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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신간 <진이, 지니>가 책방을 점령했다. 서울 종로구 서촌에 소담하게 자리한 독립서점에도, 창원의 대형서점에도 <진이, 지니>는 특유의 푸른빛 표지를 뽐내고 있었다. '지니'의 푸른빛 유혹에 못 이겨 결국 우리 집에 데려왔다.

20살 무렵 정유정의 <28>, <종의 기원>을 읽었는데 그 중 <종의 기원>을 재밌게 봤다. 책은 조현병을 앓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다. 충격적인 사건들을 그의 시점에서 따라가는데 가만히 앉아 소설을 읽는 내내 숨 가빴던 기억이 난다.

두 책 모두 분위기가 어둡고 음울했는데 <진이, 지니>는 표지부터가 화사했기 때문에 정유정 작가가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이, 지니>  정유정의 신간 장편소설. 지난 5월 27일 출간됐다.
▲ <진이, 지니>  정유정의 신간 장편소설. 지난 5월 27일 출간됐다.
ⓒ 권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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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할 자격

책은 진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동물원 사육사 일을 한다. 그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 어미에게 버려진 침팬지 팬이 그를 어미라고 여길 정도로 가까워진다. 팬은 진이가 주는 밥을 먹고 진이와 함께 놀고 진이의 품에서 잠을 잤다. 팬이 진이를 의지한 만큼 진이도 팬을 아끼게 된다. 진이는 이를 계기로 영장류에 관해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는 연구를 위해 콩고 왐바 캠프에 갔다가 보노보를 보고 이렇게 느낀다. '이토록 매혹적인 생명체가 존재하다니' 보노보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DNA를 가졌으며, 정치적이고 다소 공격적이며 수컷 중심 사회를 이루는 침팬지와 달리, 연대와 평화를 중요시하고 암컷 중심 사회를 이룬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진이를 닮은 것이다.

진이는 비를 피하려고 콩고 킨샤사의 한 기념품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가게는 주인이 없는지 "익스큐즈 미—" 하고 불러도 응답이 없다. 그곳에서 진이는 철창에 갇힌 보노보를 보게 된다. 멸종위기종인 보노보를 비싼 값에 팔아넘겨 이윤을 챙기는 것이다. 명백한 불법이다.

하지만 진이는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가게를 나온다. 한 구조 전문가가 밀렵꾼 손에서 구해낸 새끼 고릴라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끔찍하게 살해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 일은 영장류 전문가로서 자격이 없다는 죄책감이 되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나는 과연 보노보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가?'

소설이 잠언이 되는 순간

한국에 돌아온 진이에게 구조대로부터 협업 요청이 들어온다. 탈출한 보노보가 나무 위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영장류 전문가가 나서 안전하게 구조해달라는 것이었다.

공감의 일인자답게 진이는 보노보가 좋아하는 파인애플 꼬치로 유혹해 안전하게 보노보를 구조해낸다. 그는 보노보에게 '지니'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러다 차를 타고 센터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가 난다. 그곳에서 진이의 영혼과 지니의 몸은 '합일'된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인간 진이는 보노보 지니의 몸속에서, 지니가 느꼈던 호기심, 놀라움, 두려움, 공포, 배고픔, 사랑, 축복을 느낀다. 처음엔 그것들을 '지니의 감정'으로 느끼지만 갈수록 '자기의 감정'으로 받아들인다.

남의 일에는 선을 긋고 사는 '단절 사회'에서 사람이 아닌 보노보의 감정까지 공감하게 되는 진이의 모습은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며 뼈아프게 다가온다. 소설이 잠언이 되는 순간이다. 

상처입은 치유자들의 이야기

이 책의 뒤편에 문학 평론가 정여울 작가가 <진이, 지니>에 대해 해설한 부분이 있다. 그는 이 책을 '상처입은 치유자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각자의 트라우마 이후 성장한 주인공들은 누군가의 치유자가 된다. 어미에게 버려져 진이의 품에서 자란 팬은 자기 아이를 낳아 자기 어미와는 다르게 각별한 모성애로 아이를 품는다.

팬은 보노보의 몸으로 들어간 진이를 알아본 것인지 자기가 낳은 아이라고 자랑하듯이 새끼를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려 지니 안에 있는 진이에게 보여준다. 진이는 그런 팬의 모습에서 삶에 대한 애정과 힘을 얻는다. 상처 입은 존재가 누군가를 보살피고 힘을 주는 치유자가 된 것이다.

이는 우리네 모습과 닮았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좌절과 고통의 순간에 부딪힌다. 하지만 그 순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이전보다 성장한다. 성장한 그들은 넘어져 있는 또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진이, 지니>는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되자는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닐까?

진이, 지니

정유정 (지은이), 은행나무(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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