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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대 총선 결과 제1야당이 된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이 축하인사를받고 있다.
 13대 총선 결과 제1야당이 된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이 축하인사를받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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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특장의 하나는 국가 지도자들은 무지몽매한데 국민(민중)은 현명하다는 점이다.

야권분열로 군부정권 종식은 실패했으나 국민은 제13대 총선에서 야당에 다수의석을 몰아주었다. 88년 4월 26일 실시된 총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125석, 김대중 평민당 70석, 김영삼 민주당 59석, 김종필 공화당 35석으로 '여소야대'의 의회가 구성되었다.

언론에서는 세 야당 총재의 성씨를 따라 '제2의 3김시대' 또는 '3김'으로 통칭하였다. 6월항쟁 이후 노태우 정부 초기는 3김에 의해 정국이 주도되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89년 당시 민주당 김영삼 총재(오른쪽),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운데),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여권의 중간평가 조기강행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89년 당시 민주당 김영삼 총재(오른쪽),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운데),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여권의 중간평가 조기강행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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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총재는 89년 4월 26일 3야 총재 회담을 갖고 합의문을 채택했다. 합의문과 함께 '당면과제'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5공청산과 민주화 = △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처리를 포함한 5공청산과 민주화 없이는 현시국의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없으며 정국을 안정시킬 수 없다 △ 5공청산은 최ㆍ전 전직대통령의 국회증언을 통한 진상규명과 이에 따른 책임소재가 밝혀지고 5공비리와 광주민주화운동의 핵심 책임자들에 대한 처리가 이루어질 때 마무리되기 때문에 정부여당의 이에 대한 결단을 촉구한다 △ 또한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정부는 국민에게 사과하고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며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에 필요한 입법예산 조치가 행하여지고 민주화 영령을 위한 기념사업도 마무리되어야 한다.

3김 총재는 이외에도 △ 노사 및 학원문제 △ 남북통일문제와 북방정책 △ 좌익세력과 민주인사문제 △ 경제문제 △ 악법개폐와 거부권행사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합의를 보고 공동투쟁을 다짐했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은 88년 3월 31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비리와 관련, 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을 구속한 것을 시발로, △ 전두환 일가 비리조사 착수, 그리고 12월 13일 검찰에 5공비리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여 차규헌 전 교통장관, 김종호 전 건설장관, 이민하 전 동양고속회장을 구속하고, 이어 전두환 처삼촌 이규승, 손재석 전 문교장관, 이학봉 민정당 의원,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김인배 일해재단 사무처장,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을 구속 또는 조사하여 사법조처했다. 검찰은 5공비리사건에 대한 수사를 통해 47명을 구속했고 2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야당은 검찰수사를 '축소지향'이라고 비판하면서, 5공핵심 6인, 즉 정호용(광주항쟁 당시 특전사령관), 이원조(5공시절 은행감독원장) 의원 및 이희성 주공이사장(광주항쟁 당시계엄사령관)의 공직사퇴와 장세동, 허문도(언론탄압), 안무혁(양대선거 당시 안기부장으로 선거부정 관련) 3인의 사법처리를 강력히 요구했다.

5공청산 작업은 11월 3일, 5공특위의 가동 및 청문회 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언론사상 최초의 생중계로 진행된 '5공비리' '광주문제' '언론문제' 청문회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리와 음모를 부분적으로 나마 폭로, 국회기능을 활성화시키는 동시에 밀실정치를 공개정치로 유도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높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으나, 증인들의 위증과 후속조치 미흡 등 많은 문제점으로 남겼다.

88년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일해재단청문회'는 장세동과 정주영 등을 증인으로 소환, 기금모금의 강제성, 정경유착의 실태, 청와대경호실과 보안사 등 권력촉수의 전횡 등을 폭로 했다.

11월 18일부터 광주학살 피해자를 비롯, 김대중ㆍ이희성ㆍ정호용 등 65명의 증인을 출석시켜 6차례에 걸쳐 진행된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는 5ㆍ17비상계엄확대 조치의 불법성, 공수부대 지휘책임, 발포책임자, 정확한 사망자 수 등은 끝내 밝히지 못했다. '언론청문회'는 11월 21일부터 허문도ㆍ이상재ㆍ허삼수 등을 소환, 언론인 숙정ㆍ언론통폐합 등이 신군부의 언론장악 음모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냈다.

청문회를 통해 각종 비리가 폭로되는 한편 전두환 친형 전기환, 처남 이창식 등 친인척이 잇따라 구속됨으로써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전두환은 11월 23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 정치자금 139억 원과 연희동 사저 등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밝히고 강원도 백담사로 쫓겨가듯이 은둔했다.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 노무현 공식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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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 정권은 야당 주장의 5공핵심 6인의 사법처리를 비롯하여 청문회에서 드러난 각종 비리의 처리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문익환ㆍ황석영ㆍ서경원 등의 방북사건, 울산사태 등 잇단 사건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5공청산 작업을 크게 위축시켰다. 특히 5공 핵심 6인 처리문제에 관해 김영삼ㆍ김종필이 3야 합의선에서 후퇴, 민정당 쪽에 기욺으로써 야 3당공조를 흔들고 5공청산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야권공조체제가 무너지면서 5공청산작업은 지지부진해졌고, 89년 12월 15일 청와대 영수회담 끝에 ① 전두환의 1회 국회증언 및 녹화중계 ② 정호용ㆍ이희성의 공직사퇴, 이원조의 고발 ③ 광주시민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입법추진 등 11개항의 타협안에 여야가 합의했다.
 
13대 총선 이후 대구ㆍ경북의 1위 정당의 지역구 후보 득표율 13대 총선 이후 대구ㆍ경북의 1위 정당의 지역구 후보 득표율
▲ 13대 총선 이후 대구ㆍ경북의 1위 정당의 지역구 후보 득표율 13대 총선 이후 대구ㆍ경북의 1위 정당의 지역구 후보 득표율
ⓒ 안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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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12월 31일의 전두환 국회증언은 광주의 발포를 '자위권발동'이라고 강변하는 등 변명으로 일관, 야당의원들의 야유와 폭언 속에 파행적으로 끝났다. 이로써 국민의 여망을 담은 5공청산작업은 큰 성과 없이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90년 1월 22일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청와대에서 회동, 3당통합에 의한 신당 창당 및 각당 5인씩 15명으로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키로 한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날 노태우는 청와대에서 양옆에 김영삼과 김종필을 세워놓고 3당통합 사실을 발표하여 그야말로 정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들 3인은 회담을 끝낸 뒤 청와대 접견실에서 〈새로운 역사창조를 위한 공동선언〉을 발표, 통합신당은 온건중도의 민족 민주세력의 통합을 통한 새로운 국민정당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88년 4ㆍ26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로 출범한 지 2년여 만에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여대야소'로 탈바꿈시킨 3당야합은 많은 곡절을 겪으면서 90년대 정국의 돌연변수로 등장했다. 3당통합을 선언한 민정ㆍ민주ㆍ공화당은 합당을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신당창당을 위한 3당의 15인통합추진위원회는 1월 24일 첫 회의에서 '민자당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통합에 박차를 가해 2월 9일 민주자유당(민자당) 합당대회를 열었다.
  
 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고 김 전 총리(맨 오른쪽)가 민자당 최고위원이였던 1991년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창당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왼쪽부터 박태준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
 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고 김 전 총리(맨 오른쪽)가 민자당 최고위원이였던 1991년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창당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왼쪽부터 박태준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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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당은 지도체제를 총재 노태우, 대표최고위원 김영삼, 최고위원 김종필로 선정하고, 강령으로 ① 성숙한 민주정치 구현 ② 지속적인 경제성장, 복지경제 실현 ③ 공동체사회 구축 ④ 교육의 자율성과 기회균등의 보장 ⑤ 평화적 민족통일과 자주적 외교노력 등 5개항을 채택했다.  

민자당은 의석 221석을 확보, 개헌선인 원내 3분의 2 의석 이상이 되었다. 여소야대 원내구도가 거대한 여당과 왜소한 야당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3당야합에는 민주당 소속의 이기택ㆍ노무현ㆍ김정길ㆍ김광일 의원 등이 불참을 선언했다.

전격적인 3당야합과 공룡 같은 여당의 등장에 제1야당 평민당은 거센 반발을 보였다. 평민당은 1월 23일 의원총회 및 당무지도합동회의 연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의 위약과 두 야당총재의 정치적 변신을 신랄히 규탄했다.

3당통합은 총선민의를 저버린 정치적 야합행위이기 때문에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하고 총선에서 다시 국민의사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평민당은 내각제 개헌을 반대하기 위한 1천만 명 서명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는 등 강경한 대여투쟁에 나섰다.
  
 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경남에서 한나라당(옛 민자당)의 20년 독주 계기가 되었던 3당 합당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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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시일 내에 거대여당으로 돌변한 민자당은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세평대로 사사건건 계파별로 집안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특히 내각제합의각서 유출사건을 계기로 심각한 대립을 보였다. 그리고 국회에서는 다수의 힘으로 변칙과 날치기를 저질러 여야의 물리적인 대치상태를 가져왔다. 3당야합은 부산ㆍ경남의 전통적인 야당세력이 보수화현상을 가져오게 되면서 한국 민주화에 크게 역행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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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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