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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은 단순한 법률이 아니라 바로 이땅의 불행한 현대사를 그 날개로 온통 뒤덮고 있는 거대한 괴조(怪鳥)와도 같은 것이었다." (박원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했던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박정희ㆍ전두환 정권에서 180여 명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칼날 아래 사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통계조차 나와있지 않는 실정이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1948년 12월 1일부터 현재까지 보안법처럼 국내외적으로 논란과 곡절을 많이 겪은 법률도 드물 것이다. 여수ㆍ순천사건 직후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법보다 먼저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58년 12월 소위 보안법파동, 60년 민주당집권 때 폐기,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강화, 91년 5월 노태우 민자당에 의한 날치기 개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2.4 파동을 보도한 58년 12월25일자 조선일보. 사진 속 흐릿하게 보이는 인물(가운데)이 당시 국회 본회의장 농성을 주도했던 조병옥 민주당 대표. 2.4 파동을 보도한 58년 12월25일자 조선일보. 사진 속 흐릿하게 보이는 인물(가운데)이 당시 국회 본회의장 농성을 주도했던 조병옥 민주당 대표.
▲ 2.4 파동을 보도한 58년 12월25일자 조선일보. 사진 속 흐릿하게 보이는 인물(가운데)이 당시 국회 본회의장 농성을 주도했던 조병옥 민주당 대표. 2.4 파동을 보도한 58년 12월25일자 조선일보. 사진 속 흐릿하게 보이는 인물(가운데)이 당시 국회 본회의장 농성을 주도했던 조병옥 민주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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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경위권이 발동된 가운데 자유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이른바 '보안법파동'은 자유당 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하나의 폭거였다.

그해 5ㆍ2총선거에서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한 채 갈수록 지지기반을 상실해간 이승만과 자유당은 그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해 부심해오던 중 60년의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발을 묶고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릴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데로 눈길을 돌렸다.

자유당은 이와 같은 숨겨진 목적 아래 내세우기는 간첩을 색출하고 좌경세력을 발본색원한다는 명분을 들어 그해 8월 11일 신국가보안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자유당 지도부는 정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만든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된 신국가보안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하되,

  ①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②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며
  ③ 상고심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

자유당의 이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은 "간첩개념의 확대규정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다"고 지적하고, "변호사의 접견금지와 3심제의 폐지는 명백한 헌법위반"이라며 반대에 나섰다. 일부 언론도 정부여당의 의도를 간파하고 강력히 비판하였다.

민주당과 무소속 의원 95명은 '국가보안법개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백남훈, 지도위원에 조병옥ㆍ곽상훈ㆍ장택상 의원을 추대하여 범야 연합전선으로 저지투쟁에 나섰다. 자유당도 이에 맞서 엉뚱하게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 장택상 의원을 회유하여 위원장으로 추대함으로써 범야 연합전선의 붕괴를 기도하면서 강행통과를 서둘렀다.

이승만 정권은 그동안 무리를 거듭하면서 이 대통령의 3선에까지 이르렀는데, 60년 봄으로 예정된 4선을 위해 국민의 지지보다는 보안법으로 억압통치의 장치를 만들어서 영구집권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러한 책략에서 58년 1월 31일 차기 대통령선거의 강력한 라이벌의 하나인 진보당 조봉암 위원장 등 간부 7명을 간첩혐의로 구속하고, 이미 시효가 만료된 미군정법령 55호까지 꺼내어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는 등 야만적인 정치공작의 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괴조'는 반세기도 훨씬 지난 2014년 11월 헌법재판관들의 손을 빌어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기까지 불사조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정치적인 목표를 '오로지 재집권'으로 설정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야당과 국민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보안법의 강행 처리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거칠 것이 없었다.

12월 19일 법사위에 상정하여, 야당의원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자유당 의원만으로 3분 만에 기습 처리하는 변칙성을 보여 주었다. 이때의 날치기 수법은 역대 독재정권의 국회 날치기의 교범이 되었다.

자유당 의원들의 기습작전으로 법사위에서 허점을 찔리고 만 야당의원들은 법사위의 변칙처리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의사당 안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두 당은 협상을 벌였지만 무위에 그치고, 제1공화국의 의정사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기게 되는 12월 24일이 다가왔다.

자유당 정부는 강행통과를 위해서 내무부와 은밀한 협의를 거쳐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경찰서에서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인 무술경찰관 3백 명을 임시로 특채하여 3일 동안 비밀리에 국회경위의 역할을 담당할 훈련을 시켰다. 정치야욕을 위해서는 국법질서나 국회의 권위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1958년 12월 국회 경호권을 발동했던 한희석 국회 부의장 1958년 12월 국회 경호권을 발동했던 한희석 국회 부의장
▲ 1958년 12월 국회 경호권을 발동했던 한희석 국회 부의장 1958년 12월 국회 경호권을 발동했던 한희석 국회 부의장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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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상오 10시를 기해 훈련된 무술경위들은 사회를 맡을 한희석 부의장을 에워싸고 본회의장에 난입하여 연 6일 째 철야농성으로 지칠대로 지친 야당의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일부는 끌어다가 지하실에 감금시켰다. 이 과정에서 구타당한 의원들도 있었다.

본회의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무술경위들의 폭력으로 야당의원들의 비명이 의사당 안팎에 메아리쳤다. 무술경위들에게 저항하다가 많은 야당의원들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박순천ㆍ김상돈ㆍ허윤수ㆍ유성권ㆍ윤택중ㆍ김응주ㆍ김재건 의원 등이 중경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응급치료를 받았다.

이렇게 야당의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무술경위들이 의사당의 모든 출입문을 차단시키고 있는 가운데 한희석 부의장의 사회로 자유당 소속 의원들만으로 본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법절차도 무시한 채 순식간에 보안법을 통과시킨 데 이어 59년도 새해예산안과 12개의 새법개정안 등을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보안법이 일방적으로 처리된 후 지하실 한 구석에 감금돼 있던 야당의원들의 '금족령'이 풀리자 이들은 태평로 의사당 앞에서 "보안법무효",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지만 '기차'는 이미 떠나고 말았다.

야당활동과 언론규제를 목적으로 하여 2ㆍ4파동을 일으키면서 보안법을 통과시킨 자유당 정권은 법의 효력이 발생한 지 20일 만인 59년 2월 5일 서울지방법원으로 하여금 당시 정론지인 <경향신문>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내게 하고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 폐간명령을 내리는 등 정권말기적인 횡포를 서슴지 않았다.
  
 통일토크콘서트를 종북몰이하는 것에 대한 황선(좌)과 신은미의 기자회견 모습
 통일토크콘서트를 종북몰이하는 것에 대한 황선(좌)과 신은미의 기자회견 모습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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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한국 민족운동(가)의 탄압을 목적으로 하여 제정한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한 국가보안법은 국가안보보다 독재정권이 정부비판자(세력)에 대한 탄압을 목적으로 제정되고 실제로 악용돼 왔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 2015년 1월 10일 이른바 '종북 콘서트'를 이유로 재미동포 신은미 씨를 강제 출국시킨 것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재야시절 <국가보안법연구> 1, 2, 3권을 잇달아 내면서 "지금까지 검토해 온 국가보안법의 운용현실은 국민의 기본권을 대량으로 유린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구제방법도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저항권의 행사를 가능하게 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한다는 법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악법은 그 자체로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다음은 이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소크라테스가 사이비 법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국가권력에 의해 '법'이라고 설정된 것은 무조건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님은 위 대화내용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실정법의 정당성의 근거 및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를 들고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구성원들이 스스로 법으로 지킬 것으로 동의하고 약속한 점을 들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정법들은 어떠한가? 과연 우리의 실정법이 구성원들에게서 정당한 동의나 약속을 받고 제정된 것인가?

법실증주의자들이 국민들에게 실정법이 악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며 금과옥조처럼 되뇌이는 바로 그 논리에 의해서도, 그것도 국민주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약 2400년 전의 기준에 의해서도 우리의 현행 실정법 질서가 수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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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