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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으로 35년간이나 수난이 이어졌다. 하지만, 민족 전체가 수난을 겪은 건 아니다. 민족 일부는 수난은커녕 도리어 부와 명예를 누렸다.

그 '일부'는 친일파만이 아니다. 대한제국 황실도 그에 포함된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으로 가장 큰 시련을 겪었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부와 명예를 향유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망했다'고 할 때의 '망했다'는 황실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황실의 통치권이 없어졌다는 의미일 뿐이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제국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어본에 적힌 명칭은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韓國倂合ニ關スル條約)'이다. 이것은 7일 뒤 발효됐다.

전체 8개 조문의 절반인 4개는 양국 군주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제1조에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고 적혀 있다. 제2조는 일왕(천황)이 제1조의 양여 조치를 수락한다는 규정이다.

한국 황제가 제1조 및 제2조를 통해 통치권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제3조 및 제4조에 규정돼 있다. 두 조문은 아래와 같다. 아래 문구 중 후비(后妃)는 정실부인과 후궁을 지칭한다. 왕이 다스리는 국가에서는 비(妃)가 중전이지만,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에서는 '비'가 후궁이었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后妃)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상응하여 상당한 존칭·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를 유지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前條)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하는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그들은 왜 황실의 지위 보장을 요구했나
 
 1918년에 촬영된 이왕가 기념사진. 서울 덕수궁 내부의 공사 현장에 이 사진이 붙어 있었다.
 1918년에 촬영된 이왕가 기념사진. 서울 덕수궁 내부의 공사 현장에 이 사진이 붙어 있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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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망하는 상황에서 망국 황제의 존칭·위엄·명예에 대해 이처럼 신경을 썼던 이유가 있다.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일 양국 간의 교섭 과정에서 나타난 일들을 근거로 김윤희 경원대 연구교수의 <이완용 평전>은 이렇게 말한다.
 
"순종이 끝까지 황실의 지위 문제를 고집했던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협상 전 이완용과 만났을 때 고종과 순종이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던 것은 황실의 지위 문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데라우치와의 협상에서 이완용이 관철하려 했던 것이 왕호 즉 황제와 황실에 대한 지위 문제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 보인다."
 
태황제 고종과 황제 순종이 대리인 이완용을 내세워 관철시키려 했던 게 황실의 지위 보장이었다는 것이다. 망국을 앞둔 상황에서 황실이 자신들의 지위를 크게 염려했다는 분석이다.

병합조약 제3조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함과 동시에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바뀌었다. 이왕가란 표현이 한국 황실을 비하할 목적으로 사용된 비공식적 표현이 아니었나 하는 시각도 있지만, 이것은 1910년 8월 29일 이후의 대한제국 황실을 지칭하는 공식 표현이었다.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이 되고, 순종(이척)은 이왕(李王)이 되었다. 또 대한제국이란 국호 대신, '조선' 칭호가 부활했다. 1910년 8월 29일 이후의 조선은, 일왕의 위임을 받은 조선총독이 다스리는 가운데 이왕가와 이왕이 위엄 및 명예를 유지하는 땅이었다.
 
 초대 이왕, 이척. 1910년대 사진으로 추정된다.
 초대 이왕, 이척. 1910년대 사진으로 추정된다.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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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에는 화족(華族)이라 불리는 귀족들이 있었다.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이 화족에 포함됐다. 이들이 왕족(황족) 다음의 제2신분이었다.

그런데 이왕가는 화족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이왕가는 왕공족(王公族)으로 분류됐다. 왕공족은 종래에 없었던 제도다. 대한제국 황실과 이완용의 요구에 못이겨 일본이 새로 창설한 제도였다. 이렇게 등장한 왕공족으로 인해 화족은 제3신분으로 밀리게 됐다. 이왕가는 일본 왕실보다는 낮지만 화족보다는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대한제국 황실은 신분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경제력도 보장받았다. 이들의 재산은 그 후로도 계속 보장됐다. 한국 황실이 이왕가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지위와 경제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대한제국 황실이 받은 대우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하는 망국의 황실이 그런 예우를 받는 일은 드물었다. 이왕무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의 논문 '대한제국 황실의 분해와 왕공족의 탄생'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식민지에서 기존의 군주들은 그 본래의 지위를 빼앗기고 평민으로 강등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히려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예우는 매우 이례적이라고까지 볼 수 있다. 메이지 천황의 조서로 규정된 왕공족의 지위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것이었다."
-고려사학회가 2016년 발행한 <한국사학보> 제64호.
 
1910년에 순종이 받은 이왕 지위는 1926년 그의 사망과 함께 전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에게 넘어갔다. 이은은 황태자가 되기 전에는 영친왕으로 불렸었다. 이왕(李王) 이은 하에서 이왕세자가 된 사람은 아들인 이구였다.
 
 제2대 이왕, 이은.
 제2대 이왕, 이은.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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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의 이왕 지위와 이구의 이왕세자 지위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뒤에까지 유지됐다. 1947년 5월 3일부터 그 지위가 없어졌다. 해방 2년 뒤 이맘때 와서야 이왕가가 최종적으로 소멸됐던 것이다. 그러니까 해방 2년 뒤까지도 대한제국 황족들이 일본 황실 휘하에 있었던 것이다.

이왕가의 소멸은 왕공족 폐지의 결과였다. 미군정 하의 일본이 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이 제도가 폐지됐다. 1947년 5월 4일자 <경향신문>은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아래 인용문 속의 '동비'에 해당하는 한자는 '같은 왕의 부인'이란 의미의 同妃로 보인다.
 
"일본의 신헌법 실시와 동시에 이왕·동비를 비롯하여 각 왕공족은 일한합병 시 수여된 조서·왕공가규범 등은 무효로 되고, 3일부터 왕공족의 적을 잃고 재류조선인으로 된다고 한다. 즉 3일부터 전하의 존칭도 없어지고 이왕은 이근흥, 왕세자는 이구학으로 되고 왕비의 칭호도 3일부터는 이근흥 부인으로 부르게 된다고 한다."
  
 1947년 5월 4일자 <경향신문>.
 1947년 5월 4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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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황실도 고난을 겪었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덕혜옹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황족들이 시련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또 황족 일부가 독립운동과 관련을 맺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 지위를 보장받음으로 인해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남겼다. 망국의 책임을 안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야 할 집단이 일본 치하에서 위엄과 명예를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문젯거리라고 볼 수도 있다.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란 간판을 유지하면서 일본 왕실에 준하는 혹은 버금가는 지위를 누린 것은 민중의 독립투쟁 정신을 떨어트릴 만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들의 행위는 한민족이 식민통치에 동의하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 또 친일파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대한제국 황실이 일제강점기보다 2년이나 더 존속하면서 위엄과 명예를 누렸지만, 이 부분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나라를 빼앗길 때뿐 아니라 빼앗긴 뒤에도 못난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못난 모습'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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