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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학원에서 일했던 나는 저녁 시간이 가장 바쁜 시간이었다. 하교한 학생들과 문제지를 두고 씨름했던 시간, 그 시간에 지금은 슬리퍼를 끌며(신는 게 아니다)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강아지 산책은 그냥 구실이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손을 털며 일어서는 아이들의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기도 하고, 구수한 밥 냄새를 맡기도 한다. 귀가하는 이와 맞이하는 이의 분주함과 하루가 저무는 느긋함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지금이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다. 18년간 해오던 일을 정리한 이 시간이 하루의 해가 지는 저녁같이 느껴진다. 아직 내일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에는 이르고 그저 하루를 잘 마무리 했다는 안도감을 가지는 데 집중해야 할 것 같은 시간.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하다>에서 만난 박진희씨
 
 배지영 지음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하다>
 배지영 지음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하다>
ⓒ 이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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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시험 기간이었다. 시험 대비 보강으로 주말 아침부터 진을 다 빼버린 나는 강아지와 산책을 나왔다. 보통 그럴 때 책 한 권을 갖고 나오는데 그때 내 손에 들린 게 책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하다>였다.

이 책에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박진희라는 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한 출판사에서 2년 정도 일하고 아프리카 여행을 가기 위해 사표를 냈다. 다녀와서도 일정 기간 일하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녀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지금의 남편 경록씨를 만났다.

네팔 안나푸르나에서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찍은 둘의 웨딩사진이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들의 행복감에 젖은 미소는 흑백사진으로도 감추어지지 않았다. 

나흘 동안 산행을 하고 꼬질꼬질한 몸으로 배낭에 넣고 간 10만 원짜리 웨딩드레스를 입은 진희씨와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턱시도를 입은 경록씨는 너무도 당당했다. 그저 자신으로서 살아가겠다고, 자신의 길에서 치열하게 살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현재의 삶에 확신도, 그만둘 용기도 없었던 나는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데 용을 쓰고 있었는데 그게 목구멍까지 찼던 것 같다. 일 년 전 어깨를 들썩 거릴 정도로 눈물을 쏟은 나는 아직 떠나진 못했지만 '그만 두기'는 한 상태다. 현재는 안나푸르나가 아닌 동네 공원을 완주하고 있다.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에서 만난 작가 부부
 
 박건우 지음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박건우 지음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 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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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문제다. 대책 없이 그만두기를 하게 만든 책이 있는가 하면, 구질한 백수 생활을 찬양하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는 박건우 작가가 아내 미키와 68일간 대만 도보 여행을 한 이야기다. 학교와 도교사원 관리인, 경찰관, 공원 관리인 및 현지인에게 잠자리를 부탁한다. 

공원 외진 곳에서 야영을 하다가 새벽에 쫓겨나기도 한다. 서글퍼서라도 여관에 갈 법도 하지만 꿋꿋하게 다음 야영지를 찾는다. 결국 숙박비 '0원'을 기록하며 뿌듯해 한다. 자칭 글로벌 거지 부부의 자존심은 이런 데서 발휘가 되나 보다.

그들의 궁색함은 끝이 없다. '구호물자'라고 칭하며 대만 현지인들이 음식을 줄 때마다 사진을 찍고 번호를 붙인다. 구호물자 수령 횟수 51회. 덕분에 하루 식비 1만 원(두 명 분)으로 예산을 잡았지만 충분했다. 음식을 건네 받을 때 이들 부부의 사진을 보면 감사함과 장난기가 가득해 보인다. 

아, 이번엔 눈물이 아니라 콧물이 나오려고 한다. 왠지 이 콧물은 휴지 없이 맨손으로 닦아야 할 것 같다. 그들의 절약정신, 아니 궁상 정신에 매료되었다고 할까. 그런 게 대단해 보이기는 처음이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이 사치품으로 보인다. 진짜라서 감동했다. 그들의 구질함도, 부족해 보이는 삶도 자신의 것이었다. 박수를 바라지도 않을 것 같은 그들의 뻔뻔함이 멋있었다. 

나는 학원을 폐업한 사실을 두 달이 다 되도록 아직 대구에 계시는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사실을 아는 즉시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전화를 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걱정과 잔소리를 듣다 보면 애써 다잡은 내 마음에도 불안이 생기기 시작한다. 

부모님에게 박건우, 미키 부부를 소개해주고 싶다. 보나마나 무모하다고 하실 게 뻔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나도 같이 혼날 거다. 난 절대 부모님을 설득할 수 없다. 

우연히 펼친 책에 있는 사진 한 장으로 긴 울음을 터트린 내 감정이 나도 당황스러웠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때서야 나도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는데 말이다.

길을 이탈해 보니 세상이 좀 다르게 보인다고. 그게 그렇게 불안하고 위험하진 않다고 부모님께 말하고 싶다. 다른 이들의 삶도 아마 그럴 거라고, 내가 모르는 그들의 길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 글로벌 거지 부부 X 대만 도보 여행기

박건우 (지은이), 소담출판사(2019)


서울을 떠나는 삶을 권하다 -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현실적 용기

배지영 (지은이), 이와우(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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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좋아하다가 <연하산방>팟캐스트를 하게 되었고, 책을 좋아하다가 글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