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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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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2월의 한국은 계절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한겨울의 동토였다.

2월은 아직 봄이 오기는 이른 계절이었고, 전두환 정권에서 두 번째 총선거인 12대 총선이 12일로 예정되었지만 주요 야당인사들이 여전히 정치규제에 묶여 있는 데다 야권의 난립으로 선거는 별로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유일한 관심이라면 제도권의 제1야당인 민한당과 창당된 지 한 달도 채 안된 신한민주당(신민당)의 의석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투표일을 앞두고 신생 신민당이 서서히 바람을 일으키면서 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고, 합동강연회장에서는 그동안 금기시되다시피한 '특정인'의 이름이 거침없이 쏟아지면서 5공비판과 민주화의 목청이 언 땅을 녹이기 시작했다.

투표일을 4일 앞두고 그 '특정인'이 전격적으로 귀국했다.
전두환 정부는 그동안 계속해서 김대중의 귀국을 거부하며 만약 귀국하면 다시 투옥시키겠다고 협박하는 등 강경하게 나왔던 것이다. 게다가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아키노가 귀국도중 마닐라 공항에서 저격당해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관계로 미국정부도 그의 신변안전을 이유로 귀국을 만류했다.

그런데도 김대중은 미국에 망명한 지 2년여 만에 2월 8일 김포공항을 통해 전격적으로 귀국하고, 이 사건은 서서히 달아오르던 2ㆍ12선거전에 기름을 끼얹는 듯한 역할을 하여 마침내 선거혁명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치게 되었다.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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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씨가 귀국한 8일 오전 10시 30분 경부터 김포가도 공항입구에서 500여 명의 학생들이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 오후 3시 경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됐다. 학생들은 〈전면해금 실시하라〉, 〈환영 김대중선생 귀국〉등의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데모가를 불렀다.

오전 11시 반경 3만여 명으로 불어난 학생과 시민들은 김포 가두 여러 곳에서 스크럼을 짜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이 시위학생들을 연행할 때마다 '와' 하고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낮 12시 20분 경 5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스크럼을 짜고 김포가도 한복판으로 들어서 〈일당독재 결사반대〉를 외치며 전경들과 30분 가량 대치했다. 경찰은 이때부터 최루탄을 쏘며 시위자들을 해산시켰다. 공항 입구에 모였던 3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에 밀려 오후 3시 경 해산했다.

이날 양화교 부근 화곡동 입구에는 5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 오전 11시 경부터 차량통행이 완전 차단되었다가 오후 1시 15분 경부터 차량통행이 재개됐다.

5ㆍ17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많은 인파가 김대중의 귀국을 지켜보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몰려나갔다. 그러나 막상 본인은 일체의 외부접촉 없이 삼엄한 경계를 편 당국의 호위 속에 8일 오후 1시 20분께 커튼으로 창을 가린 18인승 미니버스에 태워졌다. 마포구 동교동 자택 부근에도 경찰이 경계망을 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이날 김대중의 귀국길에는 미하원의 에드워드 페이언, 토머스 폴리에타 의원 등 20여 명의 외국인이 동행했다.

2ㆍ12총선은 광주학살로 상징되는 유혈참극을 저지르고, 헌정을 유린하면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처음으로 민주세력이 당당하게 대결하여 일전을 겨룬 첫 승부처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김영삼이 죽음을 각오한 23일 간의 단식 끝에 흩어진 야권을 결속했고, 국외에서는 김대중이 국내 민주화세력과 연계하면서 역시 죽음을 각오한 귀국을 단행하여 모처럼 민주세력이 결속하여 전두환 세력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총선 결과는 의외였다.

지역구 총의석수 284석 중 민정당 87석, 신민당 50석, 민한당 26석, 국민당 15석, 기타 6석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전국구 61석을 합쳐 148석, 신민당은 17석을 합쳐 67석, 민한당은 9석을 합쳐 35석, 국민당은 5석을 합쳐 30석이 되었다. 득표율을 보면 민정 35.25%, 신민 29.26%, 민한 19.68%, 국민 9.16%로 야권의 총득표율이 58.1%로 민정당을 크게 압도했다.

선거의 특징은 선거일을 불과 20여 일 앞두고 창당한 신민당이 67석을 확보,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한편 대도시를 휩쓸어 서울 14개 지역, 부산 6개 지역, 광주ㆍ인천ㆍ대전 각 2개 지역 등 5대 도시에서 전원 당선자를 내고 대구 3개 지역 중 2개 지역에서 승리했다.

또한 서울ㆍ부산 등지에서 거의 1등을 차지함으로써 여촌야도의 투표성향이 되살아나는 듯한 경향을 보였다. 대도시의 득표율에 있어서도 신민당은 민정당을 앞질렀다.

2ㆍ12총선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함에 따라 그동안 제도권 야당으로 안주해온 민한당이 붕괴되어 자동적으로 야권통합의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자생야당'의 등장으로 양김 중심의 야권이 전두환 정권과의 한판 대결을 가져오게 하는 민주장정의 시초가 되었다.

신민당은 총선 후 열린 제2차 전당대회에서 사실상 당을 이끌어온 김영삼ㆍ김대중을 상임고문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주류와 비주류의 시국대처 방법론과 상도동ㆍ동교동의 상호견제 및 암투는 김녹영 부총재(국회 부의장)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부의장 선출과정에서 분열을 일으킨 것을 비롯, 대여투쟁 노선을 둘러싸고 유한열ㆍ이태구가 주도한 신보수회 소속의원 12명이 집단탈당하는 등 당내 전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민당은 5공정권을 반대하는 국민의 성원을 바탕으로 직선제 개헌을 위한 원내외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내각제 개헌을 시사하는 '이민우 구상'이라는 돌출현상에 부닥치게 되고, 이로 인해 당 내분이 격화되어 김영삼ㆍ김대중 지지의원 73명이 분당을 선언, 통일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신민당은 이민우ㆍ이철승ㆍ김재광ㆍ신도환을 중심으로 하는 허울만 남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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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