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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툰부대는 국가차원의 파병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환송행사를 치르지 못해 야당으로부터 '도둑 파병'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사진은 백마부대 월남파병 환송식 장면(1966. 8. 27) 자이툰부대는 국가차원의 파병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환송행사를 치르지 못해 야당으로부터 '도둑 파병'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사진은 백마부대 월남파병 환송식 장면(1966. 8. 27)
▲ 자이툰부대는 국가차원의 파병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환송행사를 치르지 못해 야당으로부터 "도둑 파병"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사진은 백마부대 월남파병 환송식 장면(1966. 8. 27) 자이툰부대는 국가차원의 파병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환송행사를 치르지 못해 야당으로부터 "도둑 파병"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사진은 백마부대 월남파병 환송식 장면(1966.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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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유사 이래 한번도 타국을 침략한 적이 없었다. 숱한 외침을 당하고도 결코 타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다.

고려 때에 원(元)의 일본 정벌에 동참한 일이 있었지만, 강제 동원된 비자발성이었다. 해서 한민족은 '평화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왔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에서 이 전통이 깨지고, 국제사회로부터 '미국의 용병'이라는 지탄을 받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에 국군을 파병, 참전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역사상 초유의 해외전쟁에 참전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64년 7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베트남공화국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파병 동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이때는 의료지원 등 비전투부대 파병안이다. 그러나 전투부대의 파병안은 65년 8월 13일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공화당 단독으로 처리하였다. 
 
 베트남전 당시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한 맹호부대 장병들의 베트남 상륙 장면이다. 사진은 밀라이 박물관에서 촬영.
 베트남전 당시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한 맹호부대 장병들의 베트남 상륙 장면이다. 사진은 밀라이 박물관에서 촬영.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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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처음으로 베트남전에 투입된 것은 63년 9월 11일, 남부 베트남정부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이때는 불과 130명 규모의 의무부대와 10명의 태권도 교관이 전부였다. 그후 다시 지원요청을 받아 64년 2월 14일 2천명 규모의 비전투부대인 공병대 중심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이때만 해도 국내외적으로 크게 말썽이 없었다. 

2천명 규모의 국군병력을 파병하기 위해 정부에서 제출한 동의안은 국회에서 무난히 통과되었다. 그러나 65년 6월 26일 베트남과 미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전투부대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일반국민과 학생들 사이에도 반대의견이 적지 않았고, 국회 내에서는 여야의 입장을 초월해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박정희*케네디 회담 박정희*케네디 회담
▲ 박정희*케네디 회담 박정희*케네디 회담
ⓒ 출처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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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는 곡절이 있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미국정부로부터 승인을 받고자 1966년 11월 13일부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 형식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11월 14일 오후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때 박정희는 자진해서 한국군의 파병을 제안했다. 케네디의 환심을 사고 쿠데타의 승인을 받고자 해서였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곤욕을 겪고 있었다. 최고 우방이라는 영국도 파병을 거부할 만큼 외로운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많은 미군이 희생되고 엄청난 전비의 지출로 미국 경제에 주름살이 잡혀갔다. 

이런 때에 박정희가 자발적으로 정규군의 파병을 제안함으로써 케네디는 큰 외교적 성과를 얻었고 박정희는 쿠데타의 공식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종의 야합이었다.
  
61년11월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앞줄 우)을 접견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61년11월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앞줄 우)을 접견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61년11월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앞줄 우)을 접견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61년11월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앞줄 우)을 접견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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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파병의 명분으로 6ㆍ25 때 자유우방의 도움으로 공산침략을 격퇴시킨 우리가 한 우방국이 공산침략에 희생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 6ㆍ25 이래의 혈맹인 미국을 도와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고 선전했다.    

이와 더불어 파병에는 경제적 측면에서 한ㆍ미ㆍ월 3각협력체제가 선전되었고, 군사적 측면에서 주한미군을 빼내어 베트남에 보내겠다는 미국의 위협도 따랐다.

64년 9월 소규모 비전투 부대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베트남전 개입은 73년 3월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8년 5개월 동안 지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 5차례에 걸쳐 군대가 파견되었다. 한국은 이 기간 베트남에 평균 5만 명 수준의 병력을 유지했으며 교대근무를 통해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대의 총수는 약 32만에 달했다.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 외교사료과에서 공개된 베트남 파병 관련 '브라운 각서'의 영어원본 문서.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 외교사료과에서 공개된 베트남 파병 관련 '브라운 각서'의 영어원본 문서.
▲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 외교사료과에서 공개된 베트남 파병 관련 "브라운 각서"의 영어원본 문서.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 외교사료과에서 공개된 베트남 파병 관련 "브라운 각서"의 영어원본 문서.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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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파병된 주요부대는 65년에는 미국측의 추가파병 요청과 그에 따른 보상조치인 이른바 〈브라운 각서〉를 조건으로 2만 명 규모의 백마부대가 추가파병되었다. 

베트남에 추가파병은 조약상의 의무에서가 아니라, 미국측이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공여를 약속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파병에 대한 보상조치로 14개항의 이른바 〈브라운 각서〉를 마련했다.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①추가파병에 따른 비용은 미국정부가 부담한다 ②한국군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사단의 장비를 현대화한다 ③베트남 주둔 한국군을 위한 물자 용역은 가급적 한국에서 조달한다 ④베트남에서 실시되는 각종 건설ㆍ구호 등 제반사업에 한국인 업자를 참여시킨다 ⑤미국은 한국에 추가로 AID차관과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베트남과 동남아시아로의 수출증대를 가능케 할 차관을 추가로 대여한다 ⑥한국이 탄약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자재를 제공한다는 등이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월맹군 4만 1천여 명을 사살하고 7,438㎢를 평정했으며, 참전기간 동안 국군 약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베트남전 기간 동안 노동력 진출은 65년 1백 명 미만에서 66년에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급격한 증가를 보여주었다. 63년부터 70년 6월 말까지 해외취업실적 43,508명 가운데 베트남 취업이 24,294명으로, 선원을 제외한 해외취업자의 70%를 차지하고 있어 많은 고용증대를 가져왔다고 발표되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이른바 '베트남 특수'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따라 얻어진 전시특수였다. 5만 5천 명 규모의 전투요원과 노무자ㆍ기술자 등 민간인 1만 6천여 명이 베트남에 파견되고, 이에 따라 군납, 파월장병 송금, 파월기술자 송금 등으로 66년에 6,949만 달러, 66~70년까지의 총액 6억 2,502만 달러 규모의 수익을 올렸다고 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참전의 결과 총액으로 약 10억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여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수행에 필요한 외자를 충당하여 연평균 12%의 경제성장율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 새로운 독점자본과 신흥재벌의 출현을 가져왔다. 한진그룹의 경우 66~67년의 1년간 베트남에서 71억 원을 벌어 '월남상사'라는 호칭을 들었다. 

그러나 미군 봉급의 3분의 1 수준인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순전히 미국측의 이해에 맞추어 추진되었고, 5천여 명의 무고한 청년의 희생을 가져왔으며, 공산국가는 물론 제3세계, 심지어 다수의 친서방 국가들로부터 '용병'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비동맹권 내에서 한국의 국제적 지위의 약화를 가져왔다.
  
 베트남전쟁에 파견된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베트남전쟁에 파견된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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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에 드러난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았다.

파월장병ㆍ취업자들에 의한 '현지처'와 2세 문제를 비롯하여, 고엽제 등으로 본인들은 물론 후세들의 질환 등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또한 베트남 일부  지역에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들의 잔혹한 학살을 기록한 석비가 남아 있어, 아픈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평화민족의 전통이 국제사회로부터 '용병'이라는 부끄러운 멍에를 쓰게 된 점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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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