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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영
 이기영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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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보고 있는 곳에 무엇이 있니?

    황량한 들판에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했구나
         -이기영 디카시 <봄날>


월간 『쿨트라』 2019년 3월호에 수록된 이기영 시인의 신작 디카시 <봄날>은 왜, 디카시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디카시가 문자시와 달리 극순간 멀티 언어 예술임을 웅변한다. 영상의 두 마리 개의 포즈도 극순간의 그것이 아닌가. 일초도 더 빠르게 혹은 늦게 디지털카메라를 들이대었다면 개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사람이라서 다시 포즈를 취해 달라 할 것인가. 개들의 저 눈빛을 보라. 경건하기까지 하다. 시인은 묻는다. "너희가 보고 있는 곳에 무엇이 있니?" 아마 사람은 볼 수 없는 신의 존재라도 본 것은 아닐까?

전혀 엉뚱한 얘기는 아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발람의 길을 가로막은 주님의 천사>를 보자. 이 그림에는 나귀가 무릎을 꿇은 채 등 위에 탄 하나님의 선지자 발람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나귀의 눈빛이 인상적이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가는 발람을 죽이려고 칼을 든 주님의 천사가 막아섰는데도 발람은 보지 못하고 오히려 가지 않는다고 나귀를 채찍으로 때렸다. 발람은 결국 나귀 때문에 목숨을 건지긴 한다.

때로는 미물인 짐승의 눈빛 하나도 예사롭지 않을 때가 있다. 시인은 황량한 들판에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을 볼 뿐이다. 개들은 시인이 보지 못하는 무엇을 본 것이다. 시인은 황량한 들판에 꽃이 피면 봄날이라는 것만 보인다. 이 봄날 개들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렘브란트의 그림의 나귀처럼 사람이 보지 못하는 무엇을 본 것일 터인데.

렘브란트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시인이 언어로 저 개의 눈빛을 온전하게 그려낼 수가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이다. 시인은 디카로 찍어 보여줄 수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 신비한 눈빛 앞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황량한 들판에/이제 막,/꽃이 피기 시작했구나"라는 사람의 말밖에는 하지 못한다. 개들의 눈빛 앞에서는 왠지, 이 말이 초라하기까지 하다.

이 디카시에서 개들의 포즈, 그 눈빛은 시인의 언술한 그 어떠한 언어보다 더 깊은 말을 하는 듯하다. 시인은 봄날이라는 뻔한 말 이상의 더 의미 있는 말은 하지 못한다. 시인은 봄날에 개에게 길을 묻는다. 아니 시인은 개에게 조심스럽게 희망을 묻는다. 황량한 들판에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했으니, 분명히 시인이 바라는 무엇이 보이지 않느냐고 애써 묻는 것이 아닌가. 폐일언하고 이 디카시의 영상기호는 문자기호로서는 다하지 못한 말을 천둥 같은 소리로 문자기호와 함께 말한다. 이것 바로 멀티 언어라 할 것이다.

평화를 가져오실 초인이라도 오실 모양

꽃 피는 봄날 두 마리 개의 눈빛이 렘브란트의 나귀의 원망스러운 눈빛과는 사뭇 달리 경건한 눈빛이고 보니, 이 봄날에는 구름을 타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실 초인이라도 오실 모양이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를 한 덩어리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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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다.