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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장면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장면
ⓒ 김대중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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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18일은 한국 헌정사와 민주주의 역사에 고딕체로 기록되는 날이다.

이날 반세기 만에 여ㆍ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반세기 '50년'이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정치사를 두고 하는 말이고, 정확히는 한국역사상 평화적 방법의 정권교체는 최초의 일이다.

그동안 창업과 쿠데타, 혁명, 정변, 반란 등 여러 형태의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피지배계층이 평화적 방법으로 집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60년 장면 정권을 최초의 정권교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4월혁명을 통해 얻어진 '혁명과정의 선거'로 취득한 정권이고, 1992년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의 경우는 3당 야합으로 얻어진, 군사정권의 사생아로 출생한 것이며, 여ㆍ야 정권교체는 아니었다.

이렇게 볼 때 97년 12월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사적으로 최초의 여ㆍ야 평화적 수평적 정권교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997년 대선 포스터
 1997년 대선 포스터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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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대선은 여당인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제1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 김대중, 제2야당인 국민신당에서 이인제 후보가 입후보하여 각축을 벌였다.

당초 이회창 후보가 집권여당의 세를 업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50% 이상의 승세를 잡았으나, 두 아들의 병역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급속히 인기가 추락하고, 네 번째 대선에 도전한 김대중 후보의 인기가 꾸준히 상승하여 중후반 이후에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인제 후보는 젊은 이미지에 한때 폭발적 인기를 누렸지만, 경선불복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과 한나라당 부산ㆍ경남 민주계 의원들의 한나라당 잔류로 대세를 휘어잡는 데 실패함으로써 여론조사에서 3위를 면치 못했다.

제15대 대선도 과거 선거처럼 집권세력에 의한 각종 용공음해와 불법 탈법선거 운동이 자행되었다. 특히 김대중 후보에 대한 극심한 매카시즘 공세가 전개되어 선거전을 정책대결이 아닌 색깔론으로 몰아갔다.

보수 족벌 신문은 기사와 논평을 통해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배척하면서 정치문제로까지 비화시키는 등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15대 대선의 특징은 대규모 청중동원의 연설회 대신에 TV토론회가 열려서 유권자들이 후보를 직접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김종필ㆍ박태준과의 연합과 TV정책토론이었다. 역대 대선에서 집권세력과 보수 언론매체로부터 용공음해와 과격성 음해에 타격을 입어온 김 후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TV토론을 통해 자신의 정책과 진면모를 직접 국민에게 보여준 것이 승리의 요인이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창한 말솜씨로 많은 연설과 어록들을 남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창한 말솜씨로 많은 연설과 어록들을 남겼다.
ⓒ 김대중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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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선 역시 지역주의가 극성을 부렸다.
영남지역에서는 유력한 영남권 후보가 없었는 데도 반김대중 정서는 이회창 후보의 몰표현상으로 나타났고, 호남지역에서는 김대중 후보에게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충청권에서는 DJP연합 관계로 김대중 후보의 표가 크게 상승했다.

인구의 40% 이상이 몰려 있는 수도권의 향배가 대세를 판가름할 것으로 예측된대로 김 후보는 서울ㆍ인천ㆍ경기도에서 4% 안팎의 격차로 이 후보를 눌렀다.

전체적으로 볼 때 김 후보는 전국 16개 시ㆍ도 중 10개 시ㆍ도에서 1위를 차지하고, 이 후보는 강원도와 영남권 등 6개 시ㆍ도에서 수위를 지켰으나, 당초 기대만큼 표를 얻지 못했다. 이인제 후보도 부산ㆍ경남ㆍ경기도, 충청권에서 20~30%의 지지를 얻었으나, 수도권에서 10%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쳐 3위로 밀려났다.

대선후보들은 '정권교체' (김대중), '안정'(이회창), '세대교체'(이인제) 등 구호를 내걸었으나,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한파로 얼어붙은 월급생활자 및 중간계층의 '정권교체를 통한 개혁과 위기극복' 심리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39만 표 차이로 대선에 승리한 김대중은 당선이 확정되면서 첫 소감에서 "50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룬 저력으로 국민 모두의 힘을 모아 경제위기 국난을 극복해 나가는 데 온 힘을 다하겠다"고 밝히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새정부의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대선에 승리한 김대중은 '당선자' 자격으로 IMF 국난극복에 발벗고 나섰다.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가진 대통령취임식에는 김영삼ㆍ노태우ㆍ전두환ㆍ최규하 등 전직대통령과 시민, 민주인사 5천여 명이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에 의한 국정개혁과 IMF체제의 조속한 극복을 다짐했다.

한국의 평화적 수평적 정권교체에 대해 중국 〈차이나 데일리〉(97. 12. 20)는 "이번 선거는 정부수립 이래 첫 번째 정권교체를 이루게 했으며 정권교체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했고, 프랑스 〈르 몽드〉(97. 12. 19)는 "한국 유권자들이 김대중 씨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 정권교체를 이룩함으로써 진정한 정치적 성숙을 보여주었고,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같은 정권교체를 선택한 것은 사태해결과 국가장래 측면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또 미국의 〈LA 타임스〉(97. 12. 23)는 "김대중 씨는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 라고 극찬을 듣고 있으며, 경제가 여러운 시점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 용감한 직업 개혁가야말로 바로 역사가 원하는 대통령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라고 논평했다.

김대중 정권의 출범이 국내적으로는 해방 후 최초로 합법성과 도덕성, 즉 정통성을 갖춘 '국민의 정부'의 의미를 부여받는다면, 국제적으로는 동북아 최초로 민주절차에 의해 여ㆍ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그것도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당선됨으로써 한국이 긴 세월 동안 받아온 군사독재와 인권탄압의 검은 이미지를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김 대통령 정부에게는 IMF외환위기의 조속한 극복과 지역화합, 남북문제 해결이라는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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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