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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혁명 후 시민들의 시위대열
 4월 혁명 후 시민들의 시위대열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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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2년의 통치기간 백색독재, 구호는 반공을 내걸면서 권력을 유지하였다. 평화통일론까지 탄압하면서 시대착오적인 북진통일론만 내세웠다. 따라서 4ㆍ19혁명은 단순히 독재정권을 타도한 정치혁명이 아니었다.

프랑스혁명이 앙시앙 레짐(구체제)을 타도하면서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세기적인 가치를 제시했듯이,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에서 금기시되었던 평화통일을 바라는 신세대들과 혁신계 활동의 물꼬를 텄다.

4월혁명과 더불어 새롭게 나타난 가장 특별한 현상중의 하나는 혁신세력의 등장이었다. 혁신세력은 이승만 치하에서 불법화되고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형하는 등 가혹한 탄압으로 오랫동안 동면상태를 유지해오다가, 4월혁명의 물결을 타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혁신정당 중에서 4ㆍ19 직후에 정당간판을 내걸고 7ㆍ29총선에 입후보자를 낸 것은 사회대중당ㆍ한국사회당ㆍ혁신연맹 등이었다. 혁신정당의 재건을 목표로 구진보당 간부와 민주혁신당 일부가 결성한 사회대중당은 1960년 6월 17일 창당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서상일ㆍ윤길중 등을 간부로 선출하여 창당작업에 착수, 그해 11월 24일 출범했다.

통일사회당은 61년 1월 21일 결성되었으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는 60년 9월 사회대중당, 혁신동지총동맹, 천도교, 유교회, 민주민족청년동맹, 4월혁명학생연합회 등 혁신계 정당 및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했다.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은 61년 2월 21일 통일사회당, 사회혁신당, 삼민회, 광복동지회 등 민자통을 이탈한 정당ㆍ사회단체가 결성한 통일운동단체다. 혁신연맹은 김창숙ㆍ장건상ㆍ유림ㆍ조경한ㆍ정화암ㆍ김학규 등 혁신계의 원로급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다.

대부분의 혁신정당들은 7ㆍ29총선에 입후보자를 내세웠으나 이들 중에서 사회대중당이 민의원 4명, 참의원 1명을 당선시켰고, 한국사회당은 민ㆍ참의원 1명 씩을 각각 당선시켰을 뿐이다. 혁신세력의 난립으로 유력한 후보들이 대부분 당선되지 못한 것이다.

통일사회당은 창당선언문에서 "폐쇄적 할거성을 지양하고 이념적 산화(酸化)를 시도할 겨를도 없이 산만하고 무력한 태세로 7ㆍ29 총선에 임한 것"을 철저히 자아비판하고, "조국을 통일ㆍ자주ㆍ독립의 훌륭한 민주적 복지국가로 발전시키는 역사적 대과업을 능히 담당, 완수할 수 있는…민주적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대동적이고 단일화한 혁신정당을 창건하려 한다"고 밝혔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는 '자주ㆍ평화ㆍ민주'의 3대 원칙 아래 남북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즉각적인 남북정치협상 △남북민족대표들에 의한 민족통일건국최고위원회 구성 △외세배격 △통일 협의를 위한 남북대표자회담 개최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이나 다른 형태의 선택여부 결정 등의 중립화 통일방안 등을 주장했다. 

민자통은 이와 함께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제의를 적극 지지하여 61년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1만여 명의 시민ㆍ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대회는 △ 남북학생회담의 전폭적 지지 △남북정치협상 준비 등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통일의 열기를 드높였다. 4ㆍ19혁명 공간에 나타난 대표적인 행사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중립화조국통일연맹은 민자통의 '자주ㆍ평화ㆍ민주'라는 원칙이 지나치게 여러 가지로 해석될 소지가 있고 또 통일의 기본방향이 될 수 없다는 두 가지 점을 들어 탈퇴이유를 밝히고 △ 국제회의를 통한 국제적 보장 하에 영세중립통일을 기해야 하며 △영세중립화를 성취하기 위해 국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영세중립화방안'을 제시했다. 

4월혁명으로 통일론의 금제가 풀리면서 대학생들은 다양한 통일론을 들고 나왔다. 대표적인 것은 60년 9월 24일 고려대학교가 주최한 '민족통일에 관한 제문제'라는 논제로 전국대학생 시국대토론회였다. 여기서 영세중립통일방안의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이날 학생들의 통일방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중립화 운동의 전개 
② 중립적인 민주주의 통일정부 수립
③ 중립국가로서 남북한 통일.
④ 중립국이 되는 길은 민족이 자립 독립하는 길.
⑤ 중립화 통일을 국내에서 여론화 시킬 것 등으로 되어 있다.

5ㆍ16쿠데타로 중립화통일론을 주장했던 혁신계와 학생지도자들이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중립화통일론은 지하로 잠복하거나 단절되었다.

통일문제가 특히 젊은 층에 호소력이 있는 것을 인식한 혁신정당들은 통일과 관련한 조직체를 만들었다. 사회대중당은 민족자주통일연맹을 구성했으며, 통일사회당은 중립화통일연맹을 지원했다. 이 단체들은 혁신정당을 대신하여 적극적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장면 정부가 통일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것을 촉구했다.

혁신세력은 장면 민주당 정권에 의해 추진된 '반공법' 제정과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안'을 양대 악법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반대투쟁에 나섰다.

선거를 통해 원내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데 실패한 혁신세력은 시위와 행동으로 국민의 지지를 확대하고자 벼르던 중, 마침 정부에서 제안한 두 개의 안보법안에 대한 반대운동을 통해 세력확대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두 가지 이슈는 혁신계의 급진파와 중도파 양집단이 공동의 대의명분을 위해 협동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혁신정당들과 노조세력, 일부 학생들은 61년 3월 22일 오후 2시를 기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대대적인 '2대악법 반대성토대회'를 열었다. 1만여 명이 넘는 민중은 "밥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 "데모가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 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이면서 2대악법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에 맞서 4개의 반공단체가 동원되어 안보법안을 지지하는 데모를 벌여 한때 서울의 중심 거리는 양측 시위대의 물결로 뒤덮였다.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반공법 제정 반대의 성토대회에 참석했던 일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오고, 혁신계 인사들과 합류하여 밤 8시경부터 시청 앞에서 시작된 횃불 시위대가 시가행진을 하는가 하면 시위대의 일부는 미대사관 앞에 집결하여 연좌데모를 벌였다. 이날 밤의 횃불 시위대의 일부가 과격한 행동을 자행하면서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혁신세력의 횃불데모는 그동안 혼미상태를 거듭해온 정계에 긴장상태가 고조되고 4, 5월 위기설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갓 출범한 장면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4월혁명의 공간에서 혁신계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일부 과격한 용어와 슬러건을 내거는 등의 활동은, 취약한 장면 정부와 지속된 정국의 혼미상태는 국민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또 혼란의 틈새를 노리는 군부의 야심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주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1년 봄부터는 치안질서가 정상을 유지하고 정국도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다.

8ㆍ15 해방공간에서 특히 신탁통치 문제와 미ㆍ소공동위원회, 단선ㆍ단정 문제 등에서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했던 지도자들처럼, 4ㆍ19 공간에서 민주당의 분열과 보수ㆍ혁계의 지도자들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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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