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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등 경제 보복을 감행해 한일관계가 냉랭해진 가운데, 8.15 광복절을 앞두고 일본의 양심적 작가가 조선에 대한 배려와 한일우호를 강조한 시가 공개됐다.

해당 시는 마쓰다 도키코(1905∼2004)라는 일본 작가가 쓴 '8월의 염천에'라는 작품으로,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일본문학 전공)가 번역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6.25 전쟁 반대와 한일우호의 염원을 담은 '8월의 염천에'는 <마쓰다 도키코 자선집> 제9권(사와다출판, 2009년) 중 제2부 '전후(戰後)의 시'편에 수록돼 있다. 
 
 79세 때의 마쓰다 도키코.
 79세 때의 마쓰다 도키코.
ⓒ 김정훈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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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시는 6.25가 한창인 1951년에 쓰였다.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들을 만나 6.25 전쟁 반대와 평화를 지지하는 '서명'을 받는 내용이 배경으로,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무기 수출' 등 이득을 취하고 전후 부흥을 꾀하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마쓰다 도키코는 시를 통해 전쟁 상황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싶다"고 말하며 일본인 4000만 명을 대신해 "조선에, 그리고 세계와 일본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싶소"라고 노래했다.  

마쓰다는 계속해서 "일본 국민 우리는 일본에서 조선인에 대한 살육폭탄을 실은 비행기를 띄우고 싶지 않소"라며 "이 순간 일본 국민 우리들 중 한사람이라도 조선의 친구를 죽이는 무기를 만들지 않도록. 이 순간 일본의 하늘에서 일본의 땅에서 살육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한 대라도 날개를 펼치지 않도록…"이라고 썼다.

또 "'남편이라고요? 있었죠. 있었지만 벌써 이 상태로 몇 년인지'라며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억누른 부인도 떨리는 오른손으로 연필을 쥐었소"라며 "그저 이름을 써서… 만일 그걸로 전쟁이 끝난다면 아아, 쓰고 말고. 뭐 하나 가능한 게 없는 우리이니 적어도 그 정도쯤이야"라고 안타깝게 노래했다.  

김정훈 교수 "양심적 한일 시민들의 연대와 교류, 더 강화돼야"

마쓰다 도키코를 국내에 처음 소개, 연구해온 김정훈 교수는 지난 11일 "마쓰다는 6.25전쟁 중에 남북의 상황을 주시하며 일본이 이웃나라 전쟁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조선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냈다. (해당 시에서) 마쓰다의 조선과 동북아, 나아가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시속에 묘사된 서명운동에 대해 "(한반도) 남북이 분단돼 전쟁 중인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을 지지하는 일본의 진보적 작가들이 반전 평화 사상을 부르짖고, 조선인을 생각하며 반전 서명운동을 하는 상황이 시속에 담겼다"라며 "마쓰다는 당시 조선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일본에선 쉬쉬하고 금기시하는 작가"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 "일본의 일방적 조치로 시작된 경제 전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일본의 양심적 작가의 목소리에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라며 "한일 평화와 공존을 원하는 일본 국민들이 적지않다. 양심적 한일 시민들의 연대와 교류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 '8월의 염천에'가 실린 <마쓰다 도키코 자선집> 제9권.
 시 "8월의 염천에"가 실린 <마쓰다 도키코 자선집> 제9권.
ⓒ 김정훈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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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쓰다 도키코는 1905년 일본 아키타현 센보쿠군에서 태어나 가난한 광부의 딸로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광산회사 사무실에서 타이피스트 겸 급사로 일하며 조선인 및 일본인 노동자, 중국인 포로들이 광산에서 비참하게 강제노역하는 모습을 보고 글쓰기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선인 강제동원자 11명과 일본인 노동자 11명이 광산 노동 중 매몰사고로 생매장당한 '나나쓰다테 사건'을 소설화한 <땅밑의 사람들>(1951), 1945년 일어난 중국인 포로들의 '광산 봉기' 사건을 조명한 르포 <하나오카 회고문>(1975)이 김 교수에 의해 국내에 번역, 출판돼 있다.        

아래는 시 전문이다. 

8월의 염천(炎天)에

8월의 염천에
우리도 당신(조선인)들도 땀에 흠뻑 젖었소.
다가올 나날들에 대비해 우리는 당신들을 돌아보았소.

어떻든 우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소.
일본 4천만 표의 서명
이를 무기로, 또한 이를 증거로 조선에,
그리고 세계와 일본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싶소.

그 4천만 표에 한 표라도 더 보태고 싶다오.
"일본 국민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있소"
"일본 국민 우리는 일본에서 조선인에 대한 살육폭탄을 실은 비행기를 띄우고 싶지 않소. 일본 국민 우리 몸속에도 세계의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소"

"이 순간 일본 국민 우리들 중 한사람이라도 조선의 친구를 죽이는 무기를 만들지 않도록…. 이 순간 일본의 하늘에서 일본의 땅에서 살육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한 대라도 날개를 펼치지 않도록…"

그래 당신들과 일면식이 없다고 해서 
어찌 이 소원을 빌지 않으리오. 
더구나 당신들과 몇 십 년의 지기(知己)인데 
어찌 이 소원을 소원으로 언급하지 않으리오.

우리는 수영도 하지 못하면서도 물가로 나가는 모습으로
그대들 바다 속으로 매일 뛰어들었소.
  
그대들의 가난은 바다처럼 깊고
그대들의 과거 현재는 눈물의 심연
그대들의 다수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소.
전쟁으로 자식을 잃었소. 
집은 화재로 소실되었소. 

그대들 중 어떤 부인은 직장을 빼앗겨 정신이 나간
남편과 어린애 셋을 두고 있었소.  
"써주세요. 전 글씨를 못 쓰니까 써주세요. 
혹독한 전쟁으로 아들을 잃었어요, 손자도 잃었어요, 
전 이 세상에서 혼자뿐이라오……"

그대들 중 어떤 할머니는 복지출장소 앞 널다리에서
가랑비에 흠뻑 젖은 채 이렇게 말했소.
"남편이라고요? 있었죠. 있었지만 벌써 이 상태로 몇 년인지"라며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억누른 부인도 
떨리는 오른손으로 연필을 쥐었소.

"그저 이름을 써서…… 만일 그걸로 전쟁이 
끝난다면
아아, 쓰고 말고.
뭐 하나 가능한 게 없는 우리이니
적어도 그 정도쯤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해저물녘 노지에서 "우리도 한 장, 우리도 한 장" 하며
서명 용지를 받아준 앞치마를 두른 부인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이름도 대지 않고
허둥지둥 핸드백에서 꺼낸 서명용지에
역시 이름도 대지 않고 거침없이 주소와 이름을
써준, 엷은 화장을 한 젊은 부인

"그 종이 두고 가지 않을래요? 우리 가족도 모아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마디 구부러진 손을 펼친 부인의
집 부근에서는 눈이 쓰릴 정도로 타는 냄새가 났소.

이 8월의 염천 하에 
또 네이팜탄을 실은 비행기인가?
침략군의 사체를 옮기는 비행기인가?
우리와 그대들의 머리 위를 계속 날아다녔소.

―이 순간에도 목숨을 잃고 있다오.
―이 순간에도 목숨을 잃고 있다오.
스쳐지나가는 비행기를 노지에서
푸른 하늘을 향해 노려보던
우리는 그대들의 형체를 쫓았소.

우리의 서명판 위에
그대들의 한 글자 한 글자
그대들의 평화에 대한 의지
그대들 조선인에 대한 사랑의 증표가 쌓인
열, 스물, 삼십, 오십, 백…….
그 순간 우리의 동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맡은 서명판에도
일찍부터 그게 쌓여 있었소.

그것은 어제의 일이며 오늘의 일
그리고 내일의 일…….
증표가 증명될 것인지 아닌지
이 8월의 염천 하에
우리는 그대들 속으로
우리는 그대들 속으로.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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