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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충식 장익환 창의숭모비
 장충식 장익환 창의숭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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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정 공원에서 만난 장충식·장익환 부자 창의숭모비

장림역 터에 세워진 대강초등학교를 떠난 회원들은 한강에 놓인 상진대교를 건너 단양읍내로 들어간다. 단양읍은 충주댐 건설로 구단양이 수몰되면서 1985년 상진리에 들어선 신도시다. 길은 한강 서쪽 강변을 따라 상류로 이어지고, 길 양쪽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소금정(邵今鼎)공원에는 의병 장충식 장익환 부자 창의숭모비가 있다. 그리고 항일투사 김용재(金用才) 충의비도 있다.

현장에는 장충식 선생의 고손자인 장영구 제천의병유족회장 6남매가 마련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창의숭모비와 충의비를 찾아온 회원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것이다. 창의숭모비 앞에는 주과포로 이루어진 제상이 차려져 있다. 장영구 회장이 두 분께 잔을 올린다. 제주는 역시 대강막걸리다. 회원들은 순서에 따라 예를 올리고 음복을 한다.
 
 아베규탄 데모
 아베규탄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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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일본의 아베정권을 규탄하는 데모도 연다. 장영구 회장이 'NO 경제침략 아베 강력규탄' '극일 경제운동 일본 정복하자'는 두 가지 보드판을 준비했다. 장회장이 대표로 문구를 선창하고, 회원들이 따라 하는 형식이다. 요즘은 데모도 즐겁게 한다. 그리고 짧고 간명하게 한다. 그 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시대상황을 반영한 의미 있는 행사였다.

사객으로 호좌의진에 참여한 장충식(1836-1901) 선생은 의병 참가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단양 별곡(別谷) 출신으로 민비 집안과의 인연으로 1886년부터 중앙에서 벼슬을 했다.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으로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자 장충식은 호좌의진에 합류해 사객이 되었다. 사객은 의병에 참여하는 선비들을 맞아들이고,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 의병대 운영에 반영하는 역할이다. 그러므로 선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원로였던 그가 사객을 맡은 것이다.

장충식은 의병과 관련해 『산거만록(山居漫錄)』과 『을년일기(乙年日記)』를 남겼다. 장익환은 『수문록(隨聞錄)』을 남겼다. 유인석(柳麟錫)이 지은 장충식의 행장과 이근원(李根元)이 지은 장충식의 묘갈명도 그의 의병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896년 3월 장충식은 호좌의진 지도부에 10개항의 건의문을 올리는데, 이곳에 그의 의병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그 중 핵심은 네 가지다.
 
 의암 유인석의 유품
 의암 유인석의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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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모의 원수를 갚는 일이 의거의 이유다. 둘째 팔도의병을 통일적으로 지휘할 명망가 대장을 추대하자. 셋째 친소귀천(親疏貴賤)을 가리지 않고, 충의 지략 용감의 세 가지 덕목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자. 넷째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말고 군대를 동원하여 서쪽으로 나아가자. 그러나 장충식의 주장은 안승우가 이끄는 장담학파의 주장과 부딪치며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1901년 세상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평화로운 시대 나고 자라 난세에 죽지만     生長昇平死亂時
다행히도 의발을 지켜 오랑캐는 면했네.     幸吾衣髮免爲夷
자고로 이렇게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지만    此行從古人難挽
간단한 그 이치를 이제야 난 알겠네.          其理於今我自知
나라 원수 못 갚으니 죽기도 한스러워        未報邦讐歸亦恨
가산을 이미 전했으니 검소하게 살아다오.   已傳家産儉應師
고향의 선비친구들, 와서 통곡을 하되         玆鄕士友如來哭
내가 아닌 나라를 위해 슬퍼해 다오.           莫爲人悲爲國悲


온달산성 오르는 길
 
 온달산성
 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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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 이강년의 의병부대는 1907년 10월 7일 영월을 떠나 단양 영춘으로 들어온다. 온달산성을 지나 소백산 자락 남천리로 들어갔다가 어상천을 거쳐 영월 주천으로 이동한다. 이들 의병부대가 다시 단양 영춘으로 들어온 것은 11월 12일 이후다. 그들은 다리안, 어의곡, 보발재를 넘어 영춘면 용진리로 들어간다. 그리고 베틀재를 넘어 의풍리에 이른다. 그것이 11월 16일이다.

우리는 의병부대의 자취를 찾아 온달산성으로 올라간다. 온달산성은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있다. 일반적으로 온달관광지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0분 정도면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발재까지 버스로 올라간 다음 다시 내려와, 최가동과 화전민촌으로 난 길을 따라 버스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걸어서 온달산성을 찾아간다. 이 길이 소백산자락길 제6코스 온달평강 로맨스길이다.

이 길에는 최가동, 방터 등 옛날 화전민촌이 있다. 이 길 끝자락에 2009년 화전민촌이 재현되어 있다. 우리는 화전민촌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틀어 온달산성 방향으로 내려간다. 길이 잘 나 있어 승용차로도 접근이 가능할 정도다. 길 끝에서 차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오솔길이 이어지고, 그 위로 온달산성이 보인다. 우리는 북문지를 통해 산성 안으로 들어간다.

온달산성의 역사적 의미
 
 온달산성의 의미에 대해 설명 듣는 회원들
 온달산성의 의미에 대해 설명 듣는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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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은 삼국시대 조성된 테뫼식 산성이다. 동쪽과 북쪽으로 한강이 돌아 흐르고, 남동쪽으로 소백산 연봉을 올려다 볼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다. 온달장군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에 따르면 그는 고구려 장군이다. 신라에게 뺏긴 계립현(雞立峴)과 죽령(竹嶺) 땅을 회복하기 위해 아단성(阿旦城)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아단이 영춘의 옛 이름이다. 기록에 따르면 영춘의 고구려 때 이름이 을아단(乙阿旦)이었다. 그리고 죽은 온달을 운구해간 것이 평강공주로 나와 있다. 온달평강 로맨스길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로맨스가 아니고 죽음이다. 정확히 말하면 황천길이다. 역사는 이처럼 사실과 다른 스토리텔링으로 변하기도 한다. 영춘과 온달산성 지역에 또 의병과 관련한 어떤 스토리가 만들어질지 궁금하다.

소금정 공원에서 만난 또 다른 두 인물
 
 소금정 공원
 소금정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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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정 공원에는 조선후기 학자이자 문인인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과 현대시인 신동문(辛東門: 1928-1993)을 기리는 시비가 있다. 권섭은 수암 권상하의 조카로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청풍 황강을 중심으로 풍류를 즐기며 산 영원한 자유인이다. 저서로 13권 7책의 『옥소집(玉所集)』과 필사본 『옥소고(玉所稿)』가 있다. 이들 문집에 수록된 한시가 3,000여 수, 시조가 75수, 가사가 2편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다.

이곳 소금정 공원에는 권섭의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 중 제9곡 구담(龜潭)을 시비로 새겨 놓았다. 이 시에서 일각(一閣)은 구담봉 위의 정자고, 조대(釣臺)는 강변 낚시터를 말하며, 단필(丹筆)은 옥순봉 절벽에 새긴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글씨를 말한다.

구곡(九曲)은 어드메오 일각(一閣)이 긔 뉘러니.
조대단필(釣臺丹筆)이 고금(古今)의 풍치(風致)로다.
져거 져 별유동천(別有洞天)이 천만세(千萬世)ㄴ가 하노라.


신동문은 참여파 시인으로 유명하다.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선기(風船期)'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경향신문 기자. 《사상계》편집장, 《창작과 비평사》대표 등을 역임했다. 1975년 단양으로 낙향해 농장을 경영하며 농촌운동을 벌였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곳 소금정 공원에는 1999년에 세워진 신동문 시비 '내 노동으로'가 서 있다. 이 시는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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