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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뉴라이트(신우익) 학자인 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 이사장(전 서울대 교수)이 그동안 펴왔던 주장들을 수록한 책 한 권을 내놨다. <반일 종족주의>(미래사)라는 서적이다. 김낙년 낙성대경제연구소장, 김용삼 이승만학당 연구자와 함께 공저한 책이다.

이 책은 일제 식민통치에 관련해 객관적 진실과 상반되는 주장들을 담고 있다. 식민 치하에서 한국인들이 입은 피해와 상처에 대해서도 그런 주장을 펴고 있다. 독도와 관련해서도 일본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난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구역질 나는 내용의 책"이라는 평가를 올렸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정통성과 존립 근거를 부정하고 일본 정부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언동도 표현의 자유라고 인정하자. 정치적 민주주의가 안착된 한국 사회에서는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책조차도 이적표현물로 규정되어 판금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유의 행사가 자초한 맹비판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이런 구역질 나는 내용의 책을 낼 자유가 있다면, 시민은 이들을 친일파라 부를 자유가 있다."

이영훈 이사장은 조국 전 수석의 페이스북 글에 '법적 대응'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는 7일 유튜브채널 '이승만TV'에 출연해 "나를 '부역·매국 친일파'로 규정하겠다면 그 용어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라며 "조국씨가 학자이자 연구자라면 이 부분에 대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조국 전 민정수석의 글은) 저와 동료의 연구자로서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으며 그에 합당한 책임이 추궁될 수 있는 범죄임을 상기해 드린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종족주의'라는 단어 사용한 까닭
 
 '반일 종족주의' 책표지.
 "반일 종족주의" 책표지.
ⓒ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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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이사장은 책 제목에서 '반일 민족주의'가 아닌 '반일 종족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굳이 이 표현을 쓴 이유는 프롤로그에 나타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없습니다. 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권위이며 하나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 이웃 일본을 세세(歲歲)의 원수로 감각하는 적대 감정입니다. 온갖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것은 이 같은 집단 심성에 의해서입니다. 바로 반일 종족주의 때문입니다."
 

한국 민족주의가 서양 민족주의에 뒤떨어지며 또 이웃나라를 누대의 원수로 적대하기 때문에 '종족'이라는 표현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반일 종족주의'를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으로 규정한다. 이 문구는 책 표지에 실려있다.

경제학자인 이영훈 이사장은 고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더불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대표하는 학자다. 일제 식민지배가 한반도 경제발전에 도움이 됐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경제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데 오랜 세월을 쏟았다.

하지만, 그는 그 경제 발전의 결과로 주한 일본인들이 이익을 독점했다는 점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한국 언론의 사표로 불리는 송건호의 <송건호 전집> 제7권은 식민통치 당시 한국 전체 자산의 약 80%가 일본인 소유였다고 지적한다. 이는 일본이 이 땅의 경제를 개발한 동기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잘 증명한다. 이영훈 이사장의 글에는 이런 통계가 제시되지 않는다. 1910년과 1945년 사이에 한반도의 외형이 달라졌다는 점만 소개할 뿐이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건국절 논란'의 진원지도 바로 이영훈 이사장이다. 1948년 8월 15일,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게 아니라, 임시정부와 무관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임시정부의 바탕인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임시정부 세력을 이끌고 분단 반대를 외친 백범 김구의 남북통합을 부정하는 논리다.

이영훈 이사장은 경제학자이지만, 역사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아왔다. 그가 개진하는 주장들이 한국 근현대사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계는 대체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한다.

통계와 수치를 무기로 사용한 이영훈, 하지만

이영훈 이사장이 역사학계로부터 결정적인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통계와 수치를 핵심 무기로 사용해온 사실과 무관치 않다. 그는 반박하기 곤란할 뿐 아니라 대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통계·수치를 주로 내세웠기 때문에 이 영역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역사학계와의 논쟁에서 밀리지 않아왔다.

그런데 그가 통계를 항상 공정하게 처리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2006년에 김승욱 교수와 공저한 <경제 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에서 그는 '산업화 과정에서 농업이 공업보다 더 많은 특혜를 받았다'는 생경한 주장을 내놨다.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인 농업 및 농민 차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 농업은 차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보호를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라면서 "(농업에 대한 과보호는) 1987년 이후 민주화 시대를 맞아 농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두드러졌다"라고 말한다. 과보호가 있었다는 근거로 그가 제시한 것은, 1965~2000년 기간에 농산식품 가격지수가 공산품 가격지수보다 더 높게 상승했다는 점이다. 이를 입증하고자 그는 아래의 그래프를 제시했다. 
 
 이영훈 교수가 제시한 그래프
 이영훈 교수가 제시한 그래프
ⓒ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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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래프를 보면 공산품 가격지수는 계속 하강하는 반면, 농산식품 가격지수는 계속 상승한다. 이를 근거로 '농민들이 특혜를 받아왔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

이영훈 이사장은 그래프 하단에서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을 출처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 시스템에는 그런 그래프가 없다. 이 시스템이 제시한 원래의 그래프는 아래와 같다.

 
 한국은행이 제시한 원래의 그래프.
 한국은행이 제시한 원래의 그래프.
ⓒ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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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제시한 원래의 그래프에 따르면, 농산식품뿐 아니라 공산품 가격지수도 함께 가파르게 상승한다. 이영훈 이사장이 원래의 그래프를 개조해서, 농산식품 가격지수만 홀로 상승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통계를 변형한 방식은 이렇다. 2000년을 기준 연도로 설정한 다음, 두 분야의 가격지수를 연도별로 산정했다. 그런 다음, 두 품목의 연도별 가격지수를 비교했다. 이 대목에서 통계 변형이 일어났다. 원래의 가격지수를 그대로 제시하지 않고 '살짝' 변형을 가한 것이다. 각 연도의 농산식품 가격지수를 공산품 가격지수로 나눈 값과, 공산품 가격지수를 농산식품 가격지수로 나눈 값을 그래프 상에 표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특정 연도의 공산품 가격지수가 상승한다 해도 그 상승분이 농산식품 가격지수의 상승분보다 적은 경우에는 그 해의 공산품 가격지수는 하락한 것처럼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 분야의 가격지수가 함께 상승한 해에도 농산품 가격지수만 상승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영훈 이사장은 통계에 관한 해석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가격지수 상승이 곧바로 농업 발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주지 않은 것이다.

농산식품 가격지수가 공산품 가격지수보다 더 많이 상승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농업 분야가 공업 분야에 비해 가격 인하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농업 분야의 생산성 향상이 뒤쳐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원이 공업 분야에 집중 투입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제시하지 않고, 가격지수 상승분만 토대로 농업이 과보호를 받았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놨던 것이다. 

전문적인 학자가 통계를 보여주면 대부분 독자들은 그냥 믿을 수밖에 없다. 위 사례는 이영훈 이사장이 그런 맹점을 활용해 자기 주장을 확산시켜왔음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다. 이는 그의 학술적 성과가 단단한 기반 위에 서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그는 식민통치 문제에 대한 주장을 확신 있게 개진해왔다. <반일 종족주의>에는 확신에 넘치는 그런 주장들이 많이 담겨 있다.

망발의 향연 
 
 30일 교과서포럼 6차 심포지움이 열리고 있는 서울대 교육정보관 대강의실에서 '4·19혁명동지회' 회원들이 "숭고한 4·19 정신을 모독하지 말라"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발제자로 참석한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멱살이 잡힌 채 단상에서 끌려나오고 있다.
 2006년 11월 30일 교과서포럼 6차 심포지움이 열리고 있는 서울대 교육정보관 대강의실에서 "4·19혁명동지회" 회원들이 "숭고한 4·19 정신을 모독하지 말라"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는 모습. 발제자로 참석한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멱살이 잡힌 채 단상에서 끌려나오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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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선총독부가 한국인 토지를 강탈한 엄연한 사실까지 부정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국인 200만 명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몰려나간 것은 토지를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잃었기 때문인데도, 그는 그 같은 강탈을 부인하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에 실린 한 대목을 보자.

"1960년대 이래 중·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는 총독부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이 조선 농민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1960년 역사교육학회가 만든 교과서는 전체 농지의 절반이 국유지로 수탈되었다고 했습니다. (중략) 검인정이나 국정이나 교과서를 쓴 역사학자들이 아무렇게나 지어낸 수치입니다."

독도 영유권에 관해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하게 된 직접적 계기인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최선의 합의였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는 한일간 최선의 합의였습니다. 한일 협정을 폐기하지 않는 한, 한국이 무언가 못 받은 게 있으므로 일본은 더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과의 과거사가 매듭지어졌음을, 과거사가 청산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공창제'의 일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군의 전쟁범죄라는 인식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죽 설명해온 대로 그것은 당시의 제도와 문화인 공창제의 일부였습니다. 그것을 일본군의 전쟁범죄로 단순화하고 줄기차게 일본의 책임을 추궁한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였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시민단체 정대협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인용문 속 원(元)은 전(前)과 같은 의미).

"정대협은 그들의 공명심을 충족하기 위해, 그들의 직업적 일거리를 잇기 위해 원 위안부들을 앞세운 시위를 줄기차게도 벌여왔습니다."

이영훈 이사장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 소신의 결과일까?

일본 자금 받고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부정확한 지식과 잘못된 통계 처리에 기반한 지식일지라도, 그것을 토대로 소신이라는 것이 생길 수는 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학문을 재검토하고 인식을 재조정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가 일본 자금을 받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연구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되는 1989년의 <근대 조선의 경제구조>와 1992년의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 이영훈 이사장이 스승인 안병직 교수 등과 함께 만든 이 책들은 '도요타 재단'의 지원(지원금액 300만 엔, 예비연구 목적으로 100만 엔 추가지원)을 받고 진행한 연구의 결과물들이다. <근대조선의 경제구조>의 서문에 이런 문구가 있다.

"이 공동연구는 일본의 도요타 재단으로부터 1988년에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역사적 연구'라는 테마로 연구 보조금을 받았다는 것을 밝히고, 동 재단에 대하여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근대조선의 경제구조> 서문
 <근대조선의 경제구조> 서문
ⓒ 이영훈, 안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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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 서문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 

"도요타 재단으로부터 연구비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번의 공동 연구는 출발부터 불가능하였다."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 서문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 서문
ⓒ 이영훈, 안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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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연구도 아니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관한 연구를 위해 일본 돈을 받았다.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는 연구에 뛰어들었던 것으로 의심을 하기에 충분하다. 1980년대만 해도 그런 사실을 책 서문에 써놔도 괜찮았다. 또 연구비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2006년 안병직 교수는 <오마이뉴스>에 "기업이 설립한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 받는 것은 세계적 관행"이라고 반론하기도 했다.

과거에 일본 기업의 지원금을 받아 핵심 연구를 진행했고, 이제는 역사를 왜곡하며 일본 입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에 조국 전 수석은 "이런 구역질 나는 내용의 책"이라고 일갈했다. 어떤가. 당신은 동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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