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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의 세계질서를 만드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던 두 사건이 있다. 쌍둥이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두 가지는 제주 4.3 사건과 그리스 내전이다.

그리스 내전은 1948년 4월 3일부터 발생한 제주 4.3과 같은 시기에 발생했다. 이 나라의 내전은 1946년부터 1949년 사이에 전개됐다. 두 사건은 이처럼 같은 시기에 발생했을 뿐 아니라 거의 동일한 양상으로도 전개됐다. 또 사건을 움직이는 주체도 동일했고, 사건이 현대 세계질서에 미친 파급력도 동일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리스 내전에 참여한 병력이 더 많고 외세의 개입도 더 다양했다는 정도다.

한국이 일제 식민지배를 받은 것처럼,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한국이 해방 뒤에 좌우 대결을 겪은 것처럼, 그리스도 제2차 대전 종전을 전후로 좌우 대립을 겪었다. 그 결과로 발생한 것이 미국·영국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과 불가리아·유고·알바니아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그리스 민주군의 내전이다. 이 대결은 미국이 개입한 뒤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제주와 그리스, 그리고 미국
 
 그리스 내전 직전의 아테네 상황.
 그리스 내전 직전의 아테네 상황.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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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미국 UP 통신(훗날의 UPI) 서울특파원인 제임스 로퍼(James Roper)가 본사에 송고한 기사들을 보면, 당시 미국인들이 한국 문제와 그리스 문제, 제주 문제와 그리스 문제를 동일선상에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로퍼 특파원이 쓴 기사들은 당시 한국 언론에 그대로 옮겨져 보도됐다. 그중 하나가 1948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아래와 같이 실렸다. '조선은 희랍 사태 재연, 좌우 항쟁도 근사(近似)'라는 제목이 달린 기사다. '희랍'은 그리스를 지칭하는 한자어다.
 
"조선은 희랍 사태의 완전한 재연이다. 양국에서의 공산당 전술은 동일한 것이며, 희랍에서 발생한 전투는 조선에서도 발생할지 모른다. 양국은 지리적으로 근사(유사)하다. 양국은 다 산악이 많은 반도다. 희랍반도는 공산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발칸에 연결되어 있으며, 조선은 역시 역사적으로 소란의 온상지이며 현재 공산당이 세력을 펴고 있는 만주에 연결되어 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미국이 한국 및 그리스 문제에 개입하는 이유가 설명돼 있다. 민주주의의 거점, 달리 말하면 미국 세계패권의 거점을 확립하려면 두 지역을 장악해야 한다는 당시 미국인들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 이어지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여차한(如此-, 이와 같은) 정세는 조선과 희랍을 군사적 견지에서 처리하기 곤란케 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은 정치적 이유로 동지(同地, 이 지역)에 민주주의 거점을 두려고 하여 금전·선전 및 무기 기증으로 투쟁하였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연합국은 조선과 희랍에서 자유선거를 지지하였다."
 
 1948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제임스 로퍼의 기사.
 1948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제임스 로퍼의 기사.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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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임스 로퍼의 또 다른 기사에서는 제주 4.3과 그리스 내전까지도 같은 선상에 놓고 파악하는 미국인들의 인식이 드러난다. 역사학자 허호준의 논문 '냉전체제 형성기 미국의 제3세계 개입과 역할-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의 비교를 중심으로'에 로퍼의 또 다른 기사가 인용돼 있다. 이 논문은 당시 한국 언론에 번역된 로퍼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 실었다.
 
"미국 당국은 경찰이 특히 소란한 제주도에서 수인(囚人, 죄수)을 구타함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경찰은 관인(寬仁, 관용)을 약속하고 있으나, 그들이 복종함은 곤란시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경찰에 대한 증오감을 선동시키기가 용이하다. 이는 희랍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희랍에서는 거야(拒野, 다루기 힘든)하고 난폭한 경찰 부대가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1944년 12월 3일에 경찰이 좌익 시위 군중에 발포했다." - 제주4.3연구소가 2015년 발행한 <4·3과 역사> 제14호에서 재인용
 
미국과 한국 경찰이 폭력을 자제하고 있지만 제주도민들이 복종하지 않아서 사태가 커지고 있다는 미군정의 왜곡된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 기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주 4.3과 그리스 내전이 동일한 양상을 띠는 사건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다.

로퍼 특파원의 두 기사는 한국과 그리스, 제주와 그리스 사이의 공통점에 주목하는 미국인들의 시각을 반영한다. 공산주의를 견제하고 '민주주의 거점'을 구축할 필요성에서 한국 제주와 그리스를 바라보는 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두 지역을 바라보는 관점이 동일하기 때문에, 두 지역에서 발생한 상황에 대한 그들의 대처법 역시 동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내전을 계기로 탄생한 '트루먼 독트린'

제주 4.3보다 약간 먼저 개시된 그리스 내전을 계기로, 미국은 전후 외교정책의 기조가 될 트루먼 독트린을 확립했다. 그리스 내전을 명분으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겠다'는 선언을 1947년 3월 12일 내놓게 됐던 것이다.

그리스에서 거세지는 반미 투쟁의 열기 앞에서 미국은 움츠려들지 않았다. 지금의 미국 같으면 움츠려들 수도 있었지만, 당시의 미국은 아직 '싱싱한' 세계 최강이었다. 그래서 그리스 상황을 보면서 적극적인 대결정책, 공세적인 냉전정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미국이 이처럼 그리스에 집착하게 된 배경을 위의 허호준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은 1940년대 후반 동·서를 연결하는 육·해·공로의 고속도로로서 중동의 거대한 자원 가치를 인식했다. 그리스는 이곳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미국은 중동에서 소련의 야욕이 채워진다면, 미국의 이익은 물론 소련과의 일반적인 입장에서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고, 이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봉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는 1453년 동로마제국 멸망 이후로 오스만투르크(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이 나라는 투르크가 약해지는 틈을 타 1821년부터 독립전쟁을 벌이다가 1822년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투르크와 싸웠다.

이런 역사를 지켜본 미국인들의 눈에는, 그리스가 터키와 중동을 견제하는 데 유용한 지역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또 미국은 그리스 위쪽의 동유럽 공산 진영을 견제하는 데도 그리스가 유용한 땅이 되리라고 인식했다.

이 같은 인식에서 그리스를 거점으로 냉전질서를 전개하는 트루먼 독트린이 형성됐고, 이에 따라 미국은 반미세력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대결 국면을 펼치겠다는 태도를 굳히게 됐다. 이런 트루먼 독트린이 확립되던 초기에,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게 제주 4.3 사건이었다.

그리스가 중동에 대한 소련의 진출을 견제하는 데 유용했다면, 한국과 제주는 소련의 동아시아 진출을 견제하는 데 유용했다. 동시에 한국과 제주는, 미국의 적에서 우방으로 변하고 있던 일본을 지켜주는 울타리로도 유용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한국과 제주를 그리스와 똑같이 취급하게 됐다.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폭력적 방법으로라도 사수해야 할 지역으로 인식하게 됐다. 이런 미국의 입장이 그리스 내전 개입과 제주 4.3 진압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제주 4.3과 그리스 내전은, 신생 세계최강인 미국 편에 서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본보기였다. 이를 통해 미국은 동아시아와 중동의 동맹국들을 친미 진영에 붙들어두고자 했다. 제주 4.3과 그리스 내전이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반미운동의 후과(後果)를 인식시켜주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군·경의 사과, 하지만 
 
4·3 추념식 참석한 민갑룡 경찰청장... 경찰총수 첫 '사과' 민갑룡 경찰청장이 3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주 4·3 추념식에 참석해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경찰총수가 4.3 추념 행사에 참석한 것은 민 청장이 처음이다. 민 청장은 이 자리에서 "지난 역사를 깊이 성찰하겠다"고 밝혔다.
▲ 4·3 추념식 참석한 민갑룡 경찰청장... 경찰총수 첫 "사과" 민갑룡 경찰청장이 3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주 4·3 추념식에 참석해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경찰총수가 4.3 추념 행사에 참석한 것은 민 청장이 처음이다. 민 청장은 이 자리에서 "지난 역사를 깊이 성찰하겠다"고 밝혔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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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71주년 기념식이 열린 어제, 우리 언론들은 군과 경찰이 4.3 학살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개중에는 군과 경찰의 태도가 미진하다며 불만을 표시하는 보도들도 있었다.

군과 경찰이 제주 4.3에 대해 더욱 철저히 반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 한국 공권력과 서북청년단을 움직여 4.3 학살을 총지휘한 미국과 주한미군의 사과 및 반성 없이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종결되기 힘들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48년 7월 17일 주한미군육군사령부 군정청이 제59군정중대 군정장관인 에드가 노엘 소령에게 보낸 문서는 미군정이 4.3과 관련된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문서에 이런 문구들이 있다.
 
"제주도를 원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는 제주도민들에게 군정청이 무엇인가 명확하고 건설적인 제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서울에 있는 모든 정부 부처에도 제주도에 대해 우선 관심을 갖도록 지시했다. (중략) 제주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강구할 것이다."
 
제주 문제과 관련해 '서울에 있는 모든 정부 부처에 지시를 내릴 수 있었던', 또 '어떤 수단이라도 강구할' 수 있었던 미국과 주한미군이다. 

미국과 주한미군이 한국을 떠난 것도 아니고, 한국인들의 세금을 매년 1조 원씩이나 받아 방위비로 충당하면서 한국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와 주한미군에 대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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