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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직 공간은 그대로입니다. 현재 민주인권기념관 조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용역 공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에 맞춰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글을 보냅니다.[편집자말]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그 첫 과정으로 요즘 남영동에서는 부지의 활용방안에 대해 열띤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필자도 시민단체인 남영동대공분실인권기념관추진위 집행위원장으로서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열띤 토론은 좋은 일이다. 우리나라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수사기관의 고문 현장인 남영동을 어떻게 보존하고, 어느 정도 개발할 것인지는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고 많은 전문가들과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치부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반성하는 데서 모범을 보이는 나라는 독일이다. 그만큼 독일은 나치 시대의 강제수용소 등 국가범죄 시설을 보존하여 기념관으로 잘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민주인권기념관이 미래 세대에게 호평을 받고,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는 시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기념관에서 세계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독일의 사례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베를린 시내에 조성된 '공포의 지형도(Topographie Des Terrors)'라는 이름의 기념관 사례를 우리의 민주인권기념관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베를린의 명소, '공포의 지형도' 기념관 
 
 '공포의 지형도'기념관 건물 입구. 외벽이 투명 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 어디에서도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
 "공포의 지형도"기념관 건물 입구. 외벽이 투명 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 어디에서도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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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지형도' 기념관은 베를린 시내 중심가인 포츠담 광장 부근에 있다. 기념관의 경관이 특이하다. 언뜻 보면 그저 넓은 공터로 보인다. 자세히 보면 부지 한편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1층짜리 기념관 건물이 서 있다. 부지에 깔려 있는 회색 자연석 잡석들과 거의 비슷한 건물색이어서 건물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이 기념관의 주전시공간은 이 건물에 있지도 않다.

기념관 부지의 한쪽 경계면은 이제는 유물이 되어 보존되고 있는 베를린 장벽이 길게 늘어서 있다. 장벽 유적 안쪽으로 장벽과 평행하게 좁고 긴 지하 통로가 있다. 내려가 보면 오래된 건물의 지하 벽면을 그대로 보존한 채 그 벽면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그 벽면은 나치 시대에 이곳에 있었던 건물의 지하 구조 중 일부이다.

그렇다, 기념관은 옛 나치시대의 건물 터에 조성돼 있는 것이다. 나치의 주요한 공안기관인 SS 즉, 친위대 본부, 비밀경찰인 게슈타포 본부, 제국중앙안보국 건물이 있던 자리다. 말하자면 우리의 남영동 대공분실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나치의 수사기관 본부들이 모여 있던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 공포의 건물들은 주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는 곳과 같이 일부 잔해만 남아 있을 뿐 그 형체는 사라져버렸다. 2차대전 말기에 연합군의 공습으로 건물의 상당 부분이 붕괴됐고, 남아 있던 건물 부분도 종전 후 깨끗이 철거해 버렸다. 그리고 1960년 무렵 동서로 분단된 베를린 경계선에 장벽을 쌓으면서, 그 장벽의 서베를린 쪽에 접한 이곳은 마치 우리 휴전선의 비무장지대처럼 방치된 땅이 되어 버렸다.
          
68세대의 반란
 
 폐허가 된 건물의 기둥 잔해까지도 그대로 보존해 전시하고 있다.
 폐허가 된 건물의 기둥 잔해까지도 그대로 보존해 전시하고 있다.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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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들을 보존하지 않은 것은 동서 분단의 탓도 있었지만, 부끄러운 나치의 흔적을 지우려는 독일인들의 심리가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독일은 나치가 전국 곳곳에 세운 강제수용소 즉, 뮌헨의 다하우 수용소, 베를린의 작센하우젠 수용소, 바이마르 인근의 부헨발트 수용소 등을 보존하여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 어느 곳도 나치 당시의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지 않다. 공포의 지형도 기념관 터와 비슷하게 전쟁 말기에 공습으로 파괴되기도 했지만, 남아 있는 건물도 종전과 함께 독일인들의 손에 의해 말끔하게 철거됐다.

사실 독일인들의 나치 과거 청산은 같은 시기 우리의 친일 청산이 공산주의의 위협이라는 명분 아래 좌절된 것과 똑같이 좌절됐다. 이후 과거 청산에 대해 20년이라는 긴 침묵의 시간을 거친 뒤, 젊은 전후 세대가 일으킨 68운동의 힘에 의해서 비로소 나치 청산 작업이 재개될 수 있었다.

그때 부모 세대가 없애버린 강제수용소 터를 되살려 기념관으로 재탄생 시켰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건물만 짓고 빈 터 그대로를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어느 수용소 기념관을 가더라도 건물 자리만 표시된 드넓은 공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공포의 장소를 아름답게 꾸미지 마라

그러면 빈터였던 이곳에 어떻게 '공포의 지형도'라는 기념관이 들어서게 된 것일까. 그 시초는 1970년대 말, 서베를린에서 국제건축전시회가 열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나치 피해자들과 인권단체들이 이곳에 있던 공포의 건물들에 대해 기억해내고 발언하기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 초, 베를린 시는 이 빈터에 건물을 짓기로 하고 설계를 공모했다. 그런데 설계지침에 '프린츠 알브레히트 궁전의 터에 대한 건축설계'라는 것이 명기돼 있었다. 사실 공포의 건물들이 그 궁전의 한쪽 터를 잠식해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공모에 제출된 시안들은 궁전에 연결되는 화려한 예술적 미를 뽐내는 설계안들이었다.

시민사회는 공포의 현장을 예술적으로 단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베를린 시는 시민사회의 뜻에 굴복해 시공을 철회했다. 뒤이어 시민사회와 나치 청산에 뜻을 둔 학자들이 이 부지에 대한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1987년, 베를린 시 750주년 기념행사를 하면서 그동안 발굴된 유적들을 일반에 공개하는 전시장을 만들었다. 그때 이 전시장에 붙여진 명칭이 바로 오늘날 쓰고 있는 '공포의 지형도'였다. 전시유적은 지금 주전시장으로 사용되는 SS 본부 건물의 지하층 벽면 유적과 게슈타포 본부 건물에 지은 감옥의 일부 감방 시설 유적 등이었다. 각 유적에는 설명하는 패널을 설치했다. 이 전시를 계기로 이 장소를 어떻게 보존하고 이용할 것인가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전개됐다.

공론화 과정을 통해 유적의 원형을 보존한다는 원칙에 합의를 도출하고, 1992년 두 번째로 설계 공모를 실시했다. 당선작이 결정되고 1997년에 시공에 들어갔지만, 2년 만에 중단됐다. 설계안대로 시공하려면 기존 건물 유적지에 대한 훼손이 불가피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베를린 시와 연방 정부는 2004년 건축계획을 취소했다.
두 번의 실패를 거듭한 뒤 정부와 시민사회는 먼저 건축 설계지침에 대한 보다 확고한 원칙들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보고, 의견 수렴에 들어갔다.

상처는 드러내야 아문다

이때 정립된 설계 원칙 중 주요한 것을 소개하고 그것을 우리 남영동과 비교해보겠다. 기념관은 독일사가 아닌 유럽사의 관점에 서야 한다. 나치의 범죄는 독일 안에서, 독일인만을 대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국적의 피해자들에게 자행됐다. 그러한 범죄를 기획하고 실행을 결정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는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우리에게 이것을 대입한다면, 남영동에 세워질 민주인권기념관은 남영동 대공분실만이 아니라 독재정권의 폭력적 통치기관인 정보기관과 수사기관 전체가 저지른 고문과 다양한 인권침해를 다루는 센터의 역할을 하는 전국적 기구가 되어야 한다.
기념관은 가해자의 장소, 반성과 교훈의 장소여야 한다.

피해자를 잊지 않아야 하지만, 이러한 범죄를 기획하고 조직하고 실행한 사람들과 그것을 가능케 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독재정치를 지지한 이들 또한 이곳을 찾아와서 반성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남영동 시설을 복원하고 기억공간으로 조성할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억할 대상이 박종철과 김근태로 대표되는 피해자들만이어서는 안 된다. 고문이라는 극악한 국가폭력을 자행한 범죄자들과 그들을 지휘한 정치세력, 나아가 그들을 용인한 우리 사회에 대해 함께 반성하는 공간이기도 해야 한다.

독일사의 '드러난 상처'가 되어야 한다

발굴된 건물 폐허 그대로의 모습, 그 황량한 풍경은 방문하는 사람들이 나치 체제와 정면으로 대면하도록 하는 효과를 낸다. 따라서 부지를 예술적으로 가공하는 데 대해 명백하게 반대한다. 부지 전체가 주는 인상에 변경을 가하는 어떠한 개입도 피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건축 설계에 엄격한 제한이 두어져야 한다.

남영동의 어두침침하고 을씨년스러운 경관에 대해 불만스러워 하면서 이와 대비되는 밝고 명랑한 공간을 함께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자는 독일인들의 결단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신축되는 건물에 '목소리'를 부여하라

불가피하게 신축하는 건물은 문서보존, 연구, 교육, 학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때 그 공간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문서를 모아 놓은 아카이브나 도서관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차별 없이 공개되어 활력으로 넘쳐야 하며, 공공을 위한 이벤트와 교육 프로그램이 제공되어야 한다.

남영동에서도 기존 건물이 전시와 체험의 공간이라면, 새로 신축되는 공간에서는 다양한 학습과 교육 활동이 펼쳐짐으로써 과거를 박제화한 기념관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함께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창의적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일의 28년, 한국의 4년 
 
 '공포의 지형도' 주 전시장 전경. 지표면으로 베를린 장벽 유적이 보인다.
 "공포의 지형도" 주 전시장 전경. 지표면으로 베를린 장벽 유적이 보인다.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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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원칙에 의해 현재의 기념관이 2010년에 완공되었다. 1982년 최초의 설계 공모가 있고나서 무려 28년 만에 나치의 공포 기관들이 있던 자리에 '공포의 지형도'가 완성됐다.

기념관 시설 곳곳에 28년 동안의 고민이 배어 있다. 야외의 주전시장은 공포의 SS본부 건물 지하 벽면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설명이 필요 없는 공포의 현장체험을 제공한다. 게슈타포 감옥은 발굴된 현장 그대로를 보존하고 그 지상 부분에 지붕 덮개만 씌워 놓았다. 섣부른 복원이 가져다줄 어색함보다는 폐허가 주는 황량함이 역사와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과거와 대화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무엇보다도 신축 건물은 부지의 한편에 눈에 거슬리지 않는 색상으로 얌전하게 자리 잡았다. 1층에 마련된 상설전시실에서는 벽면이 유리인 까닭에 어느 곳에서나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안과 밖의 교류를 체험하게 해준다.

남영동의 민주인권기념관은 2022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논의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기념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앞선 이들의 경험이 있고, 우리의 민주 역량이 있기에 시행착오를 줄이며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기획/남영동의 봄]
① 표창원 "'저XX 짭새야' 몰매... 이 비극 우리 시대에 끝내자" (http://omn.kr/1ifis)
② '희극'으로 기억에 남아야 할 남영동 고문실 (http://omn.kr/1jbmx)
③ 동생 코에 짬뽕국물 부었단 말에 누나 가슴 찢어지고 (http://omn.kr/1j8p1)
남편 김근태 고문하던 현장, 이리될 줄 누가 알았을까 (http://omn.kr/1jdzl)

덧붙이는 글 | 김성환 기자는 남영동인권기념관추진위 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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