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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늬우스>가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유신체제하에서 동년 11월 21일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이 제정되었음을 알리는 신문보도를 인용하고 있다.
 <대한늬우스>가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유신체제하에서 동년 11월 21일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이 제정되었음을 알리는 신문보도를 인용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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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권력욕은 끝간 데를 몰랐다.

그는 전제군주를 꿈꾸었다. 아니면 일본 메이지유신체제를 노렸다. 메이지처럼 '천황'이 되고자 했는지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은 72년 10월 17일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시켜 헌법기능을 마비시키고, 야당의 정치활동을 전면봉쇄하는 사실상의 친위쿠데타를 감행했다.

박정희는 5ㆍ16쿠데타를 일으킨 지 11년, 3선연임 금지의 헌법을 고친 지 3년, 4ㆍ27대통령선거로 8대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 반 만에 또 다시 쿠데타로 헌정을 짓밟고,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이로부터 79년 10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7년 동안을 1인 군주처럼 군림하면서 전횡을 일삼았다. 그중에는 "다양한 직업여성 100여 명을 보유"한 중앙정보부가 주선한 여색행각도 끼어 있었다.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10월 유신을 알리는 1972년 10월 18일 매일경제신문 1면
▲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10월 유신을 알리는 1972년 10월 18일 매일경제신문 1면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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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은 이날 저녁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비상조치를 감행했다. 박대통령이 발표한 4개항의 비상조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72년 10월 17일 하오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②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 하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③ 비상국무회의는 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한다.
④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한다.
  
박대통령은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 비상조치의 발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열강의 세력균형의 변화와 남북한 간의 사태진전에 따른 평화통일과 남북대화를 추진할 주체가 필요한데, 현행법령과 체제는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오늘날의 상황에 적응할 수 없으며, 대의기구는 파쟁과 정략의 희생이 되어 통일과 남북대화를 뒷받침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비상조치로써 체제개혁을 단행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박정희는 노재현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포고령 제1호로서 ① 각 대학의 휴교조치 ②정치집회 금지 ③언론ㆍ출판ㆍ보도ㆍ방송의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했다. 

계엄당국은 신민당 의원 김상현ㆍ이세규ㆍ최형우ㆍ강근호ㆍ이종남ㆍ조윤형ㆍ김한수ㆍ조연하 등을 구속하고, 이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는 등 공포분위기 속에서 체제정비에 나섰다.

72년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헌법개정안이 의결ㆍ공고되고 한 달간의 공고기간 동안 정부는 계몽활동을 벌여 11월 21일 국민투표에 회부했다. 반대운동이 금지된 일방적인 개헌안의 국민투표는 1,441만 714명이 투표하여 91.5%에 이르는 찬성표로 통과시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투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투표는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투표였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투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투표는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투표였다.
ⓒ 다음블로그(gmania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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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정된 '유신헌법'은 임기 6년의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선출토록 하고, 국회의원 3분의 1도 여기서 뽑기로 하는 등 '국체의 변혁'에 가까울 정도의 비민주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박정희는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강력한 통치체제의 구축이라는 명문을 내세워 전제적 1인체제를 구축할 목적으로,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유신헌법'을 만든 것이다.

'유신헌법'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대통령선거제도를 국민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선제로 바꾸고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ㆍ국회해산권 등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하며 △대통령이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 및 법관의 임면권을 갖고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소선구제에서 2인선출구제로 바꿔 여야의원이 동반 당선되도록 만들었다.

야당의 의석수에 제한을 가하고, 국회의 비판기능을 전면 마비시키는 등,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고 입법부와 사법부를 정권의 시녀로 전락시킨 반민주적인 악법이었다.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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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은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로서, 박정희는 이미 10ㆍ27 보위법 파동과 7ㆍ4남북공동성명 등 내외적인 여건을 조성한 다음 야당의 분열을 계기삼아 또 다시 헌정을 유린한 것이다.

당시 신민당은 양분상태에서 치열한 당권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71년의 진산파동으로 신민당의 당권을 장악한 김홍일은 72년의 전당대회를 맞아 유진산의 롤백작전에 직면하자 김대중계의 지원을 받아 유진산 사단과 대결을 시도하다가 정면충돌을 빚어 신민당은 마침내 분당사태를 맞게 되었다.

유진산 사단과 김홍일 사단으로 갈라진 신민당의 전당대회는 72년 9월 26일과 27일 각각 시민회관과 효창동 김홍일 자택에서 별도의 대회를 열어 분당사태를 빚고 만 것이다.

시민회관대회에는 유진산ㆍ고흥문ㆍ김영삼ㆍ이철승ㆍ정해영ㆍ신도환 등 이른바 진산사단의 범주류가 참석하여 합법성을 주장하고, 효창동대회에서는 김홍일ㆍ김대중ㆍ양일동계가 참석하여 시민회관대회의 무효를 선언했다. 

두 대회가 개최된 후 김홍일측이 유진산을 상대로 당대표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여 법통시비가 일어난 가운데, 국회는 8ㆍ3재정조치 이후 문제가 된 '동결사채'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국정감사의 활동을 벌이다가 10월 유신으로 국회해산과 정치활동의 중지라는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박정희는 이같은 야당의 분열상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거에 단독출마,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체제를 가동시켰다. 박정희가 무력을 동원한 비상수단으로 체제개편을 단행하게 된 것은 3선개헌에 이어 또 다시 개헌을 단행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 밖으로 고전한 데다 야당에 의한 국회의 비판기능의 활성화로 인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쿠데타를 감행하기 전에 두 차례나 북한측에 '사전통보'한 것으로 후일 드러났다. 주한 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72년 10월 31일자 비밀문건(2급 - Secret)에 따르면,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은 10월 12일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나서 "남북 대화를 지속적이고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시스템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우리 정부는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비밀문건은 또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실무대표인 정홍진이 계엄선포 하루 전인 10월 16일 북쪽 실무대표인 김덕현을 판문점에서 만나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통보했다"고 적었다.

지난 2009년에 공개된 동독과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에는 이후락이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대표인 김영주에게 "박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10월 16일) 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적혀있다.

우연인지 '짜고 친 고스톱' 인지, 박정희의 유신헌법과 김일성을 유일체제로 하는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이 72년 12월 27일 같은 날 제정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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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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