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에이 임시정부 청사가 골목길에 있는데 초라하더라. 동방명주 빌딩에 꼭 가봐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 이동 경로를 따라 독립운동 및 독립운동 투사들의 활약상을 답사하러 간다고 했더니 지인이 해 준 말이다. 그렇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청사는 작고 초라하며 보잘 것 없는 골목길에 일반 가정주택가에 있다. 그래서 '역사의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작고 보잘 것 없는 주택으로만 보일 것이다. 이 작고 초라한 임시정부 청사의 고난에 찬 역사와 독립전사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모른다면 말이다.

우리나라 중장년층들에게 '상하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연 임시정부와 김구선생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 의거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 분들의 독립운동이 어떠한 역사적 의미와 고난에 찬 활동이었는지, 또 얼마나 세계적인 사건인지를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임시정부가 존재했던 곳이 '프랑스 조계'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도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조계(租界)'라는 어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며, 더욱이 당시 상하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역사적 사실(事實)을 모르는 이는 더욱 많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역사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암기과목으로 배웠다. 그래서 어떤 사건의 명칭과 연대를 암기한다. 그 당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내가 살아가는 현재에 어떤 의미로 작용하며 그런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미래를 계획하는 '역사의식'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상하이에 대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상하이 임시정부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한중일 3국의 관계사를 이해해야 일제 침략기의 폭압적 정치와 간악한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알 수 있다.

당시 상하이는 아편전쟁으로 남경조약이 체결돼 서구열강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의 '조차지(租借地, 빌린 땅)'가 있었다. 물론 일본인 거주지도 있었다. 조차지는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이다. 임시 정부가 프랑스 조계에 설립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한민국에게 우호적인 나라였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라고 해서 늘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당시 일제의 폭압적인 추격과 압박이 있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입장에 따라 옮겨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에 있던 관동군을 동원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점령하게 되자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1932년 1월 28일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게 된다. 당시 중국군 19로군의 저항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중국군은 퇴각하며 무장해제 되고, 1932년 3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 부의)가 통치하는 만주국을 건설한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기념하고 상하이 사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인 행사를 진행한다. 그 행사장에 물통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최고의 전쟁영웅인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가 폭사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 바로 유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이다.

이 의거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대 사건이 되며, 그 해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탄 마차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의거가 발생했지만 폭탄의 불발로 실패했다. 이 두 사건을 진두지휘한 분이 당시 임시정부 국무령인 백범 김구 선생이며 단체이름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압박과 대대적인 추격으로 임시정부는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난징(南京), 자싱(嘉興),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을 거쳐 해방을 맞이하는 마지막 임시정부의 거점 총칭(重慶)에 이르는 고난에 찬 피난살이를 하게 된다.

우리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처음 설립된 서금2로(瑞金二路)에서 답사를 시작했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길모퉁이에서 그날의 감격을 되새겨 본다. 우리를 인솔했던 김종훈 기자는 표석도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하며 울분을 토했지만, 나는 오히려 이곳 임시정부의 청사만 기억하고 그날의 역사적 인식을 깨닫지 못하며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역사적 인식에 통분한다.

서금2로를 출발해 12번이나 청사가 옮겨지고(이러한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임시정부청사에서 독립투사들의 면면을 체감한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곳에서 또는 투사들이 걸었음직한 길을 무거운 마음과 울분에 찬 가슴으로 걷는다. 20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린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의 간난(艱難)의 생활은 정정화 선생의 <장강일기)>에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됐다.

우리가 천편일률적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이 임시정부가 설립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한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선생과 김구 선생의 적극적 후원자인 석오(石梧) 이동녕(李東寧) 선생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저녁에 와이탄(外灘)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의 야경을 감상한다. 단순한 야경의 화려함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귀에 생소한 김익상, 오성륜 의사의 의거 현장과 일제에 의해 체포돼 갇혔던 건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조국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잘못된 것에 분노하고 옳은 일에 박수칠 줄 알며 세상의 어려운 사람에게 훈훈한 인정을 주고 싶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중년 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