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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이란 '국가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침탈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통치권자의 명령 없이 스스로 뜻을 세워 외적에 대항해 싸우는 민간인 병사'를 의미한다.

의병이 된다는 것은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 누구도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은유와 상징을 통해 인간과 사물을 해석하는 문학가들은 이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과 심장으로 한 시대를 살아냈던 시인 김남주(1946~1994)는 시 '의병'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한다.
산맥을 달리는 말과도 같고/보이었다 사라졌다/령(嶺)을 넘는 바람꽃 같기도 하고/시위를 떠난 화살/바위에서 꽂히는 죽창 같기도 하는/당신은/어둠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보이기 시작합니다...(중략)
나타났어요 의병들이/무리 지어 동구밖에 나타나/가로질러 들판을 건너/큰 아우성과 함께 능선을 타고/사라졌어요/흰 눈에 덮인 길을 열고...(중략)
당신은/한 시대의 유령입니까/타올라 들판 가득 횃불로 살아/삽시에 사그라지고 마는/타고 남은 재입니까...(중략)
기우는 달 왕관도/왕관을 떠받드는 문무백관도/글줄이나 알아 오히려 우환인 식자들도/도망치듯 어딘가로 다 사라지고/나라의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을 때/당신은 보이기 시작합니다/숲속의 대장간에서 이글대는 숯으로/숯불에 달구어지는 시련의 무기로/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일자무식의 나라사랑으로.
  
 구한말 최초의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 장군의 생가 터.
 구한말 최초의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 장군의 생가 터.
ⓒ 영덕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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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의병의 고장을 찾아

경북 영덕군은 예로부터 '호국 의병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다. 이 땅의 마지막 왕조 조선이 기울어가던 무렵부터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영덕에선 적지 않은 의병들이 떨쳐 일어나 백척간두의 상황에 있던 나라를 위해 사심 없이 싸웠다. 그들이 보여줬던 대의와 애국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그림자 없이 선명하다.

향토사학자들은 "그 시기 최초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1878~1908)과 이름 없는 의병들이 보여준 견인불발(堅忍不拔)의 기개와 나라를 되찾고자 한 항쟁의식이 영덕 역사의 한 부분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얼마 전 영덕에선 '2019년 대한민국 의병의 날 기념행사'도 열렸다. 영덕군은 행사의 포커스를 '의병장 신돌석'에게 맞추고 "신돌석 장군의 고향 영덕에서 다시 한번 휘날리는 의로운 깃발을 전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매년 6월 초하루는 '대한민국 의병의 날'이다. 이날은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날(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정부는 2010년부터 이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해 각종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찾은 관광객이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찾은 관광객이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 영덕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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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돌석 장군 유적지에 전시된 의병 전투를 묘사한 그림.
 신돌석 장군 유적지에 전시된 의병 전투를 묘사한 그림.
ⓒ 영덕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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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출귀몰했던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구한말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의병 항쟁의 역사'를 자신의 온몸으로 써 내려간 20대 청년 신돌석은 1878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태어났다.

농민의 아들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부당한 일에 저항하는 태도가 남달랐고, 애국의 기개 또한 높았다고 한다.

1905년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처하자 신돌석은 국권을 빼앗은 일본과 싸울 것을 결의하고 1906년 영릉의병진을 창의한다. 이후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다수의 전투를 벌였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27세.

신돌석은 일본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신장군실기>는 신돌석을 "그 모습이 장대하고 여력이 뛰어나 수십 길의 언덕을 가볍게 뛰어넘었다"고 묘사했고 <의병대장신동유사>는 신 장군이 "전신주를 뽑아 일본 공병 5~6명을 무찔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중국 초나라 호걸 항우의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에 방불하는 신돌석의 풍모는 이런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다소 과장이 섞인 풍문일 수도 있겠으나 아래 그대로 옮긴다.
"병정 40~50명의 사용하는 총검을 무더기로 세워져 있었는데 그걸 한 손으로 기러기 깃털 다루듯 가볍게 들어 올리자 적군들 모두가 두려워 감히 일어나 맞서지 못했다."
 
 신돌석 장군이 27세 때 울진 월송정에서 읊은 시를 새긴 시비(詩碑).
 신돌석 장군이 27세 때 울진 월송정에서 읊은 시를 새긴 시비(詩碑).
ⓒ 영덕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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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은 영덕, 영해, 울진, 삼척, 경주 등 다양한 지역에서 조선의 농산물과 수산물을 약탈하는 일본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해 그 이름을 높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1907년 경기도 양주에 전국 의병장들이 모였을 때 교남창의 대장으로 추대되기에 이른다. 유일한 서민 출신 대장이었다.

호국과 대의명분을 위해 분골쇄신했던 신돌석 장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1908년 12월 밀고자에 의해 살해된다. 30년의 짧은 생애였지만 '호국 의병'의 참모습을 보여준 그에게 국가는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구한말 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넋이 살아있는 도해단.
 구한말 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넋이 살아있는 도해단.
ⓒ 영덕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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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바다로 사라진 또 한 명의 의병 벽산 김도현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신돌석 장군과 함께 경북 영덕과 깊은 인연을 가진 또 한 명의 의병장이 있었으니 바로 벽산 김도현(1852~1914)이다.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그는 영양과 안동 지방에서 의병 봉기를 촉구했고 영흥학교를 세워 후세 교육에도 힘을 쏟은 것으로 알려졌다.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의 유생들이 분노한다. 이 의분(義憤)은 의병들이 결집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1896년 2월 봉화군 청량산에서 기병한 김도현은 봉화와 영주를 거쳐 안동으로 진격한다. 그는 영덕과 영해, 청송과 의성에서도 열악한 무기와 수적 열세에 굴하지 않고 적군에 당당히 맞섰다.

하지만 신식 무기를 갖춘 일본군과의 전투는 갈수록 의병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도현은 산중에 은거하며 왕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는 광무개혁은 부당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고 한다.

1906년에 다시 의병을 모아 전투에 나서고자 했으나 좌절됐고, 이즈음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뜨거운 애국심을 구체화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김도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나라 잃은 고통에 힘들어하던 1914년, 김도현은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망국의 한이 깃든 이 땅에는 내가 묻힐 곳이 없다"며 바다에 투신한다. 부정할 수 없는 순국이었다. 1962년 국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바닷가에 위치한 도해단은 김도현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리에 세워졌다. 영덕군은 그의 의로운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가겠다는 뜻에서 매년 8월 도해단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만약 올여름 영덕을 찾을 계획이라면 푸른 바다의 아름다움과 함께 벽산 김도현의 '쪽빛 충절'도 함께 가슴에 담아보기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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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