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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이맘때였다. 1989년 3월 27일과 4월 1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김대중·김정일의 2000년 정상회담보다 11년 전인 이때, 문익환 목사(전민련 고문)와 김일성 주석이 통일 문제를 놓고 '정상회담'을 벌였다.

민과 관 사이에 무슨 정상회담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국가를 중심으로만 사고하는 관념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 측면만 놓고 보면, 정상회담이란 타이틀을 붙여도 될 만했다.

문익환 목사는 해방 이후 최대의 민족·민주운동 결집체인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고문이었다. 1989년 1월 21일 결성된 전민련은 1987년 6월항쟁으로 분출된 이 땅 민중의 정치적 의지를 대변했다. 그런 기구의 고문이 김일성 주석과 만났으니, 남한 민중의 대표자와 북한 정권의 대표자가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분단 50년 넘기지 맙시다" - "좋습니다, 해봅시다" 
 
겨레말사전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을 선물했다.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을 선물했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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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국가원수 간의 정상회담과 달리, 꽤 '아름다운 정상회담'이었다. 두 사람은 정말로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이 대화가, 문익환이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에 담겨 있다.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뒤 감옥에 갔을 때 작성한 글이다.

<늦봄 문익환 전집> 제5권에 수록된 상고이유서에 따르면, 문익환과 김일성이 커다란 테이블의 양쪽에 멀찍이 떨어져 앉고, 북한 직원이 대화 내용을 기록하는 속에서 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시작 전에 김일성(1912년 생, 당시 77세)이 "이거 너무 멀어서 안 되겠으니,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라며 문익환(1918년 생, 71세)을 옆 자리로 불렀다. 옆에 가서 악수를 나눈 뒤, 문익환은 이렇게 말했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적인 수칩니다."
 
김일성은 손을 덥석 잡으면서 "좋습니다, 해봅시다, 잘하면 될지도 모르지요"라고 화답했다. "이것은 45년 동안 남북을 갈라놓았던 분단의 장벽이 적어도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일순에 무너져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라고 문익환은 상고이유서에 썼다. 대법관에게 제출하는 글이므로 존댓말로 되어 있다.

허심탄회하고 격의 없는 분위기가 대화를 지배했을 뿐 아니라, 통일에 대한 민족의 열망과 현실 인식이 이들의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또 이들의 대화는 장차 다가올 역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꽤 생산적이었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2000년 이후의 남북정상회담들이 문·김 회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정말 '아름다운 정상회담'이었다.

회담은 두 차례에 걸쳐 8시간 동안 진행됐다. 3월 27일 제1차 회담은 주석궁에서 열렸고, 4월 1일 제2차 회담은 김일성의 '답방' 형식으로 문익환 숙소에서 열렸다. 대화는 문익환이 사전에 준비한 주제를 토대로 진행됐다.

문익환은 교차승인 문제부터 제기했다. 미국·소련·일본이 남북한 양쪽을 승인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코리아'에 집착하지 말고 '두 개의 코리아'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면서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교차승인은 통일로 가는 과도기일 뿐이라고 그는 역설했다.

하지만 문익환은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김 주석의 부정적 태도가 너무 단호"했다고 그는 썼다. 하지만 김일성은 2년 뒤인 1991년 9월 18일 남한과 함께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데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교차승인을 받아들인 셈이다. 유엔 동시 가입은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북미관계가 진전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문익환의 설득이 김일성의 심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젠 주체사상도..." 문익환의 도전적 설득
 
봉수교회에서 문익환 평양 봉수교회 앞에서 문익환 목사의 모습.
 평양 봉수교회 앞에서 문익환 목사의 모습.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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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은 연방제도 거론했다. 연방제를 너무 고집하지 말라고 했다. 처음부터 연방제로 통일하기에는 남북 간의 불신의 골이 깊으니 남북 각각의 자치를 인정하는 과도기를 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꽤 대담한 발언도 쏟아냈다.
 
 "북쪽이 주장하는 통일을 이루자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입니다."
 
이러다가 어느 천년에 통일을 이루겠냐고 김일성을 살짝 힐책했던 것이다. 의외의 센 직공에 김일성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문익환은 이렇게 썼다.
 
"이 말에 김 주석은 완전히 설득당한 것입니다. '좋습니다.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협상을 통해서 단계적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고 합의해 주었던 것입니다. '단, 유엔에 한 나라로 가입한다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입니다'고 그는 단단히 못을 박는 것이었다."
 
실질적인 두 개의 국가로 통일의 첫걸음을 내딛는 한이 있더라도 유엔에서만큼은 꼭 1국으로 행동해야 한다면서, 김일성은 연방제 안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제2조에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적혀 있다. 아버지 김일성이 문익환에게 약속했던 것을, 아들 김정일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 이행했던 것이다.

문익환의 도전적 설득은 거침이 없었다. 매우 민감한 사안까지 인정사정 안 봐주고 건드렸다. 1960년대에 김일성의 정권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 주체사상까지 언급했다.
 
"남쪽에도 통일 장애 요인들이 있어서 이걸 제거하려고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합니다. 그것이 곧 민주화운동입니다. 그것은 남쪽 사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북쪽에 있는 통일 장애 요인은 북에서 책임지고 제거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통일의 저해 요인으로 심각하게 문제시 하는 것은 주체사상입니다. 이제 주체사상도 그 강조점이 인민에게로 옮겨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체사상은 실질적으로 김일성 당신을 위한 것 아닌가, 이제 인민을 생각해서 뭔가 수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록이나 하고 있던 비서가 벌떡 일어나 '목사님이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신 겁니다'라고 거의 외치는 목소리로 흥분해서 말하는 것이이었습니다. ······ 이때만은 김 주석도 아주 무거운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잠깐 눈을 아래로 깔고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무겁게 열린 김일성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이랬다.
 
"그렇지요. 주체사상도 인민에게서 온 거지요."
 
어느 정도는 문익환의 주장을 수용한 셈이다. 1972년 북한 헌법 제4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맑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조선로동당의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돼 있었다.

문·김 회담 3년 뒤인 1992년 개정된 북한 헌법 제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1972년 헌법에 없었던 '인민을 위한 주체사상'이 언급된 것이다.

"주체사상도 인민에게서 온 거지요"라는 김일성의 한마디가 반영된 개헌이라고 볼 수 있다. 문익환과의 대화가 김일성의 심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농후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 지도자의 대화는 4·2 공동성명으로 구체화됐다. 공동성명에서는 김일성이 빠졌다. 허담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문익환의 형식상 카운트파트가 되어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암울했던 시기 봄꽃보다 반가웠던
 
호송되는 문익환 오랏줄에 묶인 통일염원, 방북 재판에서 10년형이 선고된 문익환이 호송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경찰은 기자들의 눈을 피해 이송했고, 이를 AFP통신 김철한 기자가 단독으로 포착했다(기증사진).
▲ 호송되는 문익환 오랏줄에 묶인 통일염원, 방북 재판에서 10년형이 선고된 문익환이 호송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경찰은 기자들의 눈을 피해 이송했고, 이를 AFP통신 김철한 기자가 단독으로 포착했다(기증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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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서울에서 힘들게 평양까지 와서 자신을 맹렬히 비판하는 문익환과 '정상회담'을 나누고 조평통과의 공동성명까지 만들어주는 성의를 보였다. 김일성은 문익환이 돌아길 길도 걱정했다. 돌아가면 감옥에 갈 게 뻔한 사람을 그냥 보낸다는 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어떻게 문 목사님을 미국 사람들 손에 넘겨줍니까"라며, 판문점 말고 다른 곳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느냐고 설득했다.

문익환은 '미군이야 나를 한국 정부에 넘겨주는 일밖에 더 할 일이 있으랴'는 심정으로 김일성의 호의를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상대방을 배려하고 염려하며 감사해 하는 따뜻한 마음들이 오고갔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아름다운 정상회담이었다.

30년 전 이맘때, 6월항쟁의 결과물을 짓밟으려는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이 세상을 암울하게 했다. 그런 시기에, 문익환과 김일성은 봄꽃보다 반갑고 화사한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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