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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8%의 표차로 승리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8%의 표차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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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게 김대중은 하늘을 함께하기 어려운 라이벌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등장으로 대선에서 혼쭐이 나고 그래서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데 이어 그를 납치 살해코자 하였다.

박정희는 3선 금기의 성벽을 무너뜨렸지만 3선으로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의 '10년 세도' 장기집권에 우선 국민들이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그동안 추진해온 경제개발이 특정지역ㆍ계층에 치우치고 빈부양극화 현상이 가속화된 데다 '혜성'같이 나타난 야당의 젊은 후보가 도전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신민당은 3선개헌 저지에 실패하고, 이 과정에서 유진오 총재가 발병하여 일본 전지요양을 떠나는 등으로 능률적인 국정참여를 하지 못한 채 국회출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신민당은 70년 1월에 전당대회, 9월에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각각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전국 대의원 606명이 참석한 시민회관의 전당대회는 단일지도체제의 당헌을 채택하고 새 당수에 유진산을 선출했다. 

신민당의 전당대회에 앞서 69년 11월 8일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 (당시 42세)이 돌연 '40대 기수론'을 제창했다. 김대중 의원(당시 45세)도 70년 1월 24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이철승(당시 48세)이 뒤따라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40대 기수'의 3파전으로 대통령 후보가 압축되었다.

'40대 기수론'에 대해 당내 일각에서는 거센 반발이 제기되었다. 특히 유진산 당수는 대통령후보가 40대라야 한다는 것은 '구상유취'한 것이라면서 맹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젖비린내 난다는 노골적인 험담이었다.

그러나 '40대 기수론'은 거역할 수 없는 당내외의 대세로 굳어져갔다.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되었다. 

막강한 주류의 세와 유진산 당수 지명의 힘을 업은 김영삼이 후보에 선출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날 일부 석간신문은 '김영삼 후보 지명'을 머릿기사 제목으로 뽑기도 했다.

그러나 지명대회의 결과는 의외였다.

1차투표 결과, 총투표수 885명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였다. 이철승의 지지표가 무효로 나타난 것이다. 2차투표의 결과는 더욱 의외였다. 김대중 의원의 역전승으로 대세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총투표자 884명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무효 16표로 김대중이 대통령후보에 지명되었다.
  
 1970년 9월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7대 대선 후보로 지명된 김대중과 이를 축하하는 김영삼.
 1970년 9월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7대 대선 후보로 지명된 김대중과 이를 축하하는 김영삼.
ⓒ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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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에 지명된 김대중은 "군정종식과 민주화 시대의 개막"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으며, 패배한 김영삼은 "나와 같은 40대 동지의 승리는 신민당의 승리요, 바로 나의 승리"라고 하면서 대통령선거에서 협력을 다짐했다.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이날 전당대회의 결과는 야당의 깨끗한 경선과 함께 김대중ㆍ김영삼이라는 참신한 정치지도자를 배출한 의미 깊은 대회로 기록되었다. 

신민당이 71년 4월 27일에 실시되는 제7대 대통령 선거전에 김대중 후보를 지명하여 선거운동에 나선 데 반해 공화당은 비교적 차분한 자세로 일선조직 강화에 열중하였다. 
  
1971년 대선 포스터 김대중은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싸웠다.
▲ 1971년 대선 포스터 김대중은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싸웠다.
ⓒ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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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3선개헌을 통해 박정희가 대통령후보에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후보지명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헌상 지명대회를 거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3월 17일 지명대회를 가진 공화당은 박정희 총재를 또 다시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대통령후보에 추대했다. 

선거전은 당연히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공화당은 전국적인 막강한 조직과 풍부한 자금력으로 선거전에 나서고, 신민당은 김 후보의 다양하고 참신한 정책과 전국적인 유세를 통해 이에 맞섰다.

김대중 후보는 10월 16일 첫 기자회견에서 ①향토예비군 폐지 ②대통령 3선조항 환원의 개헌 ③대중경제 구현을 위한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④미ㆍ일ㆍ중ㆍ소 등 4대국에 의한 전쟁억제 요구 등을 당면정책으로 제시했다.

4ㆍ27대선은 과거 어느 선거에 비해 여야 간의 정책대결로 진행되었다. 그것도 야당후보의 리드에 의한 정책대결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제7대 대선에서 유세 중인 김대중 후보 당시 대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혁신적인 공약으로 돌풍을 일으키자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색깔론과 함께 영호남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김대중도서관에 전시된 사진을 촬영했다.
▲ 제7대 대선에서 유세 중인 김대중 후보 당시 대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혁신적인 공약으로 돌풍을 일으키자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색깔론과 함께 영호남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김대중도서관에 전시된 사진을 촬영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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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후보는 지방도시의 유세를 통해 ①대통령의 재산공개 ②남북간의 서신교류ㆍ기자교환 및 체육인 접촉 ③지식인ㆍ문화인 및 언론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④제2의 한일회담 및 주월국군 철수 ⑤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권 연령 인하 ⑥반공법 제4조의 목적범 적용에 국한하는 개정작업 ⑦정부기관 일부의 대전 이전 ⑧전매사업의 공영화 내지 민영화 실현 등 많은 정책을 집권공약으로 내걸었다. 모두 155개에 달하는 집권 청사진을 제시하여 정책대결을 리드했다.

박정희 후보도 10개 부문에 걸쳐 56개 항목의 정책을 제시했다. 정치관련 공약에서 ①국민여론을 바탕으로 한 발전적 민주정치의 구현 ②야당협조로 생산적 정치윤리의 구현 ③민원행정 간소화 ④지방재정 자립도를 높여 단계적 지자제 실시 등을 제시하고, 경제정책에서 세제개혁 및 금융제도의 개선, 국토개발계획을 내세웠다. 

두 진영의 정책대결에 있어서는 김 후보의 정책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공약을 둘러싸고 쌍방간에 쟁점이 빚어지기도 했다.

쟁점은 주로 ①안보논쟁 ②통일문제와 남북교류 ③장기집권 시비 ④부정부패의 척결 ⑤예비군과 교련폐지 문제 ⑥경제정책의 특혜 시비 등에 집중되었다. 김 후보의 예비군 폐지 주장에 따른 대안의 제시는 일단 주춤해졌으나 정부 여당의 안보논쟁의 확산으로 정국에 긴장이 감돌기도 했다.

전국적인 유세 대결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벌어졌던 두 후보의 공방전이다. 박 후보는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찍어달라고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김 후보는 "이번에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단언하여 많은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공화당측에서 노골적인 지역감정을 조장한 사실이다. 특히 국회의장 이효상은 "신라 천년 만에 다시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고 지역감정을 촉발시켰다. 야당탄압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김포ㆍ강화의 김 후보 차량 총격사건을 비롯, 김 후보의 집에서 폭발물이 터지고 정일형 선거대책본부장의 자택이 원인 모를 화재를 당하는 등 상식 밖의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 

정부 여당은 '조작극'이라고 잡아 떼고, 경찰은 김 후보 자택의 화재는 "김 후보의 15세 된 조카인 김홍준 군의 단독범행"이고, 정 선거대책본부장 집의 화재는 고양이가 실화범이라고 밝혀 많은 국민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투표 당일에도 여러 가지 관권 개입으로 시비가 일었다. 심지어 김대중 후보가 투표한 마포구 동교동 제1투표소에서는 투표구 선관위원장이 사인(私印) 대신 직인을 찍어 1,690표가 무효로 돌려지기도 했다.

개표 결과 박정희 후보가 634만 2,828표를 얻어 539만 5,900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94만 6,928표를 앞질러 당선이 결정되었다. 뒷날 드러난 바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대선에 1년 국가 총예산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썼다고 드러났다. 엄청난 금권선거였다.

4ㆍ27선거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①지방색의 노출 ②표의 동서현상 ③여촌야도의 부활 ④군소정당의 철저한 몰락이었다. 이 선거에서 영남에서는 72대 28의 비율로 박 후보 지지표가 쏟아졌으나 호남에서는 65대 35의 비율로 김 후보 표가 나왔다. 지역별로 보면 박후보가 영남지방에서 전승의 기록을 세운 데 비해 김 후보는 진안ㆍ무주ㆍ고흥ㆍ곡성에서는 오히려 뒤졌다. 

제7대 대선과정에서 박정희는 더 이상 국민직선으로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유신체제를 구상하고, 김대중을 제거의 대상으로 지목, 온갖 탄압을 자행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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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