 밀정에 인해 다수의 단원이 체포된다. 의열단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김원봉은 싱가포르에 있는 의열단원 박재혁에게 전보를 보낸다.

"박 동지가 1차 의거 실패의 원흉 부산경찰서장을 죽여야겠소. 죽이되 그냥 죽여서는 안 되오. 누구 손에 무슨 까닭으로 죽는지 단단히 수죄를 한 후에 죽여야 하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한다'는 의열단 공약에 따라 박재혁은 바로 실행에 옮긴다. 부산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 전, 그는 김원봉에게 마지막 전보를 보낸다.

"가기허다수익(可期許多收益), 불가기재견군안(不可期再見君顔)
많은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당신의 얼굴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포악하기로 유명했던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는 중국 고서광이었다. 박재혁은 고서상으로 위장했다. 치밀하게 준비했다. 상하이에서 수권의 고서를 구해 상자 안에 담았다. 거사를 치를 폭탄과 함께. 마침내 박재혁은 하시모토를 마주한다. 준비해 온 고서들을 한 권 한 권 꺼내어 건냈다. 하시모토의 신경이 고서에 향해 있을 때, 그는 외쳤다.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인다."

그리고 폭탄을 던졌다. 하시모토는 이내 사망했고, 마주 앉아 있던 박재혁 역시 심한 부상을 입고 체포된다. 죽이는 이유까지 알리라고 지시한 김원봉.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를 실행한 박재혁. 의열단의 기세는 이러했다. 박재혁은 심한 부상과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다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에 박재혁은 왜놈 손에서 죽을 수 없다며 곡기를 끊고 옥사한다.

  
 이름조차 생소한 박재혁 지사. 그는 치밀했고 대범했다. 현존하는 유일한 사진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박재혁 지사. 그는 치밀했고 대범했다. 현존하는 유일한 사진이다.
ⓒ 퍼블릭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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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재혁'이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초·중·고 12년에 걸쳐 역사를 배웠건만, 거론되는 이름 모두가 생소했다. 다음 세대가 발 딛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온 생을 바친 이들의 이름을 이토록 철저하게 가린 이는 누구인가. 

독립운동가 김익상의 쓸쓸한 말로

1921년, 의열단원들은 또 다른 암살 거사를 앞두고 베이징 모처에 모였다.

"장사일거혜! 불복환"

장사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거사를 앞두고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 모두가 알게 모르게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한 사내가 담담하게 말한다.

"쓸데없는 소리 말게. 일주일이면 넉넉히 성공해 돌아올 것이니 술상이나 차려놓고 기다리게."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밀정>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장면으로 꼽는 장면이 있다. 폭탄을 실은 자전거를 탄 학생이 담담히 조선총독부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그 학생이 바로 이 김익상이다.
 
 독립운동가 김익상을 수배하기 위하여 일제가 작성한 인물카드.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이 없다.
 독립운동가 김익상을 수배하기 위하여 일제가 작성한 인물카드.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이 없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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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은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해 총독부 건물로 들어갔다. 2층 비서과에 폭탄을 던졌다. 불발이었다. 회계과에도 던졌다. 이번에는 폭파했다. 분주하게 피신하는 인파 속에 몸을 숨겨 총독부 건물을 빠져나온 뒤 목수로 위장해 기차를 탔다.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6일. 6일 만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약속을 지켰다. 그날 총독부 건물을 폭파한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의거는 그 다음해가 되어서야 밝혀졌다.

민첩하고 대범한 김익상이지만 이후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의거에 실패하고 체포된다. 이로 인해 김익상은 감옥에서 장장 20여 년을 살았다. 1942년 5월, 출소하여 고향에 돌아오니 동생은 일제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고, 부인과 딸은 행방불명이었다. 고향에 머문 것도 잠시, 이유도 모른채 다시 일본 순사에게 잡혀간다. 그 길로 행방불명된다. 이쯤 되니 혹독한 역사 앞에 탄식이 솟구친다.
  
   
 예고한대로 열강하는 김종훈 기자. 열공하는 참석자들.
 예고한대로 열강하는 김종훈 기자. 열공하는 참석자들.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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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주의자 김원봉

일본은 김원봉을 잡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의 몸값은 현재 기준으로 320억 원에 달했다. 의열단은, 김원봉은 그만큼 두려운 존재였다. 일제의 압박을 피하고자 김원봉이 사용한 이름은 수십 개가 넘는다. 한 곳에 이틀 이상 머무는 법이 없었다.

의열단은 시작일 뿐이었다. 김원봉은 이후에도 여러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이어간다. 1926년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독립운동가를 길러낸다.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으로는 시인 이육사, 천재 작곡가로 중국 국가인 '중국인민해방군가'를 만든 정율성, 일제의 심한 고문에 답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 혀가 잘린 김시현 등이 있다. 김시현은 영화 <밀정>에서 배우 공유가 연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38년 10월에는 우리나라 국군의 뿌리가 되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총통 장제스가 있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중국은 전력으로 싸웠으나 일본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때 김원봉은 중국과 협의를 시도한다. 군대를 만들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전한다.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1932년에 일어난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윤봉길의 의거를 두고 "중국의 백만 군대가 못한 것을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기꺼이 김원봉을 지원하기로 한다. 마침내 조선의용대가 탄생했다.

 
 우리나라 국군의 뿌리가 된 조선의용대 창립 사진.
 우리나라 국군의 뿌리가 된 조선의용대 창립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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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원봉의 고민은 깊어졌다. 중국 우한지방이 일본에 함락당하고, 조선의용대 세력이 나뉘는 등의 일을 계기로 김원봉은 오랜 고민 끝에 김구가 있는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한다. 조선의용대 또한 임시정부 산하에 있는 광복군에 편입하기로 한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통합정부를 이뤘다. 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통합정부를 이뤘다. 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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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편입 후 조선의용대는 진가를 발휘한다. 조선의용대가 편입하기 전 광복군의 활약은 미비했다. 조선의용대가 편입하자 그제야 비로소 군대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김원봉의 임시정부 참여는 좌우합작 정부의 탄생을 의미하는 독립운동사에 중대한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김원봉은 이미 1939년 5월 김구와 공동으로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발표해 자주독립국이 걸어가야 할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원봉과 김구가 공동 발표한
<동지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신> 정치 10강령

1.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해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함
2. 봉건세력 및 일제의 반혁명 세력을 숙청하고 민주공화제를 건립함
3. 국내에 있는 일본제국주의자의 공사 재산 및 애국저거 친일파의 일체 재산을 몰수함 
4. 공업·운수·은행과 기타 산업부문에서 국가적 의의가 있는 대기업을 국유로 함
5. 토지는 농민에 분급하되, 토지 매매를 금지함
6. 노동시간을 감소하며 노동에 관한 각종 사회보험사업을 실시함
7. 부녀의 정치 경제 사회상의 권리 및 지위를 남자와 평등으로 함
8. 국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가 있음
9. 국민의 의미교육 및 직업교육을 국가의 경비로 실시함
10. 자유·평등·창조의 원치에 기초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촉진함

김원봉은 수년간 조국 독립을 위해 달려왔다. 수많은 성과를 낳았다. 오직 조국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강력한 무장투쟁 단체를 만들었고,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 자신이 전생을 바쳐 만든 군대를 내려놓고, 자신을 굽혀 광복군에 편입하는 선택을 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바쳤고, 모든 걸 내려놨다.

김원봉과 달리 자신의 실리를 위해 동지는 물론이고, 조국까지도 저버리는 친일파들이 있다. 버젓이 떵떵거리며 사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답답할 노릇이다. 어찌 그런 자들의 이름이 남고, 김원봉의 이름은 묻혀야 하는지. 목이 터져라 외치는 김종훈 기자의 심정이 전해진다.

1945년,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는다. 그날이 왔다. 그날은 왔다. 하지만, 김구와 김원봉이 바라는 나라를 이루지는 못했다. 미국에 의한 반쪽짜리 해방이었다. 

함께하면 길이 된다

저녁 8시에 시작한 강의는 밤12시가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끝났다기보다는 끝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네 시간이 다 되도록 강의가 끝나지 못한 이유는 '이름' 때문이다. 아직도 모르는 이름이, 불리지 않은 이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름들을 다 부르려면 네 시간으로도 부족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애썼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은 지키지 못했다. 누구도 그들의 이름을 지켜주지 않았다. 김종훈 기자는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라고 부르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러면서도 김종훈 기자는 비록 답답한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도 역사는 발전하고 있다고 기뻐했다.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 여사의 작고 초라한 묘 앞에 안내판을 세워 둔 학생들, 찾아가기 힘든 곳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 천녕사 입구에 표식을 붙여둔 '김포청소년역사문화탐구단' 선생님들과 학생들, 김종훈 기자의 <임정로드4000km>를 읽고 인증샷을 올리는 수많은 시민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함께 길을 만들어가자고 했다.

      
 참가자들 모두 집중해서 강의를 들었다.
 참가자들 모두 집중해서 강의를 들었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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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그 위에 새겨야 할 이름들

<임정로드4000km>, <약산로드7000km>의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뭔가를 하고 싶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뒤를 이었다. 김종훈 기자는 두 권의 책이 역사책이 아니라 가이드북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많이 찾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곧 철거되어 흔적조차 사라질 곳이 길이 된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표지석이라도 세우러 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강의를 앞두고, 나 홀로 서울 임정로드를 떠났다. 1959년 이승만이 지은 효창공원에서는 축구대회가 한창이었다. 들리는 환호성을 뒤로하고 뒤켠에 있는 김구 선생님의 묘역을 찾았다. 이봉창 의사 동상도 있었다.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투척하고 죽음을 맞은 나이는 내 나이, 서른둘이었다.

    
 김구기념관은 내부 공사로 조기 폐관하는 바람에 들어가진 못했다. 다음에 꼭 가보리라. 아쉬웠지만 그래도 웃어보았다.
 김구기념관은 내부 공사로 조기 폐관하는 바람에 들어가진 못했다. 다음에 꼭 가보리라. 아쉬웠지만 그래도 웃어보았다.
ⓒ 최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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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 인사만 하고 내려올 수가 없어, 가져간 백범일기를 꺼내들었다. 나의 소원을 읽었다. 사진은 삼각대로 찰칵.
 차마 인사만 하고 내려올 수가 없어, 가져간 백범일기를 꺼내들었다. 나의 소원을 읽었다. 사진은 삼각대로 찰칵.
ⓒ 최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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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창 의사는 수류탄을 들고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했다. 이봉창 의사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 친필.
 이봉창 의사는 수류탄을 들고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했다. 이봉창 의사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 친필.
ⓒ 최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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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듣기 전에는 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다. 강의를 듣고 나니 희망이 보였다. 오늘 들은 이름들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길을 만드는 첫 걸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잊지 않겠노라, 매일 부르겠노라 다짐했다. 
    
네 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김종훈 기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함께한 70여 명의 참석자도 가슴이 뜨거웠다. 강의 이후 열강에 감사를 표하며 많은 이들이 소감을 남겼다. 일부를 소개한다.

김규성(20) 학생은 강의를 들으며 독립운동가에겐 어둡고 친일파에겐 빛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이토록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잘못 돌아가고 있는 이 땅의 역사가 슬프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뜨거워지며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했다. 더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나는 것이다. 앞으로도 발전할 역사를 기억하며, 그 역사를 맞이할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역사를 지켜가겠다고 다짐했다.

최필규(17) 학생은 결국 역사의 진보는 젊은 우리들의 몫인 것 같다며, 아픈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끝까지 기억해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시원(16) 학생은 강연을 듣는 내내 마치 독립운동가가 된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며 여태까지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더하여 김종훈 기자처럼 많은 사람에게 역사를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사 박애영(40) 씨도 부끄럽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알게 되어 다행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을 잘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잘 기억하고 배워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잘 알려주겠다고 했다.
    
오늘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이 걸어간 길을 만났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김종훈 기자를 만났다. 이제는 우리가 걸어갈 차례다. 그 길에 분명히 새겨져야 할 이름들을 불러본다. 

김원봉 윤세주 전홍표 김철성 김두전 이명건 한봉인 여운형 곽재기 강세우 김상윤 서상락 신철휴 이성우 이종암 한봉근 황상규 배동선 김기득 이성우 손정도 박차정 이육사 김산 이회영 신채호 김상덕 김상옥 조소앙 박재혁 김익상 이집중 김구 김시현 ...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했던 그사람이여!
사랑했던 그사람이여!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켜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했던 그사람이여!
사랑했던 그사람이여!

저녁해는 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저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 이름 부르노라.
나는 그대 이름 부르노라.

-초혼, 김소월


 
 3시간 45분의 강의를 마치고 다같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독립운동가 김원봉처럼 당당하고 거만한 기세로 사진을 찍었다.
 3시간 45분의 강의를 마치고 다같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독립운동가 김원봉처럼 당당하고 거만한 기세로 사진을 찍었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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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하듯 온 힘을 다해 참가자들에게 사인해주고 있는 김종훈 기자
 강의하듯 온 힘을 다해 참가자들에게 사인해주고 있는 김종훈 기자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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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생의 명-농農·혁革·미美·언言 세 번째 시간 주제는 '미(美)'다. 길잡이는 유순혜 작가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으로 인해 재개발이 제한되면서 낙후되어 가던 수원 지동마을은 유순혜 작가의 벽화를 만나 활기를 되찾았다.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에서는 수원 지동마을을 방문해 함께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11월 29일(금), 유순혜교수를 다시 만난다. '일상을 예술로!'라는 주제로 저녁 7시 30분 새들생명울배움터 연구소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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