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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처음부터 정권을 넘겨줄 의사가 추호도 없었다.

그의 목표는 죽을 때까지 집권욕이었다. 그래서 선거를 통한 재집권의 길을 열었다. 군사쿠데타를 주동한 인물이 여당의 후보로 나선 가운데 '민정이양'이라는 기묘한 대통령선거가 63년 10월 15일 실시되었다. 제5대 대통령선거인 것이다.

63년 5월 27일 민주공화당의 개편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박정희는 재야세력으로부터 지명수락에 앞서 최고회의 의장 등 공직을 사퇴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는 8월 13일 지포리에서 가진 전역식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이 나라에서 다시는 나와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면서 군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대통령 선거전에 나섰다.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5대 대통령선거 때 박정희가 서울고교 교정에서가진 첫 유세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1963. 9. 28). 오른쪽엔 박정희, 왼쪽엔 송요찬의 유세소식을 실었다.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5대 대통령선거 때 박정희가 서울고교 교정에서가진 첫 유세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1963. 9. 28). 오른쪽엔 박정희, 왼쪽엔 송요찬의 유세소식을 실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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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야권의 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재야정당 통합을 위해  추진되었던 '국민의 당'이 결렬되면서 몇 갈래로 흩어진 야권은 9월 15일에 마감된 대통령후보 등록에서 민정당의 윤보선. 국민의당 허정, 자유민주당 송요찬(옥중출마), 추풍회의 오재영, 정민회의 변영태, 신흥당 장이석 등 도합 6명이 나섰다.

이들 중 허정과 송요찬이 막바지에 후보를 사퇴함으로써 선거전은 대체로 여권의 박정희와 야권의 윤보선으로 압축되었으나 야권후보는 여럿이었다.

대통령후보의 난립상태를 보인 가운데 10ㆍ15대통령 선거일이 공고되자 여야 7대 1의 비율로 선거전이 개막되었다. 사전조직을 통해 리ㆍ동ㆍ반에 이르기까지 조직책을 갖고 있던 민주공화당의 방대한 전국조직과 고무신ㆍ밀가루 살포 등 막대한 자금력에 비해, 야권은 난립상태에서 군정종식을 바라는 국민여론에 호소하는 홍보전으로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1963년 간첩혐의로 황태성 총살형을 집행했다는 기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357쪽 갈무리
 1963년 간첩혐의로 황태성 총살형을 집행했다는 기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357쪽 갈무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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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각당 후보자들은 지방유세를 갖고 각종 공약을 제시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런데 박정희 후보가 9월 23일 방송연설을 통해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된 자유민주주의와 강렬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대결"이라고 말한 데서 이른바 '사상논쟁'의 불이 붙었다. 

바로 다음날 지방유세 도중에 전주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윤보선 후보는 "여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으며 이번 선거야말로 이질적 사상과 민주사상의 대결"이라고 응수함으로써 사상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윤 후보는 이어 "박정희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라는 뜻을 펴서 국민을 놀라게 했다. 

같은 날 윤 후보의 찬조연사로 나선 윤재술 의원은 여수에서 "이곳은 여순반란사건이란 핏자국이 묻은 곳이다. 그 사건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 죽었느냐, 살았느냐? 살았다면 대한민국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여러분은 아는가, 모르는가? 여러분이 모른다면 저 종고산(鐘鼓山)은 알 것이다"라고 박정희를 공격했다.
  
1963년 제5대 대선 당시 윤보선 후보측은 선거 이틀전에 박정희 후보의 좌익전력을 폭로, '사상논쟁'을 가열시켰다. 사진은 당시 이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호외(1963.10.13). 1963년 제5대 대선 당시 윤보선 후보측은 선거 이틀전에 박정희 후보의 좌익전력을 폭로, '사상논쟁'을 가열시켰다. 사진은 당시 이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호외(1963.10.13).
▲ 1963년 제5대 대선 당시 윤보선 후보측은 선거 이틀전에 박정희 후보의 좌익전력을 폭로, "사상논쟁"을 가열시켰다. 사진은 당시 이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호외(1963.10.13). 1963년 제5대 대선 당시 윤보선 후보측은 선거 이틀전에 박정희 후보의 좌익전력을 폭로, "사상논쟁"을 가열시켰다. 사진은 당시 이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호외(196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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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렇게 되자 긴급회의를 소집한 최고회의는 윤 후보의 전주발언을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대처키로 하고, 공화당에서는 선거법위반혐의로 고발하면서, "윤씨가 대통령에 재직하고 있을 때부터 5ㆍ16사태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폭로하여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자 대통령후보를 낸 재야 6당은 박 후보의 등록취소를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는가 하면, 공명선거투쟁위원회 주최의 선거집회에는 "간첩 황태성의 책략에 의해 공화당의 2원제 사전조직이 추진되었으며 밀봉교육이 실시되었다"는 내용의 삐라가 뿌려져 사상논쟁을 부추겼다.

이 무렵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인 허정이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의장이 한일회담에서 양보한 대가로 일본 민간회사로부터 거액의 수표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고 폭로했으며, 민정당 기획위원회는 "박 의장의 사상은 이질적이며 위험한 존재"라는 성명을 발표해 쌍방의 공방은 더욱 확산되었다. 

또한 9월 25일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자민당 대표 김준연이 61년 5월 26일자 미국 <타임>지의 박정희 프로필을 인용, "박 소장은 전에 공인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군반란(여순사건)을 조직하는 데 협력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 씨의 장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향하여 반란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형을 면제받았다. 그는 지금 분명히 강력한 반공주의자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기자회견에서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됐다는 야당측 주장을 해명할 수 없느냐"는 물음에 "허무맹랑한 일이어서 해명할 필요조차 없으며 법이 가려낼 것"이라고 가볍게 응수했다. 그리고 여순사건 당시 진압작전을 지휘한 원용덕을 내세워 "박 의장은 여순사건에 관련이 없으며 토벌작전 참모로서 공을 세웠다"고 상반된 주장을 펴도록 했다.

선거 종반 과정에서 윤 후보를 구속하자는 최고의원들의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인지사건'으로 수사한다는 선에서 일단락되고, 선거전은 끝까지 정책대결 아닌 사상논쟁으로 전개되었다.
  
 1963년의 대선 포스터 중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신민당 후보의 벽보.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보다 전국 종합 1.5% 더 득표했는데, 대구에서는 7.2% 차이로 눌렀다. 이 선거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지역감정 유발 투표'를 조장한 정치공작이 작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3년의 대선 포스터 중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신민당 후보의 벽보.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보다 전국 종합 1.5% 더 득표했는데, 대구에서는 7.2% 차이로 눌렀다. 이 선거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지역감정 유발 투표"를 조장한 정치공작이 작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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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전은 종반에 접어들면서 야당 단일후보의 실현을 위해 허정이 사퇴한 데 이어 송요찬도 사퇴함으로써 박ㆍ윤의 양자대결로 압축되었다. 투표일을 5일 남겨둔 10월 10일 민정당의 찬조연사 김사만이 경북 안동 연설에서 "대구ㆍ부산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등 발언을 하여 선거분위기를 더욱 과열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회오리바람을 몰고온 사상논쟁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투표가 진행되었다. 선거분위기의 과열 탓이었는지 투표율은 84.99%로 높게 나타났다. 

선거결과의 개표집계는 16일 자정까지 윤 후보가 리드하다가 17일 새벽부터 박 후보가 우세하여 15만 6천여 표의 차이로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중앙정보부는 한때 윤 후보의 우세로 집계되자 특수 요원들을 동원해 그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후일 알려졌다. 

대통령 선거전이 끝나고 '사상논쟁'의 뒤끝은 월간 <사상계>가 63년 11월호에서 "특집 진(眞)ㆍ위(僞)를 가려라!"를 게재하면서 다시 한 번 국민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이 특집기사는 경향신문 정치부장 김경래의〈전향자냐? 아니냐? - 인간 박정희의 전향주변〉, 정종식 한국일보 정치부장의〈군사혁명과 윤보선〉. 신상초 정치평론가의〈무엇이 사상논쟁이냐?〉, 임방현 동아일보 논설위원의〈자주ㆍ사대논쟁의 저변〉, 서기원 서울경제신문 기자의〈정치자금 수수께끼의 실마리〉로 구성되었다.

세간의 관심은 김경래의 박정희의 전향관련 기사였다. 헌정사 이래 최초로 전개된 대선의 사상논쟁, 특히 좌익으로 몰린 박정희가 당선되면서, 그의 전력은 비상한 관심사가 되었다. 

이 기사는 선거과정에서 "전 ML당 당수였으며 자민당 대표최고위원 김준연 씨는 5ㆍ16 혁명 직후 <타임>지에 실린 한국군사혁명 전모를 소개한 기사 중 (61년 5월 26일치) 박 의장의 프로필을 인용하고, '박 소장은 공인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군반란(여순반란사건)을 조직하는데 협력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 씨의 장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향하여 반란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형을 면제받았다. 그는 지금 분명히 강력한 반공주의자이다' 라는 사실을 폭로하여 윤보선 씨의 전주 발언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날 강연회장은 물을 끼얹은 듯한 조용한 분위기 속에 당혹과 불안감이 감돌았다."라고 정황을 소개했다.
  
 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윤보선 간의 사상논쟁을 보도한 1963년 10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윤보선 간의 사상논쟁을 보도한 1963년 10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 동아일보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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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후보의 전력을 두고 여야가 바뀌어 벌어진 사상논쟁은, 당사자가 절대 권력자가 되면서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덮히고 말았다. 이후 대선에서는 주로 수구세력이 민주진영의 후보들에게 색깔론의 공세를 벌였다. 한국적 매카시즘의 광풍은 현재진행형이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여 2년여의 군정을 거쳐 권력기반을 조성하고, 몇차례 번의를 거듭한 끝에 민정에 참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과정에서 야당측으로부터 과거 남로당 경력이 제기되는 등 이른바 사상논쟁이 벌어졌으나 그는 당선되었고, 향후 장기간의 폭압통치가 유지되었다. 웬일인지 일본군 장교의 전과는 논란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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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