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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어머니회에서 주는 5월어머니상을 수상한 서유진선생
 5월 어머니회에서 주는 5월어머니상을 수상한 서유진선생
ⓒ 서유진추모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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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눈물이 많은 달인데 슬픔 하나 더 얹는다.

볼티모어로부터 부고가 들려왔다. '5.18 전도사'로 불렸던 인권운동가 서유진 선생(78)이 미국 시각으로 5월 16일 새벽 샤워를 마친 뒤 아침 소파에 누운 채 조용하게 운명했다는 소식이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더니 내가 졌다"

5월 7일 광주에서 올린 그의 페이스북에는 "'인생은 미완성이라더니 내가 졌다. 집으로 가자"라고 쓰여 있다. 몸 상태를 본 주변 지인들이 모두 그 상태로 캄보디아 행은 무리라고 했다는데 선생은 5월 10일 캄보디아로 갔던 것 같다. 프놈펜에 있는 '켑(거주했던 집)'으로 가서 집 정리를 하고, 5월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을 출발하여 광저우, 뉴욕을 거쳐 부인이 사는 볼티모어 집으로 가는 꽤 긴 마지막 여행을 하고 5월 14일 집에 도착했다.

그는 이미 광주와 프놈펜을 떠나며 죽음을 예고하는 운명의 글을 남겼고 아마 볼티모어의 마지막 하루 동안 부인과 마을 산책을 하며 화해의 시간을 나눴을지 모르겠다. 죽음을 이미 짐작하면서 그는 마지막을 고통 없이 맞이했던 것 같다.

"이제 거기서 끝내라는 합창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죽고 사는 문제는 분명 내 소관이 아니라는 걸 누구 못지않게 알어 버린 내가 할 말이 또 있겠는가?"(5.11 서유진선생 페이스북)" 

김대중 대통령 후보 도우려 귀국

내가 선생을 만난 것은 1992년이었다. 미국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열렬히 전개하던 그가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돕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했다. 작고한 문동환 목사 등과 미국 뉴욕 볼티모어에서 재미 민주화운동을 했으니, 그때 정권교체 제대로 한번 해 보자는 생각이었던 같다.

그는 당시 1980년 5․18 현장을 취재해 보도했던 한국통 언론인 <볼티모어 선> 브래들리 마틴을 안내해 5․18 도청항쟁 대변인 윤상원 열사 취재에 동행하고 있었다. 브래들리 마틴은 1997년 선생의 섭외로 시민연대모임이 간행한 <5․18 특파원 리포트>에 '윤상원 그의 눈길에 담긴 체념과 죽음의 결단(Yun Sang Won : The Knowledge in Those Eyes. 정영목 번역)'이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선생은 새치가 많이 나 있고,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영어가 유창했고 열정이 넘친 사람이었다. 전주 삼례에서 태어났고 전주고를 거쳐 외국어대에 갔다가 중도에 그만뒀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죽음의 언덕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저자인 이재의씨(관련 기사: 5.18 진실 알린 그책, 전두환 몰래 우리가 썼다"와 더불어 셋이 자주 어울리며 이야기도 나누고 인터넷 동호 모임(21세기 프론티어)도 같이 하면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때 그의 인터넷 아이디는 로키(Rocky 행운을 바라는 의미도 있고, 미국 로키산맥을 상징하기도 함)로, 50대 장년이면서도 30~40대들과 온 오프라인에서 활발하게 소통했다.

재미민주화운동에 청춘 바쳐 
 
5.18 행사에 참여한 서유진일행들 2003년 5월 서울에서 개최된 5.18 세미나후 서유진선생이 조지 카치아피카스교수, 나간채교수, 산지와 리아나지 아시아인권위 국장, 김영집, 박재만, 김수아와 외국인 참가자들이 무교동의 한 식당에서
▲ 5.18 행사에 참여한 서유진일행들 2003년 5월 서울에서 개최된 5.18 세미나후 서유진선생이 조지 카치아피카스교수, 나간채교수, 산지와 리아나지 아시아인권위 국장, 김영집, 박재만, 김수아와 외국인 참가자들이 무교동의 한 식당에서
ⓒ 김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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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청년기부터 긴 세월 미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망명한 김대중 대통령, 문동환 목사와 그 주변 인사들을 돕기 위해, 재미동포 조직에서 청년시절부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온 것 같았다.

그는 미주 민주회복통일연합에서 활동하며 80년대 초 5․18 광주 학살의 진상을 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김근태 선생이 고문 받고 민청련 민주투사들이 시련 받았을 때 뉴욕에서 캠페인과 모금을 하며 미국 언론에 진짜 뉴스를 전하기 위해 활동했다. 특히 그는 한국 민주화에 호의적인 에드워드 케네디·바바라 미컬스 등 미국 의원들과 교류하면서, 김대중과 민주화운동가들을 돕기 위해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가했던 전설적인 활동들에 대해 종종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성격이 불같아서 누구에게 아부하거나 하지 않았다. 잘 나가던 전주고 동문 출세자들 옆에 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정치활동에 누구보다 분개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부인과 함께 일해 두 자녀를 키워야 하는데 자신이 이런 활동에 전력을 다하다 보니, 부인이 생계를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 술에 취했을 때 가끔 그는 가족의 이야기를 절망에 빠진 채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선생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잊을 수가 없다.

내가 95년에 통일 운동으로 감옥에 잠시 들어가 있을 때 선생이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의 저서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 원서를 구해 광주교도소에 넣어주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 영어를 검열할 수 없었던 교도관들은 한동안 도서 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력하게 항의하자 결국 허가해 준 기억이 생생하다.

광주시민연대모임과 5․18 국제화 사업 시작

그 후 1996년 서유진 선생, 이재의, 나 셋은 윤장현·오수성·정찬용씨 등이 이끄는 '시민연대모임'이 벌인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청년캠프'에서 5․18을 알리는 국제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 캠프는 5․18 정신의 국제적 계승사업의 일환으로 5․18 주간에 개최한 행사였다.

선생은 해외 연락과 방법을 코칭했고, 이재의씨는 기획을, 나는 전반적 사무를 총괄했다. 당시 세계 16개국 청년들이 참여하여 광주에서 일주일간의 캠프를 거쳐 갔다. 아직도 독재에 억압받고 있는 동남아 서남아시아 국가들에게 광주 5․18 정신과 운동 모델을 제공했다는 의의가 있는 행사였다.

그때 콩고 출신의 유엔인권운동가였던 움바야 교수(나중에 콩고민주정부 법무장관), 필리핀 민주화운동가로 아시아태평양평화군축회의 의장이었던 로물로페랄타씨 등이 선생과 함께 시니어 그룹으로 참여해 청년들을 격려했다.

이 캠프가 계기가 되어 시민연대모임은 1997년 5월 <5․18 특파원 리포트>를 간행했다. 선생은 브래들리 마틴 기자, 뉴욕타임스 서울주재기자였던 심재훈 기자와 연락해 5․18 당시 광주를 취재했던 외신특파원들을 찾아내 생생했던 기록을 모으는 데 도움을 주었다.

광주와 아시아 오가며 5․18 전도사 역할
  
 서유진은 현장활동가였다. 그는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등 아시아 각국을 돌며 5.18의 가치와 의미를 알리고 인권운동에 헌신했다.(사진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사드배치 반대 투쟁 현장을 누비는 모습.)
 서유진은 현장활동가였다. 그는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등 아시아 각국을 돌며 5.18의 가치와 의미를 알리고 인권운동에 헌신했다.(사진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사드배치 반대 투쟁 현장을 누비는 모습.)
ⓒ 서유진선생을추모하는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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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8년, 아시아 인권지도자들을 광주에 불러 진행한 '아시아인권헌장 광주선언' 발표를 본격적으로 도왔다. 그때 스리랑카 출신 법조인이자 시인인 바실 페르난도 전 아시아인권위원장과 관계를 돈독히 해, 동서남 아시아권에 본격적으로 5․18을 홍보하는 전도사가 되면서 해외인권운동가로 변신한다.

그는 캄보디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등에서 직접 아시아인권위원회 프로젝트를 담당하기도 했다. 또 광주를 비롯한 한국의 청년들이 아시아인권위를 매개로 인턴과 아시아 인권운동 체험활동을 수행하는 데 연계 역할을 했다. 주로 광주를 베이스로 활동하던 그는 나중에 아예 캄보디아로 베이스를 옮겨서 광주와 아시아를 오가며 활동했다.

당시 윤장현 시민연대모임 대표의 지원을 받아 시민연대모임 5.18기념재단과 연계해 광주 5․18의 세계화에 힘썼고, 아시아인권위원회 스페셜 엔보이(특사)로 임명돼 활동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미국 시민권자로 한국인 국적이 아니었고, 한국에서 관직을 받거나 봉급을 받았던 적이 없다. 친밀하게 지냈던 윤장현 시장, 김상윤 '윤상원 기념사업회' 이사장, 나간채 전남대 교수, 그밖에 친한 고등학교 동문과 항상 전주에 사는 누님이 그의 생활을 돌보았을 뿐이다. 

물론 '21세기 프론티어'와 광주의 많은 후배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의 빈손으로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생활비도 적게 들고 질척거리는 인연이 없는 캄보디아 마을을 그의 거처로 삼았던 것이다. 나중엔 '미국의 연금을 받아 활동하며 미국을 깐다'고 너털웃음을 웃기도 했다.

<신좌파의 상상력>을 쓴 보스턴 엔트워스공과대 교수 출신인 조지 카치아피카스가 그와 벗이 되었다. 조지 교수가 광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세계의 민중혁명을 조사연구했는데, 선생은 그와 비슷하게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광주 5․18혁명을 전도했으니 잘 맞았을 것이다. 조지 교수는 2015년에 <한국의 민중봉기> <아시아의 민중봉기>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노작의 밑거름에 선생의 땀방울이 있었을 것이다.

광주인권상 첫 수상자 한국으로 불러온 5․18 특사   
  
 2000년 제1회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동티모르 사나나 구즈마오 의장이 수상후 망월동을 5.18묘역을 참배하는 자리에서 서유진선생과 함께
 2000년 제1회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동티모르 사나나 구즈마오 의장이 수상후 망월동을 5.18묘역을 참배하는 자리에서 서유진선생과 함께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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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5․18기념재단이 처음으로 광주인권상을 제정하고 동티모르 저항민족평의회(CNTR) 의장 사나나 알렉산더 구스마오(Xanana Alexander Gusmao)를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였다.

구스마오의장이 이 상을 수상할지, 수상을 하러 광주에 올지가 현안이 된 적이 있다. 그때 선생이 동티모르에 파견되었다. 그는 명석한 판단으로 구스마오와 함께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당시 호세 라모스 오르타 외무장관(동티모르 2대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을 만나 인권상의 취지를 설명했다. 결국 구스마오 의장이 수상을 수락하고 광주로 왔다.

선생은 내게 PR(Public Relation)에 대해 자주 소개했다. 한국에서 PR하면 광고사업 정도라고 생각할 때 미국의 공공관계이론을 안내하며 책도 사주었던 것이다. 그는 PR로 사업을 하진 않았지만 모든 일을 할 때 PR 이론을 적극적으로 실행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운동가이면서 공공관계를 매우 잘하는 전략적인 사고를 가진 전문가였다.

그는 항상 강조했다. '네가 싸우는 전장터(Battle Ground)를 먼저 정의해라. 그리고 이길 수 있는지 판단하고 이기는 싸움을 벌여라' 그가 한국의 지독하고 저급한 선거판과 정치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해 현실에서 이런 이론은 잘 적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고한 친구 김태홍 국회의원이나 여러 사람들에게 그는 이런 PR전략을 자문해주기도 했다.

열정 넘치던 사람... "한국의 미래는 '청년'"
  
아마 선생을 만나 본 사람들은 그의 직선적인 말, 그리고 열정에 놀랐을 것이다. 그는 흰머리가 풀풀 날리는 때에도 한국의 이른바 '꼰대'들을 매우 증오했다. 그는 '이론만 달달 외우는 유학파 교수나 이론가'들을 경멸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도 천년만년 어른 행세나 하며 자신의 자리와 권력만 유지하는 한국의 '정치 꼰대' '사업 꼰대'들을 증오했다.

그리고 항상 청년들이 세상에 도전하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래서 잘난 체하는 지도자들이나 기관장 대표들 모임에 가는 일이 적었고 선술집에서 젊은 청년들을 만나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캄보디아에서는 세계에서 오는 청년들과 대화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 박재만 대표, 전 광주시 인권평화협력관 김수아 변호사, 서일권 전 광주청년센터장 등 많은 젊은 세대들이 그에게서 배우고 성장해 가고 있다. 

나는 32살 경에 그를 만났다. 그런데 정작 선생의 말년기에는 그와 별로 친하게 교류하지 못했다. 나는 그가 기대하는 대로 살지 못했고, 그가 싫어하는 정치인과 같이 활동을 하기도 했다. 소식을 매번 들었지만 우리는 서로 따뜻한 교류를 나누지 못한 채 이제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됐다. 그렇다고 오랜 우리의 우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캄보디아와 태국, 베트남등을 돌때 오토바이를 즐겨타며 여행하는 서유진선생
 캄보디아와 태국, 베트남등을 돌때 오토바이를 즐겨타며 여행하는 서유진선생
ⓒ 김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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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그의 명예를 빛내 주길

청년기 미국에서 해외민주화운동으로, 귀국하여 5․18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전도사로, 아시아의 여러 독재 국가 인권탄압 국가에서 활동한 국제인권운동가로 선생의 파란 많은 일생은 끝이 났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볼티모어에서 눈을 감았지만 그의 영혼은 광주나 아시아의 어느 곳에 쉬었으면 좋겠다. 나는 광주시와 '5․18 광주'가 선생의 명예를 빛나게 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광주에 바친 노고에 대한 대가라면 대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가'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존경과 영예를 가지고 뜻을 기리는 일이 될 것이다.

선생의 장례식은 20일 미국 현지시간으로 저녁 7시 볼티모어 한사랑교회에서 미주워싱턴지역 호남향우회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광주에서는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5월 22일 5.18 구묘역 안장심의위 회의 결과 참석위원 만장일치로 안장이 결정되었다. '서유진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6월 1일(토) 오전 10시 30분 5․18 구묘역에서 안장식 및 추모행사를 하기로 했다.

아직 우리의 모든 현실은 그가 죽음의 순간까지 절규했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 그의 외침은 죽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메아리 친다. 풍운의 국제혁명가답게 회고록 하나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그의 페이스북(Eugene Soh)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존재하고 있다.

쓸쓸하게 보낸 선생께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부르고 싶다.

'광주를 사랑하고 청년들에게 희망을 전했던 풍운의 5․18 인권혁명가 서유진 선생
잘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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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LA 한국학센터 연구원, 참여자치21 대표,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국장, 광주혁신클러스터추진단장, 광주문화도시협의회 공동대표, 기업주치의센터장, 광주광역시 시민특별보좌관, 지역미래연구원장등을 맡았다. 현재 중소상공인지원활동과 고전담론등을 연구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창조도시><김영집의 고전담론>등 씀

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