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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잘 들리지 않지만 예전에 많이 들렸던 어휘 중에 '양갈보'와 '양공주'가 있다. 주한미군을 가까이 하는 여성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양갈보가 먼저 나오고, 양공주는 나중에 나왔다. 양갈보에서 양공주로 곧장 넘어간 것은 아니다. '유엔마담'이나 '유엔공주' 혹은 '유엔사모님'으로 부르던 과도기가 있었다. 양갈보에서 유엔마담으로, 다시 양공주로 바뀌는 2차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위 표현들은 그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의 책임을 그들 본인에게만 전가시킨다는 점에서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런 현실에 놓이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책임이고, 이차적으로는 한국 정부와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 그런데도 비하적 표현을 사용해가며 마치 그들만의 문제인양 치부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런 책임 구조를 외면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글픈 것은 그들에 대한 호칭을 바꾸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이기심과 몰인정이 표출됐다는 점이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양갈보에서 유엔마담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이기심이 나타나고, 유엔마담에서 양공주로 바뀌는 과정에서 몰인정이 나타났다.

그런데 동일한 일을 하는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이 2차례 바뀌는 동안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변화와 두 번째 변화의 시간적 간격은 불과 3년 밖에 안 된다. 3년! 한국 현대사에서 '3년'과 연관되는 것 중 하나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6·25 전쟁)이다. 바로 이 3년간의 전쟁이 양갈보-유엔마담-양공주로의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상륙한 미군. 부산시 서구 부민동의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상륙한 미군. 부산시 서구 부민동의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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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갈보', 우리 사회의 이기심과 몰인정 표출

양갈보는 1945년 9월 미군이 들어온 뒤 생겨난 용어다. 1948년 12월 24일자 <경향신문>은 "양풍(洋風)이 이 땅을 휩쓴 지도 이미 3년"이라며 "양갈보라는 새로운 명칭은 여성들의 일대 치욕"이라고 말한다. 양갈보라는 비하적 표현이 생긴 게 1948년 기준으로 3년 됐음을 알려주는 기사다.

서양문물의 약칭처럼 사용된 양(洋)은 당시 사람들한테 이중적 뉘앙스를 풍겼다. 이질감이나 거부감이 그 하나이고, 동경심이 또 다른 하나였다. 양갈보의 '양'은 전자였다. 1945~1948년에 미군 주변의 여성들이 '양'이라는 접두어와 함께 엮이면서 사회적으로 경원시된 것은 당시의 반미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다.

해방 직후 한국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확산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주한미군에 의해 소멸되고, 분단 반대라는 시대 정서를 대변했던 1948년 제주 4·3항쟁이 반미 색채를 어느 정도 띤 것에서 드러나듯이, 해방 직후 이 땅 민중들 사이에는 '점령군 미군'에 대한 반감이 존재했다. 지금의 일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친미 감정은 주로 1948년 분단 정부 수립 및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 생성된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분석한 국문학자 김준현의 논문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군 관련 풍속에 대한 대중 인식 변화'는 "좌우합작에의 열망이 강했던 1945년 말에서부터 1948년 초에 이르는 시기에는 오히려 미군과 소련군은 한반도 통일 혹은 완전독립을 저해하는 요소로서 비판적인 시선의 대상이었던 적도 있다"고 말한다.

1980년 5·18 광주항쟁 이후 못지않게, 어쩌면 훨씬 더 반미감정이 강했던 1945~1948년 기간 동안, 미군 주변의 여성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전통적 편견 및 몰이해에 더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감정까지 뒤섞여 '양갈보'라는 극히 비하적인 표현이 생겨났다.

그런데 분단반대 세력이 꺾이고 분단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이후, 양갈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그들의 직업을 편견 없이 바라보자는 의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미군과 함께하는 여성들을 함부로 대해서 안 된다'는 경고성 목소리였다.

1949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는 "요즈음 시내에는 속칭 '양갈보 숙청'이라는 것이 있어, 거리에서 의복 차림이 너무 지나치거나 외국인과 동행하는 것을 철부지 거리의 아이들이 돌을 던진다 또는 욕설을 퍼붓는다 하는 일이 시내 도처 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 뒤, 이런 현상의 배후에 좌익이 있다고 '고발'했다.

이 기사의 제목은 '양갈보 놀림 핑계, 외국인 배척을 책동'이다. 부제목은 '좌익의 사주로 판명'이다. 미군과의 투쟁에서 패배한 좌파가 배후에서 양갈보 배척운동을 사주하고 있다는 엉뚱한 기사였다. 미군에 대한 대중의 기피 심리가 보다 더 결정적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은 기사다.

기사 본문은 "이 배후에는 속칭 양갈보를 놀립네 하고 외국인을 배척하는 책동을 하는 일이 없지 않아 있다"면서 "(이런 일이) 대외적인 국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일반은 주의하여야 할 것"이라는 경고성 문구까지 담고 있다.

양갈보 배척운동이 자칫 한미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당시 주류세력의 우려를 읽을 수 있다. 한미관계를 지켜야 한다는 보수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분단 정부 수립을 계기로 달라지기 시작한 '양갈보'에 대한 인식을 보다 더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한국전쟁이다. 6·25 특집 기사인 1980년 6월 14일자 <경향신문> '6·25 한 세대의 검증 (2) 언어 생활'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등장한 신조어로 '유엔마담'의 출현을 제시한다. 아래 인용문에서 한자 병기를 제외한 나머지 괄호는 기사 원문에 표기된 그대로다.
"6·25 발발과 더불어 일반의 상식이 되다시피 한 각종 병기명(兵器名), 계급 이름 외에도 전세(戰勢)와 연관 있는 여러 단어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으며(사변·동란·북괴·남침·수복·도강파·잔류파·부역·납치·철수 등), 사상 최초로 등장한 유엔군 관계 어휘도 많았다(국련군國聯軍·유엔마담·쇼리 등), 군 복무자가 대량 필요하게 되자 빨간딱지(소집영장), 제2국민병, 방위군, 기피자 등이라는 어휘가 젊은이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보수세력의 열망 '유엔마담', 타협의 산물 '양공주'

"사상 최초로 등장한 유엔군 관계 어휘도 많았다"면서 유엔마담이란 신조어가 나타났다고 했다. 유엔마담과 함께, 유엔사모님·유엔공주 같은 표현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은 유엔마담이었다.

한국전쟁 중에 발행된 1952년 4월 7일자 <경향신문>은 '양갈보'가 '유엔마담' 혹은 '유엔사모님'으로 바뀐 이유를 독자와의 질의응답 형식으로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E로 시작하는 성을 가진 서울 시민의 편지에 응답하는 형식의 기사다.
문: 양갈보는 언제부터, 또 왜 유엔사모님이라는 존칭으로 부르게 되었습니까?(서울 E生)
답: 6·25 사변 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경제 면으로 볼 때에 외화를 획득하는 돌격대의 역할을 하기에 감사의 뜻으로 이렇게 존경하게 된 것입니다.

 

전시에 미군한테서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이유로 양갈보를 유엔사모님이나 유엔마담으로 높여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이기심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지배력이 한층 강화된 미군. 그 옆에 있는 한국 여성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됨과 더불어 그들을 이용해 달러를 벌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유엔마담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던 것이다. 국가적 이익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국가주의적 관념이 이런 현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미군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두 번째 변화가 나타났다. 그들을 지칭하는 표현을 재조정하는 움직임이었다. 양갈보다는 낫지만 유엔마담보다는 낮은 '양공주'가 가장 지배적인 용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양부인이란 표현도 등장했지만, 양공주의 사용빈도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위의 김준현 논문은 이 현상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아래 인용문의 언중(言衆)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이고, 발화(發話)는 문맥상 '언급'이란 의미다.
"1953년을 기준으로 하여 유엔마담 대신 양공주 혹은 양부인이라는 기호의 사용이 높아졌다는 것은 두 기호가 언중에게 발화되는 비중이 뒤바뀌었다고 가늠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전시 상황이 해소되면서 유엔마담과 같이 존칭의 의미를 담은 기호로 미군 접대부를 지칭할 필요성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즉 국가주의적인 관점으로 이들을 바라볼 동기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2016년 발행한 <한국민족문화> 제59권

 

휴전이 되고 유엔군이 귀가하면서 외화벌이의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우리 사회의 시선은 다시 차가워졌다. 그래서 유엔마담보다 격하된 양공주란 표현이 확산됐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몰인정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양공주라는 표현은 유엔마담보다는 안 좋지만, '양갈보'보다는 점잖다. 한국전쟁 휴전과 더불어 '경제적 효용성'이 떨어지긴 했지만 이들이 여전히 세계 최강 미군의 옆에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전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위기가 '양공주'라는 타협적 표현의 등장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호칭과 대우를 달리해온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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