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1960년 3월 15일 낮 12시 45분 '곡 민주주의 장송' 현수막을 들고 광주 금남로에서 전국 최초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나선 장병준과 민주당 당원들.
 1960년 3월 15일 낮 12시 45분 "곡 민주주의 장송" 현수막을 들고 광주 금남로에서 전국 최초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나선 장병준과 민주당 당원들.
ⓒ 장병준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권력자가 이성을 잃으면 자신은 물론 국가를 파멸시킨다. 그래서 정치학자 삼월 바틀러는 "권력은 마주와 같다"고 했다. 마실수록 취하고, 취할수록 마시고 싶은 것이 권력이라는 '마주'이다.

이승만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헌정을 유린하면서 무소불위하게 12년간이나 집권하고, 그의 나이도 80이 넘었다. 하지만 변치 않는 것은 끝없는 권력욕망이었다.

제4대 정ㆍ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선거는 이승만 정권이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거듭된 실정과 장기 독재로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관권을 동원한 엄청난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자유당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건너간 틈을 타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는 정ㆍ부통령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한다고 전격적으로 공고했다. 선거 날짜 택일부터 정략적이었다.
  
성남고 교정의 '3.17의거기념비' 성남고 학생들은 1960년 3월 17일 서울에서 최초로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 성남고 교정의 "3.17의거기념비" 성남고 학생들은 1960년 3월 17일 서울에서 최초로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이승만 대통령은 59년 3월 선거를 앞두고 선거관련 5부장관을 경질했다. 내무 최인규, 재무 송인상, 부흥 신현확, 농림 이근직, 교통 김일환을 임명하고, 시도지사와 일선 경찰서장들 역시 선거팀으로 교체했다. 하나 같이 우직한 충성파들이었다.

최인규는 취임사를 통해 "공무원과 공무원 가족은 대통령과 정부의 업적을 국민에게 선전해야 하며 이같은 일이 싫은 공무원은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 라면서 공무원을 공공연하게 선거에 동원하였다. 선거법 위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자유당은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사망한 관계로 이미 재집권이 보장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함량이 크게 부족한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켜야 한다는 목적으로 선거에 온갖 부정과 관권을 동원했다. 최인규는 공공연히 각 지방의 시장ㆍ군수ㆍ경찰서장의 사표를 미리 받아놓고 부정선거에 협력하지 않는다거나, 선거결과가 좋지 못할 때는 파면시킨다는 것을 통고하고 압력을 가했다.

행정기관 뿐만 아니라 극우 어용단체인 대한반공청년단을 강화시켜 이들을 일선 행동대원으로 이용했다. 59년 8월 12일 단장을 신도환으로 바꾼 반공청년단은 전국 89개 시ㆍ군 단부를 조직하는 한편, "우리 전 단원은 국부 이승만 각하와 서민정치가 이기붕 선생을 정ㆍ부통령으로 선출하기 위하여 엄숙히 약속한다" 는 구호를 외치고 떼 지어 몰려 다니면서 유권자들을 공갈협박했다.

자유당의 부정선거의 핵심은 4할 사전투표, 3인조ㆍ5인조ㆍ9인조의 공개투표 등을 통해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5%를 사전에 달성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부정선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야당 참관인들을 매수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테러하여 투개표장에서 쫓아내도록 지령했다.
  
 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일찌기 없던 공포분위기'와 '3인조 공개투표 감행?', '사복경찰이 공개투표지휘'하는 기사제목이 선명하다. 동아일보는 3.15선거를 부정선거로 정의한 것이다.
 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일찌기 없던 공포분위기"와 "3인조 공개투표 감행?", "사복경찰이 공개투표지휘"하는 기사제목이 선명하다. 동아일보는 3.15선거를 부정선거로 정의한 것이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이런 자유당의 부정선거 계획이 말단 경찰관에 의해 언론에 폭로되었다. 자유당의 부정선거 폭로내용은 4할 사전투표와 3인조ㆍ5인조의 공개투표 외에 ∆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야당 성향 유권자의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 투표함 바꿔치기 ∆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 득표수 조작발표 등이 포함되었다. 이렇게 부정선거의 음모가 사전에 폭로되었는데도, 자유당의 관권ㆍ부정선거는 멈추기는커녕 더욱 거침없이 공개리에 자행되었다.

자유당은 이같은 관권부정 외에도 엄청난 선거자금을 조달하여 유권자를 매수하거나 동원비에 썼다. 이기붕ㆍ한희석ㆍ박용익ㆍ송인상 등이 협의하여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을 통해 거액의 은행자금을 기업에 융자해주고 그 융자금을 선거자금으로 염출했으며, 기업인들로부터는 별도로 선거자금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모은 부정선거 자금이 천문학적 수준이었다. 

선거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전남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괴한에게 구타ㆍ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전국 도처에서 폭력이 난무했다. 민주당은 자유당의 부정선거 계획과 내무부의 부정투표지령을 폭로하면서 부정 살인선거의 중단을 촉구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자유당 정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3월 15일 실시된 선거는 자유당의 사전계획대로 전면적인 부정선거로 이루어졌으며 야당 참관인들이 거의 퇴장한 가운데 부정투개표가 진행되었다. 민주당 중앙당은 이날 전국의 모든 선거참관을 포기하는 한편 선거의 불법무효를 선언했다.

어용기관이 된 중앙선관위는 선거결과를 발표, 전국의 유권자 1,119만 6,498명 중 1,050만 9,482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963만 3,376표로 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통령에는 833만 7,059표를 얻은 이기붕이 당선되었다고 공고했다. 장면은 184만 4,257표, 김준연은 23만 5,526표, 임영신은 9만 9,090표를 얻었다. 이승만은 전체 유권자의 92%, 이기붕은 78%를 득표했다는 발표였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수가 총유권자수를 초과하기도 하여 자유당측은 내무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이승만은 80% 정도로, 이기붕은 70~75% 정도로 하향조정하도록 지시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선거가 아니라 선거라는 이름의 정치곡예였다. 

3ㆍ15선거가 부정과 폭력과 난장판으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많은 국민이 분노에 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용기 있게 떨치고 일어선 것은 마산의 시민ㆍ학생과 야당 당원들이었다. 야당 당원들을 더욱 분개시킨 것은 자유당으로 변신한 이 지역 출신 허윤수 의원 때문이었다. 

마산시민ㆍ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이를 강제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ㆍ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내게 되자 격분하여 남성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자유당으로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 이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는 등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은 시위 주모자로 구속한 26명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정부는 마산의거를 공산당의 조종으로 몰아붙여서 더욱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마산 바다 위로 떠오른 마산상고 김주열 시신. 이 사진이 4.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1960. 4.)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마산 바다 위로 떠오른 마산상고 김주열 시신. 이 사진이 4.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1960. 4.)
ⓒ 허종/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시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는 4월 11일 1차 시위 당시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의 시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실종 27일 만에 낚시꾼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자 마침내 온 시민이 궐기하여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제2차 마산의거에 불길을 댕겼다.

이날 3만여 명의 마산 시민들은 자유당 건물과 남성동파출소에 이어 마산경찰서, 자유당 허윤수 의원의 집, 북마산파출소, 창원군청, 허윤수가 경영하는 동양주정과 무학주조공장을 부수고 재차 마산경찰서 앞으로 밀려갔다.

밤 9시경 무장한 경찰과 시민들이 대치한 가운데 경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또 사망했다. 밤 12시경 이날의 시위는 시민들의 자진 해산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16일에도 시위가 이어졌다. 마산공고생, 창신고생, 마산여고생, 마산고생들이 앞서고 시민 수천 명이 합세했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이 소방호스로 붉은 물감을 탄 진화용 물을 시민들에게 퍼부었다. 그리고 얼굴과 옷에 붉은 물이 든 시민을 체포하여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뒤집어 씌우고, 이승만은 마산 시민들의 시위를 공산당의 사주라고 특별성명까지 발표하였다. 

4월 17일 한옥신 부장검사가 "공산당 개입은 속단할 수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마산의거는 국민저항권의 발동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마산의거는 새봄의 남풍과 함께 내륙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